대행 · 8장 협상
대행 · 도해

8장 협상

서울 성북구 성북동, 2026년 10월 3일 토요일 (개천절)
약 11분

정숙은 현관에서 코트 단추를 끝까지 채웠다. 회색 코트, 검은 핸드백. 핸드백 손잡이를 두 손으로 쥐었다.

“병원 검진이에요. 두 시간이면 와요.”

“공휴일인데 병원이 열어요?”

“검진센터는 열어요.” 정숙은 하윤 대신 신발장 거울을 보며 말했다. “여사님은 서천에 제사가 있어서 어제 내려갔어요. 오 실장도 오늘은 안 와요. 아버지 부탁해요.”

정숙이 대문을 나섰다. 자동 잠금장치가 삐 소리를 내며 걸렸다. 하윤은 현관에 잠깐 서 있었다. 공휴일에 문을 여는 검진센터. 그런 데도 있을 것이다. 하윤은 그 생각을 접어 두었다.

10.3. 정숙 외출(검진, 두 시간). 마영순 휴무. 오규식 없음. 이 집에 둘.

거실로 돌아왔다. 회장은 창가에 휠체어를 대고 앉아 있었다. 무릎 담요, 회색 카디건. 오후 2시의 햇빛이 그의 손등에 떨어졌다. 큰 손이었다. 손톱 밑이 깨끗했다.

일주일 전 새벽, 그 손이 담배를 화단 흙에 꽂았다.

“아부지.”

회장이 고개를 돌렸다. 물처럼 풀린 눈.

“유진이 왔나.”

“응. 귤 까 줄까?”


한 시간 동안 둘은 연기를 했다.

하윤은 소파 끝에 앉아 귤을 깠다. 왼손으로, 꼭지에서 시작해서, 한 줄로. 껍질이 끊기지 않고 무릎 위로 내려왔다. 회장의 눈이 껍질을 따라 내려왔다. 끝까지. 껍질이 다 떨어지고 나서야 그가 손을 내밀었다.

“아부지, 귤.”

“달다. 달아.”

회장은 귤을 한 조각씩 떼어 먹으며 리야드 이야기를 했다. 모래가 밀가루 같았다고. 낮에는 사람이 죽게 덥고 밤에는 담요를 두 장 덮었다고. 숙소 지붕에 올라가면 별이 쏟아졌다고. 하윤은 지금까지 그 이야기를 네 번 들었다. 네 번 다 순서가 같았다. 모래, 더위, 담요, 별.

오늘은 담요 다음에 한 줄이 더 붙었다.

“밤에는 다들 잤다. 나는 안 잤다. 밤에 나가 서 있으면 아무도 안 봤다.”

하윤은 귤 껍질을 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아부지는 요즘 밤에 잘 자?”

“잘 잔다. 잘 자.”

“꿈은 안 꿔? 저번처럼 창문 꿈.”

회장이 귤을 씹었다. 오래 씹었다. 그리고 말했다.

“창문이 있었다. 귀신이 있었다. 귀신이 커튼을 쥐고 있었다.”

하윤은 웃었다. 유진의 웃음. 눈이 먼저 움직이는. “귀신이 커튼을 왜 쥐어?”

“무서워서 쥐지. 무서워서.”

거실 벽시계가 2시 반을 쳤다. 하윤은 일어나 부엌에서 보리차를 따라 왔다. 쟁반을 탁자에 놓고 자기 잔을 들었다. 오른손이었다. 잔이 입술에 닿기 전에 회장이 말했다.

“유진아, 너 오른손잡이였나?”

목소리는 늘어졌다. 눈은 풀려 있었다. 질문만 정확했다.

하윤은 잔을 왼손으로 옮겼다. 서두르지 않았다. “아부지 또 헷갈린다.”

“헷갈린다. 내가 요새 많이 헷갈린다.”

“괜찮아. 내가 안 헷갈리면 되지, 그치?”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임이 조금 길었다. 하윤은 보리차를 마셨다. 미지근했다. 잔을 쥔 왼손 손가락 끝이 차가웠다.

“아부지, 바람 쐴래? 국화 폈대.”

하윤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휠체어 손잡이를 잡았다. 테라스 유리문을 열고 경사로로 내려갔다. 디딤돌 사이 자갈 위에서 바퀴가 덜컹거렸다. 회장은 손잡이를 쥐지 않았다. 흔들리는 대로 흔들렸다.

담장 아래 화단 앞에서 하윤은 휠체어를 세웠다. 바퀴가 붉은 마사토 가장자리에 닿았다. 국화가 노랗게 피어 있었다. 일주일 사이에 봉오리가 다 열렸다. 하윤은 쪼그려 앉아 흙을 살폈다. 일주일 전 새벽, 회장이 손가락으로 덮고 한 번 눌렀던 자리. 흙이 평평했다. 누가 갈퀴로 고르게 긁어 놓은 것처럼. 꽁초는 없었다.

“꽃이 폈다.” 회장이 말했다. “국화는 늦게 핀다. 다른 꽃 다 지고 나서.”

“늦게 피면 오래 가?”

“오래 간다. 서리 올 때까지.”

하윤은 흙을 한 줌 쥐었다가 놓았다. 붉은 가루가 손바닥 주름에 끼었다. 그 손을 카디건에 닦지 않았다. 회장이 볼 수 있게 무릎 위에 펴 두었다. 회장의 눈은 하윤의 손 대신 국화에 가 있었다. 노인이 꽃을 보는 눈으로, 오래.

“들어가자. 춥다.” 회장이 말했다. 10월 초의 오후는 춥지 않았다.

3시. 회장이 피아노를 가리켰다. “엘리제. 엘리제 쳐 봐라.”

하윤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정숙이 아침에 열어 둔 뚜껑, 건반 위에 반듯하게 접힌 흰 융. 하윤은 융을 걷고 쳤다. 첫 마디, 둘째 마디. 사전 인터뷰에서 정숙이 들려준 녹음 속 유진은 이 곡을 조금 빠르게 쳤다. 서두르는 사람처럼. 하윤도 서둘렀다.

23마디. 왼손. 하윤은 일부러 한 음을 비껴 짚었다. 첫 주에 했던 대로, 정숙이 가르쳐 준 대로.

등 뒤에서 손뼉 소리가 났다. 정확히 그 음에서. 반 박자도 늦지 않았다. 첫 주에는 곡이 다 끝나고 나서 쳤던 손뼉이었다.

하윤은 끝까지 쳤다. 마지막 음이 사라질 때까지 페달을 밟고 있었다. 거실이 조용해졌다. 벽시계 초침 소리만 남았다.

정숙은 중요한 말을 하기 전에 피아노 뚜껑을 닫았다. 이 집에서 하윤이 몇 번 본 버릇이었다.

하윤은 흰 융을 건반 위에 다시 펼쳤다. 뚜껑을 닫았다. 소리 나지 않게, 끝까지 손으로 받쳐서. 그리고 피아노 의자에서 돌아앉았다.

“회장님.”

유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문장 끝을 올리지 않았다.

“새벽 2시에 담배는 끊으셔야 해요.”


회장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등을 폈다. 휠체어 등받이에서 척추가 하나씩 떨어져 나오는 것처럼. 어깨가 내려가고 목이 섰다. 그는 카디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았다. 직접. 손이 떨리지 않았다. 손수건을 반으로 접어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눈이 바뀌었다. 물이 빠지고 바닥이 드러났다.

“얼마 받나.”

목소리가 낮았다. 짧았다. 말끝에 경상도 억양이 남아 있었다. 리야드를 말하던 노인과 같은 목에서 나오는 소리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회당 80이요.”

“한 달 넷이면 320.” 회장이 말했다. 계산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던 숫자였다. “열 배 주마.”

“뭘 하면요.”

“유진이를 찾아라.”

하윤은 피아노 의자 모서리를 쥐었다. 예상한 대사가 아니었다. 입막음이 먼저 나올 차례였다. 돈을 줄 테니 조용히 하라고. 그런데 그는 자기 비밀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왜요.”

회장은 이유 대신 숫자를 말했다.

“3년 13일. 2023년 9월 20일에 나갔다. 오늘이 10월 3일이다.” 그는 무릎 담요의 주름을 손바닥으로 폈다. “5년이 차면 실종선고 청구가 된다. 1년 11개월 열이레 남았다. 그 전에 찾아라.”

“찾아서 뭐 하시게요.”

“그건 자네 일이 아이다.”

“제 일이 아니면 저한테 왜 시키세요? 사람 쓰시면 되잖아요. 흥신소든, 오 실장님이든.”

“흥신소는 돈 받고 찾은 사람을 돈 더 받고 판다.” 회장이 말했다. “오규식이가 찾으면 민혁이가 먼저 안다.”

“저도 돈 받는데요.”

“자네가 그 애 옷을 입고 있으니까.”

하윤은 자기 카디건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남색 카디건. 정숙이 보내온 유진의 옷. 왼쪽 소맷부리에 실밥 하나가 풀려 있었다. 유진이 뜯은 건지 하윤이 뜯은 건지 알 수 없었다.

“회장님.” 하윤이 말했다. 존댓말이 깍듯해졌다. “제가 지금 대문 밖에 나가서 전화 한 통만 하면 공판이 다시 열립니다. 아시죠. 2024년 6월에 정지된 거.”

“누구한테 할 건데.”

“검찰이든 기자든.”

“뭐라고.”

“성근건설 회장이 새벽에 정원에 서서 담배를 피운다고.”

“누가 봤나.”

“제가요.”

“자네가 누군데.” 회장이 말했다.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았다. “이 집에서 자네가 배우라는 거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의사 소견서에 그래 적혀 있다. 치매 노인 시중 들던 배우가 쫓겨나고 나서 회장이 밤에 걷더라 하면, 그거 누가 받아 적나.”

그가 맞았다. 하윤도 일주일 내내 그 셈을 했고, 매번 같은 답이 나왔다.

“사진이 있으면요.”

“있나.”

두 사람의 눈이 맞섰다. 3초.

“없다.” 회장이 말했다. “자네는 커튼을 쥐고 있었다. 사람 손은 두 개다.”

창밖에서 까치가 울었다. 하윤은 피아노 의자 모서리를 놓았다. 손바닥에 모서리 자국이 났다.


“그라믄 내 차례다.”

회장이 휠체어 팔걸이에 두 팔을 얹었다. 그는 하윤을 똑바로 봤다. 이 집에 와서 처음으로, 유진을 보는 눈이 아니라 하윤을 보는 눈이었다.

“자네, 서기철 씨 딸이지.”

거실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벽시계 초침도, 까치도. 하윤은 자기 숨소리를 들었다.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오규식이가 알아 왔다. 자네 처음 오고 열흘 걸렸다.” 회장이 말했다. 서류를 읽는 사람처럼. “대전. 1997년 3월생. 연극원 나왔고. 아버지는 자네 열 살 때 집을 나갔다. 어머니 김정임 씨는 대전에 혼자 산다.”

그리고 그가 날짜를 말했다.

“2023년 5월 12일. 평택. 4층 슬래브. 13시 무렵.”

하윤은 그 숫자들을 한 번도 소리 내어 말해 본 적이 없었다. 누가 한 줄로 이어 말하는 것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뉴스가 그 날짜를 말하기 전에 껐다. 기사는 제목에서 멈췄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숫자를 리야드 이야기처럼 순서대로, 한 번도 막히지 않고 말했다.

“그 이름.” 하윤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갈라진 자리를 다시 붙이지 못했다. “회장님 입으로 부르지 마세요.”

“서기철 씨.” 회장이 다시 말했다. 천천히. “박용수 씨. 응우옌 반 탄 씨.”

하윤은 나머지 두 이름을 처음 들었다. 기사를 끝까지 읽었다면 3년 전에 알았을 이름이었다. 세 이름이 같은 무게로, 같은 간격을 두고 거실에 놓였다. 회장은 그 이름들을 외운 문장처럼 말하지 않았다. 하윤은 외운 문장을 알아듣는 사람이었다. 이건 달랐다. 매일 부르는 사람의 소리였다.

“부르지 말라 하면 안 부른다.” 회장이 말했다. “그래도 나는 안다.”

“자네는 의뢰서에서 내 이름을 보고 들어왔다. 아버지 죽인 회사 회장 얼굴 보러 왔나. 아니면 다른 걸 보러 왔나.”


서기철. 하윤은 속으로 그 이름을 불렀다. 소리를 내지 않았는데도 혀가 굳었다.

아버지는 철근공이었다. 손바닥이 사포 같았다. 하윤이 일곱 살 때 아버지를 따라 현장에 갔다가 철근 더미에 이마를 긁혔다. 왼쪽 눈썹 위에 지금도 흉터가 있다. 정숙이 첫 주에 그걸 보고 컨실러로 가려 주었다. 유진에게는 없는 흉터라고.

하윤이 열 살 때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현관에 작업화 한 켤레를 두고. 그 뒤로 하윤은 아버지를 거의 보지 못했다. 소식은 엄마에게서 띄엄띄엄 들었다. 어디 현장에 있다더라, 어디서 다쳤다더라.

2023년 5월, 엄마가 전화했다. 평택이라고 했다. 하윤은 평택의 병원 장례식장까지 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맨 아래 칸에 섰다. 복도 끝에 아버지 이름이 걸린 빈소가 보였다. 들어가지 않았다. 떠나지도 못했다. 한 시간 가까이 발 하나 옮기지 못하고 서 있다가 계단을 올라갔다. 그 뒤로 기사를 끝까지 읽은 적이 없었다. 회사 이름만은 외웠다. 성근건설. 피해 다니려면 이름은 알아야 했다. 그 이상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9월 7일, 망원동 사무실에서 의뢰서를 넘기다 가족 관계 칸에 그 이름이 있었다. 남편, 차성근.

손가락이 멈췄다. 1초도 되지 않았다. 하윤은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리고 할게요, 라고 말했다.

왜 받았는지 하윤은 지금도 몰랐다. 아버지를 죽게 한 회사의 회장 얼굴을 보고, 마음 놓고 미워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철근을 묶던 그 현장의, 제일 끝에 있는 사람을 보고 싶었던 걸까. 그 끝에서 아버지가 보일까 봐. 아니면 그냥, 누군가의 딸이 한 번 되어 보고 싶었던 걸까. 자기 아버지 앞에서는 끝내 되지 못한.

첫날 이 노인이 유진아, 하고 울었을 때 하윤도 울었다. 그게 연기였는지 아니었는지 하윤은 아직도 몰랐다.


“모르겠어요.” 하윤이 말했다.

회장은 그 대답을 받았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모르겠다는 사람이 넉 주를 왔다.”

“회장님은요.” 하윤이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한 음씩 눌렀다. “첫 주에 아셨잖아요. 제 손목 잡고. 넌 우리 유진이가 아니구나. 그때 왜 안 내쫓으셨어요? 서기철 딸인 것까지 아시고 나서는요?”

회장의 얼굴이 창밖으로 돌아갔다. 정원 모퉁이, 화단 쪽이었다. 거실 창에서는 보이지 않는 방향이었다.

“자네 사장은 아나.” 그가 물었다. “자네가 누군지.”

“아무도 몰라요.”

회장이 하윤을 한 번 더 봤다. 무언가를 재는 눈이었다. 차례상 앞에서 민혁의 손을 볼 때의 눈. 그가 한 말은 한마디였다. “그래.”

“그라믄 셈은 됐다.” 회장이 말했다. “자네는 내 걸 쥐었고, 나는 자네 걸 쥐었다. 자네가 나가서 내 얘기를 하면, 나는 서기철 씨 딸이 신분 속이고 회장 집에 들어왔다고 할 거다. 민혁이가 좋아하겠지. 그 애는 그런 걸 잘 쓴다. 자네 어머니한테까지 사람이 갈 거다.”

“협박하시는 거예요?”

“장사하는 거다.” 회장이 말했다. “서로 쥐고 있으면 둘 다 못 놓는다. 그래야 거래가 된다. 현장에서 배웠다.”

하윤은 웃을 뻔했다. 이 사람은 하윤이 이 집에서 본 누구보다 정직했다. 거짓말을 하는 방식까지.

“열 배.” 회장이 다시 말했다. “생각해 봐라.”

“아버지 일은요.” 하윤이 말했다. “그것도 셈에 넣으세요?”

회장의 손이 무릎 담요 위에서 멈췄다.

이 사람의 손이 멈춘 건 처음이었다. 귤을 받을 때도, 담배를 화단에 꽂을 때도, 그 손은 멈추지 않았다. 다음 동작을 알고 있는 손이었다. 지금 그 손이 담요의 주름 하나를 쥔 채 서 있었다.

“그건 셈이 안 된다.” 회장이 말했다.

그는 사과하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도, 숙이는 고개도 없었다. 사과는 셈을 끝내는 말이었다. 이 사람은 그 셈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내가 빚진 게 있다.”

“무슨 빚이요.”

회장은 대답 대신 휠체어에 몸을 다시 묻었다. 척추가 하나씩 등받이에 닿았다. 어깨가 올라가고 목이 앞으로 꺾였다. 손이 무릎 위로 미끄러졌다. 눈에서 바닥이 사라지고 물이 차올랐다.

삐, 삐, 삐. 대문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정숙이 거실로 들어왔다. 코트를 벗지 않았다. 핸드백 손잡이를 아직 두 손으로 쥐고 있었다. 정숙의 눈가가 빨갰다. 검진을 받고 온 눈은 아니었다. 하윤은 그것도 접어 두었다.

“별일 없었어요?”

하윤이 대답하기 전에 회장이 말했다. 늘어진 목소리였다. 입가에 침이 고였다.

“어무이.”

정숙이 남편 옆에 쪼그려 앉았다. 손수건으로 그의 입가를 닦았다. 회장의 고개는 정숙을 비켜 피아노 쪽을 향해 있었다.

“어무이, 유진이가 피아노를 쳤다.”

“그래요?” 정숙이 하윤을 돌아봤다. “또 쳐 줄래요? 나도 듣게.”

하윤은 피아노 앞으로 갔다. 다리가 자기 다리 같지 않았다.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뚜껑에 손을 얹었다. 방금 자기가 닫은 뚜껑이었다. 열었다. 흰 융을 걷었다.

손을 건반 위에 올렸다. 손가락 끝이 떨렸다. 하윤은 떨림을 멈추려고 손등에 힘을 줬다. 멈추지 않았다.

첫 마디. 둘째 마디. 서두르지 않았다. 서두를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손바닥이, 4층 슬래브가, 13시 무렵이 건반 사이에 끼어 있었다. 하윤은 그 사이를 하나씩 짚으며 앞으로 갔다.

23마디. 왼손.

일부러 틀리려고 했다. 첫 주처럼, 아까처럼. 손가락이 어느 건반으로 가야 하는지 하윤은 정확히 알았다.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계획한 음이 아니었다. 그 옆, 그 옆의 옆. 아무도 정하지 않은 음이 거실에 울렸다.

일부러가 아니었다.

등 뒤에서 손뼉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