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 · 7장 사과
대행 · 도해

7장 사과

경기 성남시 분당구 판교, 2026년 9월 29일 화요일
약 12분

회의실 탁자 위에 사과문 초안이 세 부 놓여 있었다. A4 한 장, 글자 크기 12포인트. 첫 문장은 이랬다. ‘저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큰 상처를 드린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하윤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진심으로’라는 말이 들어간 사과문은 대개 진심이 아니었다. 진심인 사람은 진심이라고 쓸 틈이 없었다.

“가해자 가족으로서 피해자 댁을 두 번 방문해 주시면 됩니다.” 법무팀 석진우 과장이 말했다. 서른여덟, 회색 니트 조끼에 사원증. “첫 방문은 사과와 위로금 전달. 두 번째는 합의서 서명. 피해자분 따님이 고3이라 보호자 역할을 겸하고 있습니다. 따님만 설득하시면 됩니다.”

“가족분들이 직접 안 가시는 이유가 있어요?” 하윤이 물었다.

“어머님은 건강이 안 좋으시고, 상무님은 일정상 어렵습니다.” 석 과장이 바로 대답했다. 준비된 대답이었다. “그래서 누님 역할과 사촌 형 역할을 부탁드린 겁니다.”

정빈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그는 배준서의 사촌 형이었다. 차분한 회색 정장, 머리는 내렸다. 정빈은 남의 집 아들을 할 때 늘 머리를 내렸다.

회의실 문이 열렸다. 배인철 상무와 아들 배준서가 들어왔다.

인철은 쉰여섯. 키가 크지 않은데 어깨가 넓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하윤과 정빈에게 악수를 청했다. 오른손이었다. 악수는 세지 않았다. 앉자마자 탁자 위 커피잔을 들었다. 왼손이었다. 왼손 약지에 굵은 은반지가 있었다. 반지 윗면에 방패 모양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대학 동문 반지였다. 결혼식 하객석에 가면 늘 몇 개씩 있었다. 동창회장의 손, 축사하는 은사의 손.

준서는 스물일곱. 아버지보다 한 뼘 컸다. 깨끗한 흰 셔츠, 반지도 시계도 없었다. 그는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사건 경위는 서류에 있습니다.” 석 과장이 서류를 넘겼다.

9월 19일 토요일 밤 11시 40분. 판교의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 준서는 아버지와 함께 저녁 모임에 갔다가 대리기사를 불렀다. 차는 아버지 명의의 SUV. 주차장에 도착해 요금 문제로 언성이 높아졌다. 준서가 기사를 때렸다. 기사 김형만은 넘어지며 기둥에 머리를 부딪혔다. 우측 광대뼈 골절, 뇌진탕, 전치 6주. 블랙박스는 그 주 초부터 고장 나 있었다. 준서는 다음 날 경찰서에 스스로 출석했다.

“준서 씨.” 석 과장이 말했다. “피해자 측에 하실 말씀, 한 번 해 보시죠.”

준서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인철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왼손을 아들의 어깨에 얹었다. 가볍게. 반지가 흰 셔츠 위에서 빛났다.

“제가 술에 취해 순간 화를 참지 못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준서가 또박또박 말했다. 석 과장이 메모를 하더니 다시 한 번 해 보라고 했다. 인철의 손이 아들의 어깨를 한 번 눌렀다. 준서가 다시 말했다. 같은 문장, 같은 쉼, 같은 높이.

석 과장이 사과문 확인란에 서명을 받았다. 준서가 펜을 들었다. 오른손이었다.

배인철. 56. 악수 오른손, 커피잔 왼손. 왼손 약지 굵은 은반지(동문 문장). 배준서. 27. 반지 없음. 서명 오른손. “제가 술에 취해 순간 화를 참지 못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두 번. 아버지 손이 어깨에 올라올 때마다.

하윤은 회의실을 나오며 노트를 덮었다. 정빈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누나, 아들 연기 엄청 못하더라. 내가 대신 해 줄까 봐.”

“그러게.”

엘리베이터 문에 하윤의 얼굴이 비쳤다. 배준서의 누나. 사전 인터뷰에서 받은 이름은 배준희였다. 서른, 디자이너. 하윤은 준희의 날씨를 아직 정하지 못했다.


9월 30일 수요일, 성남시 수정구

김형만의 집은 언덕 위 다세대주택 반지하였다. 계단을 다섯 개 내려가면 철문이 있었다. 문 옆 창문에 방범창이 붙어 있었고, 창틀에 고무장갑 한 켤레가 말라 있었다.

정빈이 과일 바구니를 들었다. 하윤은 흰 봉투를 들었다. 위로금 500만 원. 봉투는 법무팀이 준비했다. 봉투 앞면에 붓펜으로 ‘위로’라고 쓰여 있었다. 그 글씨도 법무팀이 썼다.

철문을 두드렸다. 한참 뒤에 문이 열렸다.

김다솜은 교복 바지에 회색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열여덟. 눈이 컸고 입술이 텄다. 방 안이 보였다. 바닥에 수능 문제집이 펼쳐져 있었다. 형광펜 뚜껑이 열린 채였다.

“배준서 씨 누나 되는 사람이에요.” 하윤이 말했다. 준희의 목소리였다. 낮고 조심스러운. “동생 일로 사과드리러 왔어요.”

다솜의 눈이 하윤에게서 정빈으로, 과일 바구니로 옮겨 갔다가 다시 하윤에게 돌아왔다. 문을 닫지 않았다. 들어오라고도 하지 않았다.

“누나는 진짜 누나예요?”

하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질문이 이상해서가 아니었다. 그 질문은 늘 받는 질문이었다. 결혼식장에서, 장례식장에서, 대답은 늘 준비되어 있었다. 그럼요. 아니면, 무슨 말이에요. 아니면 웃으면 됐다. 하윤은 그 셋 중 아무것도 꺼내지 못했다. 다솜이 묻는 방식 때문이었다. 화가 나서 묻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궁금해서 묻고 있었다.

“저희 집에 지난주에 아저씨 둘이 왔어요. 회사 사람이요.” 다솜이 말했다. “그 사람들은 진짜 회사 사람이었어요. 명함이 있었어요. 근데 이번엔 가족이 온다고 해서요. 진짜 가족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정빈이 끼어들었다. 사촌 형의 목소리였다. “다솜 학생, 저희가 진심으로…….”

“진심이면 그 사람이 직접 와야죠.” 다솜은 정빈에게는 눈도 주지 않고 하윤에게만 말했다. “돈은 안 받아요. 근데 들어오세요. 할 말이 있어요.”


다솜이 원한 건 돈이 아니었다. 다솜은 그걸 세 번 말했다. 세 번 다 말이 달랐다. 처음엔 “돈 필요 없어요”, 두 번째는 “돈 받으면 끝나는 거잖아요”, 세 번째는 “아빠가 거짓말쟁이가 되는 게 싫어요.”

하윤은 세 번째 말에서 노트를 꺼냈다.

김형만은 경찰 조사에서 진술이 오락가락했다. 머리를 다쳐서였다. 처음엔 기억이 안 난다고 했고, 두 번째엔 젊은 남자가 때렸다고 했다가, 세 번째엔 나이 든 남자라고 했다. 경찰은 첫 진술과 가해자의 자백을 맞췄다. 사건은 정리되고 있었다. 이제 합의서만 있으면 됐다.

“아빠가 계속 말해요. 젊은 놈이 아니었다고. 근데 아무도 안 믿어요. 머리 다쳤다고.”

“아버님 지금 어디 계세요?”

“병원이요. 시장 옆 종합병원.” 다솜이 고개를 들었다. “직접 들으실래요? 회사 사람들은 안 갔어요.”

정빈이 하윤의 팔꿈치를 건드렸다. 사과 대행은 피해자 집 거실에서 끝난다. 병실은 계약에 없었다. 하윤은 일어났다.

“정빈 씨는 먼저 들어가요.”

“누나.”

“사촌 형은 바쁘다고 해.”


병실은 6인실이었다. 창가 침대에 김형만이 누워 있었다. 쉰둘. 머리에 붕대를 감았고 오른쪽 얼굴이 검붉게 부어 있었다. 눈이 반쯤 감겼다. 침대 옆 탁자에 진단서 사본이 있었다. 우측 관골 골절. 우측 안와 주위 타박.

다솜이 아빠를 깨웠다. 형만의 눈이 하윤에게 오래 머물렀다. 누구냐고 묻지는 않았다. 다솜이 “회사에서 온 사람”이라고만 말했다.

“아버님. 그날 일 기억나세요?”

”……젊은 놈 아니었어.” 형만이 말했다. 혀가 조금 꼬였다. “젊은 놈은 뒤에 있었어. 차 옆에. 아버지, 아버지, 그랬어. 말리지도 않고.”

“때린 사람은요?”

형만이 눈을 감았다. 오래. 하윤은 그가 잠든 줄 알았다. 그러다 그가 왼손을 들었다. 링거 줄이 흔들렸다. 그는 자기 왼손 약지를 엄지로 문질렀다.

“반지. 은색. 굵은 거. 이쪽 손.” 형만이 말했다. “그게 여기 맞았어. 쇠 맛이 났어.”

그는 왼손을 내리고 오른손으로 부은 오른쪽 광대를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잠깐 뒤에 그가 다솜에게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냐고. 다솜이 30일이라고 했다. 형만은 “19일이지” 하고 말했다. 다솜이 아빠의 손을 이불 안에 넣어 주었다.

병실 복도 의자에서 다솜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자동차 회사 홈페이지였다.

“그 차 모델이요. 아빠가 차종 기억했어요. 검은색 그거. 이 모델은 커넥티드 서비스라는 게 있대요. 충격 감지되면 블랙박스 영상을 회사 서버에 자동으로 올린대요. 차 주인 계정으로.”

“블랙박스는 고장이라고 했잖아.”

“차 안에 있는 건 고장일 수도 있죠.” 다솜이 말했다. “서버에 올라간 건요?”

다솜의 손에 들린 휴대폰 화면 아래에 ‘비밀번호 찾기’ 버튼이 있었다. 다솜은 그 버튼을 여러 번 눌러 본 사람처럼 엄지를 그 근처에 두고 있었다.

김형만. 52. 우측 광대 골절. 정면에서 오른쪽 얼굴 = 왼손 가격. “반지. 은색. 굵은 거. 이쪽 손.” 왼손 약지를 문지름. “젊은 놈은 뒤에 있었어. 아버지, 아버지.” 차량 클라우드 자동 백업. 차 주인 계정.


10월 1일 목요일, 판교

두 번째 방문 전 ‘가족 브리핑’이 다시 잡혔다. 같은 회의실, 같은 사과문. 석 과장은 하윤의 보고를 듣고 펜을 내려놓았다.

“따님이 돈을 안 받는다고요.”

“네.”

“금액이 문제면 조정 가능합니다.”

“금액이 문제가 아니에요.”

인철이 들어왔다. 오늘은 준서가 먼저 와 있었다. 인철은 아들 옆에 앉아 커피잔을 들었다. 왼손. 은반지가 잔 손잡이에 부딪혀 작게 소리를 냈다. 탁, 하고. 하윤은 그 소리를 들었다. 반지가 쇠 맛이 났다던 형만의 목소리가 그 위에 겹쳤다.

석 과장이 준서에게 따님 앞에서 할 말을 다시 연습시켰다. 준서가 머뭇거렸다. 인철의 왼손이 아들의 어깨로 갔다. 반지가 흰 셔츠 위에 놓였다.

“제가 술에 취해 순간 화를 참지 못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세 번째였다. 같은 문장, 같은 쉼, 같은 높이.

하윤은 이 문장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았다. 박정훈이 15년 동안 자기에게 들려준 문장처럼, 이건 준서가 만든 문장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써 준 대본이었다. 아버지의 손이 어깨에 올라와야 시작되는 대사.

인철은 오른손으로 악수하고 왼손으로 잔을 든다. 왼손에 굵은 은반지. 준서는 오른손으로 서명하고 반지가 없다. 형만의 오른쪽 얼굴을 친 손은 왼손이었다. 형만은 쇠 맛을 기억했다. 그리고 젊은 남자는 뒤에 서서 아버지를 불렀다. 회사는 블랙박스가 고장 났다고 했다. 피해자 집에는 진짜 가족 대신 배우를 보냈다. 상무님은 일정상 어려웠다. 형만이 그 얼굴을 보면 안 되니까.

“석 과장님.” 하윤이 말했다. “두 번째 방문은 못 하겠어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정빈이 하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합의서는 못 받아요. 대행료는 첫 방문까지만 청구할게요.”

인철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하윤을 처음으로 똑바로 봤다. 회사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거래처를 보는 눈이었다.

“이유를 들어도 되겠습니까.”

“따님이 진짜 누나냐고 물었어요.” 하윤이 말했다. “대답을 못 했어요. 대답 못 하는 배우는 쓰시면 안 돼요.”


엘리베이터에는 준서가 먼저 타 있었다. 하윤이 탔다. 문이 닫혔다. 정빈은 회의실에서 석 과장에게 붙잡혀 있었다.

19층에서 1층까지. 두 사람 다 숫자판에 눈을 두었다.

“준서 씨, 오른손잡이죠.”

준서가 숨을 들이쉬었다. 14층. 13층.

“아버지 반지, 왼손에 끼시더라고요.”

10층. 준서의 손이 바지 옆선을 쥐었다 폈다.

“아버지가 감옥 가면 회사가 망해요.” 준서가 말했다. 숫자판을 본 채였다. 외운 문장이 아니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버지가 그 회사 영업 다 쥐고 있어요. 상무 달고 3년. 지금 대표 자리 얘기 나오는데. 저는 초범이고, 술 먹고 한 거고, 합의하면 벌금이면 끝나요. 변호사가 그랬어요.”

“그건 누가 계산한 거예요?”

준서의 고개가 하윤 쪽으로 돌아갔다. 입이 열렸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7층. 6층. 그의 눈이 다시 숫자판으로 올라갔다.

1층. 문이 열렸다. 준서가 먼저 내렸다. 로비를 가로질러 가는 그의 뒷모습은 아버지보다 한 뼘 컸고, 아버지처럼 어깨가 넓지 않았다.

하윤은 로비 의자에 앉아 다솜에게 전화했다.

“다솜아. 비밀번호 찾기 누르지 마.”

“네?”

“그 계정은 네 게 아니야. 네가 들어가면 그 영상은 증거가 안 돼. 오히려 네가 곤란해져.” 하윤은 천천히 말했다. 다솜이 받아 적을 수 있게. “경찰한테 가서 이렇게 말해. 아빠 진술 다시 해 달라고. 그리고 그 차 제조사 서버에 그날 영상이 남아 있을 수 있으니까, 지워지기 전에 보존 요청해 달라고. 차량 번호, 날짜, 시간, 주차장 위치. 그거 네 개 적어 가.”

전화기 너머에서 볼펜 소리가 났다. 수능 문제집 위에 적는 소리 같았다.

“언니.” 다솜이 말했다. 누나가 아니었다. “언니는 누구예요?”

“그냥 회사에서 온 사람.”

“거짓말.”

하윤은 웃었다. 전화를 끊었다.


망원동 사무실에 돌아오니 도석이 유리문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석 과장이 이미 전화를 한 뒤였다. 문숙자가 장부에서 고개를 들지 않고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가 접었다.

“들어와.”

하윤이 들어갔다. 도석은 의자를 권하지 않았다. 라이터를 손에 쥐고 있었다. 켜지 않았다.

“의뢰인이 누구냐.”

“법무팀이요.”

“그 돈 누가 내냐.”

“회사요.”

“근데 넌 누구 일을 했냐.”

하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3짜리한테 수사 요령 가르쳐 주라고 내가 너 보냈냐? 네가 경찰이냐? 경찰도 아닌 게 남의 사건에 손을 넣으면, 그다음은 누가 책임지냐.” 도석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유리문 밖에서 정빈이 의상실 행거 뒤로 숨는 게 보였다. “회사에서 너 고소하면? 업무방해, 명예훼손. 너 그거 감당하냐? 대행료는 또 날아갔고. 한 달 새 두 번째다.”

“제가 깔게요.”

“네가 깐다고 끝나냐, 이게.”

도석이 라이터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소리가 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다음에 나올 말을 하윤은 알았다. 하루에 한 번은 듣는 말. 역할 밖으로.

도석은 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천장으로 고개를 젖혔다. 한참 그러고 있다가 휴대폰을 집어 연락처를 내렸다. 화면은 하윤 쪽에서 보이지 않았다. 신호가 가는 동안 그는 하윤 쪽을 보지 않았다.

“어, 나다. 강도석. ……어, 잘 지낸다. 분당서 형사과에 너네 기수 있지. 판교 대리기사 폭행 건, 9월 19일. 자백한 놈 있는 거. 피해자 쪽에서 진술 다시 하겠다고 갈 거다. 차량 제조사 서버 보존 요청 같이 넣을 거고. 그거 그냥 넘기지 말라고 한마디만 해 줘라. ……아니, 내 일 아니다. 그냥 해 줘.”

그는 전화를 끊었다. 하윤을 보지 않고 말했다.

“나가 봐.”

“사장님.”

“밥은 먹었냐.”

“아뇨.”

“정빈이 데리고 가서 먹어. 내 카드.”

도석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책상 끝에 놓았다. 하윤이 카드를 집었다. 도석은 이미 창밖을 보고 있었다.


밤 10시. 사무실에 하윤 혼자 남았다. 정빈은 순댓국을 두 그릇 먹고 퇴근했다. 문숙자는 장부를 금고에 넣고 불을 반만 끄고 갔다.

하윤은 문숙자의 컴퓨터로 검색을 했다. 범인도피죄. 형법 제151조. 벌금 이상의 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자를 은닉 또는 도피하게 한 자. 그 아래 둘째 항이 있었다.

친족 또는 동거의 가족이 본인을 위하여 전항의 죄를 범한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

하윤의 손이 마우스 위에서 멈췄다.

친족 특례. 아들이 아버지를 숨겨 주면 법은 아들을 벌하지 않는다. 가족이 가족을 위해 한 일이니까. 법이 그걸 안다. 사람은 가족 대신 거짓말을 한다는 걸. 준서는 그 줄을 알았을까. 아마 몰랐을 것이다. 계산은 아버지가 했으니까.

아버지 대신 아들이. 하윤은 노트를 펼치고 그 문장을 뒤집어 적었다.

아들 대신 아버지가. 반대는?

물음표 위에서 볼펜이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노트를 몇 장 앞으로 넘겼다. 9월 27일 새벽, 줄을 벗어난 글씨. 하윤은 그 문장을 새 장에 다시 옮겨 적었다. 이번엔 줄 안에, 또박또박.

“민혁이한테는 말하지 마라. 내가 알아서 한다.”

검색창에 손이 먼저 갔다. 성근건설 회장 공판. 엔터를 누르기 전에 하윤은 잠깐 멈췄다. 그리고 눌렀다.

맨 위에 2024년 6월 기사가 있었다. ‘법원, 성근건설 회장 공판절차 정지… “알츠하이머로 변별 능력 없어”’. 그 아래 요약 두 줄. 평택 물류센터 붕괴. 사망 3명.

하윤은 기사를 열지 않았다. 사망자 이름이 나오기 전에 창을 닫았다. 컴퓨터를 껐다. 모니터가 꺼진 검은 화면에 자기 얼굴이 비쳤다. 불을 반만 끈 사무실, 화이트보드, 행거에 걸린 상복들.

공판절차 정지. 말을 못 하는 사람이 되면 법정에 서지 않아도 된다. 하윤은 노트의 두 줄을 번갈아 봤다. 아들 대신 아버지가. 민혁이한테는 말하지 마라.

그 두 줄 사이에 무엇이 들어가야 하는지, 하윤은 아직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