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 · 6장 흙
대행 · 도해

6장 흙

서울 성북구 성북동, 2026년 9월 25일 금요일 (추석)
약 12분

차례상은 거실 피아노 앞에 차려졌다. 정숙이 피아노 뚜껑을 닫고 그 위에 흰 천을 덮었다. 피아노가 병풍 뒤로 반쯤 숨었다.

하윤은 새벽 6시에 성북동 대문을 눌렀다. 안양에서 돌아와 세 시간을 잤다. 정숙은 이미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부엌에는 마영순이 데친 나물을 무치고 있었고, 가스레인지 위에서 탕국이 끓었다. 하윤은 남색 카디건 소매를 걷었다.

“제가 뭘 하면 돼요?”

“밤 쳐 줄래요?” 정숙이 칼과 밤 한 바가지를 내밀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 애는 밤을 못 쳤어요. 손을 자주 베었어요.”

하윤은 칼을 왼손으로 바꿔 쥐었다. 일부러 서툴게 깎을 필요는 없었다. 왼손 칼질은 정말로 서툴렀고, 그래서 더 유진다웠다.

8시 반에 민혁의 가족이 왔다.

윤서영은 마흔하나. 연한 베이지 원피스에 앞치마를 챙겨 왔다. 손에 든 종이 가방에서 전 세 가지가 나왔다. 동그랑땡, 동태전, 꼬치전. 백화점 지하 반찬 가게의 포장이었다. 서영은 그 포장을 벗겨 정숙의 접시에 옮겨 담았다. 포장 비닐을 접어서 자기 가방에 다시 넣었다.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서영은 하윤을 아가씨라고 불렀다. 시누이를 부르는 말이었다. 억양이 정확했고 한 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하윤에게는 그 정확함이 차가웠다. 연습한 사람의 호칭이었다.

“언니도요.”

“아가씨 좋아하던 식혜, 어머님이 담그셨대요.” 서영이 냉장고를 열며 웃었다. “아, 아가씨는 식혜 안 좋아했나? 제가 헷갈리네요.”

하윤은 사전 인터뷰를 떠올렸다. 유진은 식혜를 좋아했다. 서영도 알 것이다. 하윤은 웃었다.

“좋아해요. 언니가 맞게 기억하셨어요.”

“다행이다.”

서영은 동그랑땡을 하나씩 집어 접시에 줄을 맞췄고, 하윤은 밤을 깎았다. 둘 다 웃고 있었다. 부엌 창으로 아침 햇빛이 들어왔다. 탕국 간을 보던 정숙이 두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말없이 국자를 내려놓았다.

거실에서 아이들 소리가 났다. 서아가 부엌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홉 살, 양 갈래로 묶은 머리.

“고모! 고모 언제 왔어?”

서아는 하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하윤은 칼을 든 왼손을 높이 들었다. 오른손으로 서아의 머리를 쓸었다. 고모. 처음 듣는 호칭이었다. 하윤은 고모가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도현은 부엌 문간에 서 있었다. 열두 살. 아빠를 닮은 얇은 입술. 그는 동생이 하윤에게 매달린 걸 보고 말했다.

“서아야. 그 사람 고모 아니야.”

부엌이 조용해졌다. 탕국 끓는 소리만 남았다.

“고모 맞아.” 서아가 말했다.

“아니야. 엄마가 그랬어. 할아버지 때문에 오는 배우라고.”

“도현아.” 서영의 목소리는 높아지지 않았다. “할아버지한테 인사드리고 와.”

도현은 가지 않았다. 어른들이 시선을 피하는 동안 아이만 하윤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하윤은 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유진의 말버릇으로, 문장 끝을 올려서 말했다.

“도현이 많이 컸네. 고모가 모르는 사이에, 그치?”

도현은 대답하지 않고 돌아섰다. 서아가 하윤의 허리를 더 세게 안았다.


서재는 거실 끝 복도 안쪽에 있었다. 회장 침실 바로 옆이었다. 하윤은 이 집에 세 번째 왔지만 그 문이 열린 걸 본 적이 없었다. 짙은 호두나무 문에 놋쇠 손잡이. 손잡이 아래 열쇠 구멍이 반들반들했다.

차례 준비가 끝날 즈음, 하윤은 화장실에 가다가 복도에서 걸음을 늦췄다. 서재 문 앞에 민혁과 오규식이 서 있었다.

민혁은 마흔넷. 짙은 남색 양복에 넥타이는 매지 않았다. 오규식은 명절에도 정장이었다. 두 사람은 문을 등지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하윤에게 들린 건 두 마디였다. “열쇠는 어머니가.” 그리고 “11월 전에는.”

하윤이 복도 모퉁이를 돌자 두 사람이 말을 멈췄다. 동시에.

“서하윤 씨.” 오규식이 먼저 웃었다. “명절에도 출근하시네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유진이에요. 오늘은.”

“아, 그렇죠. 제가 실례했습니다, 유진 씨.”

오규식은 유진 씨라는 말을 한 자씩 늘여 발음했다. 민혁은 하윤을 위아래로 훑지도 않고 손목시계로 눈을 내렸다.

“추석 특근이네요.” 민혁이 말했다. “할증 붙습니까? 어머니가 얼마를 더 얹어 주셨는지 궁금해서요.”

“어머니께 여쭤보세요.”

“그럴게요.” 민혁이 웃었다. 입만 웃었다. “차례 시작하죠. 아버지 기다리십니다.”

두 사람이 거실로 가고 하윤은 서재 문 앞에 혼자 남았다. 손잡이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몸을 낮춰 문 아래 틈을 살폈다. 빛이 새지 않았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방 앞에서 왜 목소리를 낮췄을까.

서재. 잠김. 민혁 + 오규식, 문 앞에서 말 멈춤. “열쇠는 어머니가.” “11월 전에는.” 서영: 나를 ‘아가씨’라 부름. 한 번도 안 틀림. 틀리지 않는 사람은 연습한 사람.


회장은 휠체어에 앉아 차례상 앞에 있었다. 회색 한복 위에 무릎 담요. 마영순이 그의 옷깃을 바로잡았다. 회장은 상 위의 대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모래, 모래” 하고 중얼거렸다. 리야드의 모래였다. 대추 색이 모래 색이라고.

차례는 민혁이 주관했다. 지방을 붙이고, 향을 피우고, 술잔을 올리는 순서. 민혁은 한 번도 망설이지 않았다. 하윤은 여자들 줄 맨 끝, 서아 옆에 섰다.

첫 잔은 맏이가 올린다. 이 집의 맏이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민혁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제가 올리겠습니다.”

회장의 대답은 그대로였다. 모래, 모래. 민혁이 잔을 받았다. 오규식이 술을 따랐다. 민혁이 두 손으로 잔을 들어 향 위로 세 번 돌렸다. 잔을 받친 오른손 손등에 힘줄이 섰다. 그는 잔을 상에 올리고 물러나 절했다.

그 순간 하윤은 회장을 봤다.

회장은 민혁의 손을 보고 있었다. 잔을 내려놓고 상에서 떨어지는 그 손. 회장의 눈이 거기 머물렀다. 1초가 될까 말까. 그 눈은 멍하지 않았다. 초점이 있었다. 무언가를 재는 눈. 공사장에서 철근 간격을 재는 사람이 그런 눈을 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회장은 다시 대추를 가리켰다. “모래. 밀가루 같았다.”

하윤은 절을 했다. 이마를 손등에 대고 셋을 셌다. 일어났을 때 회장의 눈은 다시 물처럼 풀려 있었다.


차례가 끝나고 아이들이 거실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켰다. 명절 특집 사이로 뉴스가 나왔다. 앵커가 중대재해 재판이 몇 년째 길어지고 있다는 리포트를 소개했다. 화면에 가림막을 친 공사장이 비쳤다.

하윤은 소파 팔걸이에 놓인 리모컨을 집었다. 채널을 돌렸다. 씨름이 나왔다.

“왜 돌려요?” 도현이 말했다.

“씨름 하잖아.” 하윤이 말했다. “도현이 씨름 좋아하지 않아?”

“안 좋아해요.”

“그럼 고모가 좋아하는 걸로 해.”

도현은 하윤을 한 번 쳐다보더니 소파 반대쪽 끝으로 몸을 옮겼다. 하윤은 리모컨을 쥔 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모래판 위에서 두 남자가 샅바를 잡고 버티다 한 사람이 넘어갔다. 누가 넘어갔는지 하윤은 기억하지 못했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엄마였다.

추석인데 전화도 없니. 일하니?

하윤은 은행 앱을 열었다. 매달 보내는 50만 원에 30만 원을 더 얹어 보냈다. 그리고 답장했다. ‘일해요. 다음에 갈게.’ 엄마는 다음이 언제냐고 묻지 않았다. 7년째 묻지 않았다.

오후 4시에 민혁의 가족이 떠났다. 서아가 현관에서 하윤에게 손을 흔들었다. “고모, 다음 주에도 와?” 하윤은 대답 대신 손을 흔들었다. 도현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정숙은 현관문을 닫고 한참 문에 손을 대고 서 있었다. 그리고 하윤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오늘 이틀 자고 가 줘서.”

“일인데요.”

“알아요.” 정숙이 말했다. “그래도요.”


9월 26일 토요일, 성북동

아침 7시. 마영순이 회장의 휠체어를 현관 앞 경사로로 밀고 나왔다. 아침 산책 전에 바퀴에 바람을 넣는 날이었다. 하윤은 마당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던 참이었다.

바퀴 홈에 흙이 끼어 있었다.

붉은 흙이었다. 굵은 모래 알갱이가 섞인 흙. 하윤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정원을 훑었다. 정원 대부분은 잔디였다. 디딤돌 사이는 회색 자갈. 붉은 흙은 한 군데뿐이었다. 담장 아래 새로 만든 화단. 지난주에 정원사가 와서 마사토를 새로 깔고 국화 모종을 심었다고 정숙이 말했다. 화단은 거실 창에서도, 회장 침실 창에서도 보이지 않는 모퉁이에 있었다.

“여사님, 바퀴에 흙이 묻었어요.”

마영순이 허리를 숙이고 손톱으로 흙을 조금 긁어냈다. 예순하나. 충남 서천 억양이 말끝에 남아 있었다.

“어제 차례 때 손님들이 많이 드나들어서 그런가 봐유.”

“어제 정원에 나가셨어요? 회장님이요.”

“아니요.” 마영순이 말했다. 망설이지 않았다. “회장님은 밤에 주무셔유. 제가 복도 끝 방에서 다 들어유. 한 번 깨시면 제가 알아유.”

마영순은 바퀴를 물티슈로 닦았다. 꼼꼼하게, 홈 안쪽까지. 닦는 손이 빨랐다. 처음 닦아 보는 손이 아니었다.

9.26 아침. 휠체어 바퀴 홈에 붉은 마사토. 정원에서 그 흙은 담장 밑 새 화단뿐. 마영순: “밤에 주무세요.” 망설임 없음. 물티슈로 닦음. 익숙한 손.

오후에 하윤은 회장의 휠체어를 밀고 정원을 한 바퀴 돌았다. 화단 앞을 지날 때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국화 모종 사이 마사토에 작은 구멍 하나가 있었다.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크기였다. 누가 뭔가를 꽂았다가 뺀 자리, 또는 묻은 자리.

회장은 화단 앞을 지나는 동안 고개를 젖히고 있었다. “유진아, 리야드는 별이 많았다. 많았어.”

“서울은 별이 없네, 그치?”

“없다. 없어.”

저녁 식탁에서 정숙이 지나가듯 말했다. 회장이 젊었을 땐 하루에 담배 두 갑을 피웠다고. 유진이 태어나던 해에 끊었고, 진단을 받은 뒤로는 의사가 절대 안 된다고 해서 집 안에 라이터 하나 두지 않는다고.

“그 애가 냄새를 싫어했어요.” 정숙이 말했다. “아빠한테서 공사장 냄새가 난다고.”

회장은 숟가락으로 국을 떠서 흘렸다. 마영순이 턱을 닦아 주었다.


그날 밤 하윤은 자지 않았다.

유진의 방은 2층 계단 끝 오른쪽이었다. 창이 정원 쪽으로 나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 사진들이 있었다. 하윤은 그 사진들을 보지 않으려고 불을 껐다. 창가 의자에 앉아 커튼을 손가락 하나만큼 열었다.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담장 아래 화단까지.

12시. 1시. 집이 조용해졌다. 1층에서 마영순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2층 정숙의 방에서도 문틈의 불이 꺼졌다. 하윤은 휴대폰 화면을 엎어 두고 숫자를 셌다. 배역에 들어가기 전 대기실에서 하던 버릇이었다. 백까지 세고 다시 하나부터.

새벽 2시 조금 넘어, 1층 테라스 쪽 유리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휠체어가 먼저 나왔다. 아무도 앉지 않은 휠체어였다. 그 뒤로 회장이 나왔다.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밀면서. 걸음이 느리지 않았다. 디딤돌을 하나씩 건너뛰지 않고 밟았다. 그는 휠체어를 화단 옆에 세웠다. 바퀴가 마사토를 밟았다.

그리고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회장은 서 있었다. 꼿꼿하게. 하윤이 이 집에서 본 어느 모습보다 키가 컸다. 담장 너머 가로등 불빛이 그의 어깨에 걸렸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불꽃이 일었다. 담뱃불이었다.

연기가 화단 위로 흩어졌다.

하윤은 숨을 쉬지 않았다. 손가락이 커튼 가장자리를 쥐고 있었다. 놓으면 커튼이 흔들린다.

회장이 다른 쪽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 불빛이 그의 턱을 밑에서 비췄다. 그는 번호를 누르지 않았다. 걸려 온 전화였다. 진동이 울리기 전에 받은 것처럼 빨랐다. 그는 휴대폰을 귀에 대고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그런데 분명했다. 리야드 이야기를 할 때의 늘어지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말끝이 짧게 끊겼다. 경상도 억양이 남아 있었다. 한밤의 정원은 소리를 멀리 보냈다. 말이 다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두 문장은 들렸다.

“민혁이한테는 말하지 마라. 내가 알아서 한다.”

잠깐 침묵. 회장이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불끝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

“12일은 그대로 보내라.”

그는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담배를 마저 피웠다. 서두르지 않았다. 하윤은 그 담배가 다 탈 때까지 커튼을 쥐고 있었다. 2분쯤이었을 것이다. 한 시간 같았다.

그리고 회장이 고개를 들었다.

화단에서 2층 유진의 방 창문까지. 하윤은 커튼을 놓지 못했다. 놓으면 움직임이 보일 것이다. 놓지 않으면 손가락 하나만큼 열린 틈이 보일 것이다. 방에는 불이 없었다. 하지만 가로등 불빛은 창유리에도 닿았다.

눈이 마주쳤다. 하윤은 그렇게 느꼈다. 회장의 얼굴이 정확히 이쪽을 향해 멈춰 있었다. 3초. 4초.

회장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허리를 굽혀, 다 핀 담배꽁초를 화단 마사토에 꽂았다. 손가락으로 흙을 덮었다. 한 번 눌렀다. 그리고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테라스 유리문 쪽으로 밀고 갔다. 유리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하윤은 그제야 커튼을 놓았다. 손가락이 굳어서 펴지지 않았다. 창가 의자에 앉은 채 손을 무릎 사이에 끼웠다.

낮에 화단에서 본 손가락 크기의 구멍. 바퀴 홈의 붉은 흙. 물티슈로 홈 안쪽까지 닦던 마영순의 익숙한 손. 정숙이 집 안에 라이터 하나 두지 않는다던 말.

휴대폰을 뒤집었다. 2시 19분. 하윤은 노트를 펼치고 어둠 속에서 적었다. 글씨가 줄을 벗어났다.

9.27 02:0x. 정원. 회장, 휠체어 없이 섬. 담배. 전화. “민혁이한테는 말하지 마라. 내가 알아서 한다.” “12일은 그대로 보내라.” 꽁초 → 화단에 묻음. 올려다봄. 3초 이상.

12일. 하윤은 그 숫자 아래에 볼펜을 대고 오래 있었다. 첫 주말, 회장이 점심상을 밀어낸 날이 12일이었다. 담요 밑에서 진동이 울린 날도.


9월 27일 일요일, 성북동

아침 식탁에 회장이 휠체어로 왔다. 마영순이 밀었다. 바퀴는 깨끗했다.

회장은 턱받이를 하고 있었다. 입가로 침이 흘렀다. 마영순이 수건으로 닦았다. 그는 숟가락을 쥐었다 놓았다 했다. 정숙은 맞은편에서 조용히 죽을 저었다.

하윤은 귤 하나를 집었다. 왼손으로. 꼭지에서 시작해 껍질이 끊기지 않게, 한 줄로 돌려 깠다. 껍질이 식탁 위로 길게 내려왔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떨리지 않게 하는 데 온몸을 썼다.

“아부지, 귤.”

회장이 귤을 받았다.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오래 씹었다. 그러다 눈을 들어 하윤에게 맞췄다. 물처럼 풀린 눈이었다. 어젯밤 화단에서 고개를 들던 얼굴과 근육 하나 다르지 않았다. 다른 건 눈 뒤에 켜져 있던 불 하나뿐이었다.

“유진아.”

“응, 아부지.”

“꿈에 네가 창문에 있더라.” 회장이 말했다. 느리게, 늘어지게. “창문에. 귀신처럼.”

그리고 그가 웃었다.

이 집에 와서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침이 한 줄기 턱으로 흘렀다. 마영순이 수건을 들었다. 정숙이 죽 젓던 숟가락을 멈췄다. 하윤은 귤 껍질을 손에 쥐고 있었다. 한 줄로 이어진 껍질이 손가락 사이에서 끊어졌다.

“귀신처럼.” 회장이 한 번 더 말했다. 그리고 다시 귤을 씹었다.

유진이라면 끊어진 껍질은 버리고 새 귤을 깠을 것이다. 하윤은 그걸 손안에 쥐고만 있었다.

확신했다. 이 사람은 치매가 아니다.

지하철에서 읽은 유진의 일기 한 줄이 떠올랐다. 2012년 11월. 아부지는 연기를 잘한다. 할머니가 하는 걸 다 따라 한다. 나는 그게 무섭다.

다 따라 한다. 리야드 이야기. 침. 숟가락을 놓치는 손. 멍한 눈. 지난주 새벽 4시, 젖은 침구와 마영순이 갈아 끼우던 기저귀. 하윤은 그 새벽 노인을 시험한 자기가 부끄러웠다. 문틈에서 고개를 돌렸다.

기저귀도 연기였다.

하윤은 연기로 밥을 먹었다. 학교 무대에서, 대학로 소극장에서, 그리고 패밀리에서 2년. 남의 딸, 남의 애인, 남의 조문객. 진짜로 기쁜 정빈도, 30년 동안 남의 엄마를 한 문숙자도, 고개를 7초 숙이는 조만수도 다 알아봤다. 진짜 사람은 대사를 반복하지 않는다. 하윤은 그걸로 가짜를 골라냈다.

이 사람은 반복을 연기했다. 반복하는 사람을 연기하는 사람은 반복하지 않는 법을 안다.

회장이 귤 한 조각을 하윤 쪽으로 내밀었다. 손이 떨렸다. 정확히, 떨려야 하는 만큼.

하윤은 그걸 받았다. 입에 넣었다. 시었다.

자기보다 연기를 잘하는 사람을, 하윤은 처음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