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 · 5장 애인
대행 · 도해

5장 애인

서울 마포구 망원동 패밀리 사무실, 2026년 9월 22일 화요일
약 12분

박정훈은 명함 지갑의 모서리를 맞추고 있었다. 탁자 위에 세워서 톡, 눕혀서 톡. 지갑 안의 명함이 한 장도 삐져나오지 않았는데도 그는 계속 맞췄다.

“추석 전날이에요. 목요일 저녁 7시. 안양이고요.”

서른넷. 군포시청 세무과 주무관. 회색 점퍼 안에 넥타이를 맸는데, 넥타이 끝이 셔츠 단추 하나를 가리지 못했다. 하윤의 눈이 그 단추에 걸렸다. 아침에 혼자 매고 거울을 한 번만 본 사람의 넥타이였다.

“고등학교 동창회요?” 문숙자가 장부를 펼치며 물었다. 손님용 목소리였다. 반 옥타브 높고, 끝이 둥글었다.

“3학년 7반이요. 졸업 15주년.”

“여자친구 역할, 저녁 시간, 2차까지면…….” 문숙자가 계산기를 두드렸다. “명절 전날이라 할증이 붙어요. 괜찮으세요?”

“네.”

정빈이 의상실 행거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형, 동창회 애인은 기본이 첫사랑 질투 작전인데. 누구 보라고 데려가는 거예요?”

정훈의 손이 멈췄다. 명함 지갑이 탁자 위에 눕혀진 채로 있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요?”

“정빈아.” 도석이 유리문 안쪽에서 말했다. 그는 서류를 보고 있었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 “손님한테 이유 묻는 건 누구 일이냐.”

“하윤 누나 일이요.”

“근데 왜 네가 묻냐.”

정빈이 행거 사이로 사라졌다. 하윤은 정훈 맞은편 의자로 옮겨 앉았다. 노트를 펼쳤다. 볼펜 뚜껑을 입에 물지 않고 손바닥 안에 쥐었다. 의뢰인은 대행이 뭘 적는지 보고 싶어 하면서도 보기 싫어한다. 그래서 하윤은 노트를 늘 자기 쪽으로 조금 기울였다.

“정훈 씨. 저희가 같이 가면, 사람들이 정훈 씨한테 물을 거예요. 둘이 어떻게 만났냐, 언제부터냐. 그건 제가 만들 수 있어요. 근데 왜 혼자 가기 싫은지는 제가 알아야 돼요. 모르면 엉뚱한 데서 웃어요.”

정훈은 오래 말이 없었다. 그러다 휴대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보여 줬다. 교복 입은 아이들 서른 명 남짓이 바닷가 방파제에 서 있었다. 맨 앞줄 가운데,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자애가 옆 친구의 손을 잡고 있었다. 웃지 않았다. 다들 브이를 하는데 그 애만 손이 비어 있지 않았다.

“송지아요. 졸업여행 사진이에요. 2011년 11월. 이거 찍고 사흘 뒤에 없어졌어요.”

“없어졌다는 건.”

“사라졌어요. 지금까지.” 정훈이 화면을 껐다. “마지막으로 본 게 저예요. 안양 버스터미널에서. 그래서 동창회 가면 다들 저를 봐요. 안 보는 척하면서.”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그날 터미널에서는요?”

“터미널에서 잠깐 봤고, 인사만 하고 헤어졌어요.”

하윤은 받아 적지 않았다. 다른 걸 물었다. 그날 날씨는 어땠는지, 지아가 뭘 들고 있었는지. 정훈은 대답했다. 추웠고, 지아는 체육복 가방을 메고 있었다. 하윤은 다시 물었다. 경찰은 뭐라고 했는지.

“경찰한테도 그대로 말했어요. 터미널에서 잠깐 봤고, 인사만 하고 헤어졌어요.”

사십 분쯤 지나 하윤이 지아와 친했냐고 물었을 때, 정훈은 세 번째로 그 문장을 말했다.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숨을 쉬는 자리까지 같았다.

박정훈. 34. 명함 지갑 모서리를 맞춤. 넥타이 혼자 맴. “터미널에서 잠깐 봤고, 인사만 하고 헤어졌어요.” 세 번. 쉼표 자리까지 같음. 진짜 기억은 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이건 외운 문장.

하윤은 노트를 덮었다. 지금 물으면 정훈은 네 번째로 같은 문장을 말할 것이다. 외운 문장은 깨지 않는다. 옆에 앉아서 저절로 금이 가기를 기다린다.

“정훈 씨. 우리 어디서 만났는지부터 정해요.”


9월 23일 수요일, 안양 범계역 카페

두 번째 인터뷰는 정훈이 퇴근한 뒤 안양에서 했다. 하윤은 배역의 동네를 미리 걸어 보는 편이었다. 범계역 지하상가, 학교로 올라가는 언덕, 정훈이 말한 버스터미널. 터미널은 15년 전 자리 그대로였다. 대합실 의자가 바뀌었을 뿐이었다.

정훈은 카페 구석에서 노트북을 열었다. 실종자 찾기 카페였다. 그는 해마다 11월이면 글을 올렸다. 지아의 졸업여행 사진, 키 162센티미터, 왼쪽 귀 연골에 점 하나. 댓글은 해마다 줄었다. 올해 1월 글에는 댓글이 둘이었다.

하나는 ‘힘내세요’였다. 다른 하나의 닉네임은 ‘지아아빠’였다.

혹시 연락 오면 꼭 알려 주세요. 아빠가 기다린다고. 번호는 그대로입니다.

“친아버지세요?”

“의붓아버지요.” 정훈이 말했다. “지아가 그 얘기를 했어요. 그날.”

“무슨 얘기요.”

정훈은 대답 대신 노트북을 닫았다. 하윤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미성년 실종이 어떻게 처리됐는지 물었다. 정훈은 그건 잘 알았다. 지아는 그때 만 열일곱이었다. 실종아동으로 신고됐지만 가출 정황이 뚜렷했고, 이듬해 봄 열여덟이 지나자 서류는 ‘성인 가출’로 바뀌었다. 그다음부터는 아무도 찾지 않았다. 찾는 사람은 정훈과, 댓글의 ‘지아아빠’뿐이었다.

하윤은 카페에서 나와 지하철을 기다리며 노트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지아아빠, 번호는 그대로. 기다린다는 말이 왜 협박처럼 읽히는지 하윤은 적지 않았다.


9월 24일 목요일, 안양 고깃집

고깃집 2층 단체석 벽에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3-7 졸업 15주년 · 추석 전야’. 숯불 연기가 현수막 가장자리를 노랗게 그을렸다.

“야, 졸업은 12년에 했는데 왜 15주년이냐.” 누군가 소주잔을 들고 말했다.

“우리는 2011년부터 세.” 총무 나은영이 말했다. 명찰 바구니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고3 때부터. 그때부터 다 어른이었잖아.”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하윤은 그 말을 머릿속에 접었다. 은영은 서른넷, 짧은 단발에 회색 니트, 안경을 머리 위에 올리고 있었다. 장부를 쥐는 사람의 손이었다. 회비 봉투, 명찰, 2차 장소 예약까지 혼자 다 했다. 문숙자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었다.

“정훈아!”

은영이 정훈을 먼저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 눈이 하윤에게 와서 반 박자 머물렀다.

“여자친구?”

“안녕하세요. 서하윤이에요.”

하윤은 자기 이름을 썼다. 동창회 애인 역은 가장 쉬운 배역이었다. 이름도 나이도 그대로 두고, 직업만 ‘작은 출판사 편집자’로 바꿨다. 만난 지 일곱 달, 군포시청 민원실에서 세금 고지서 때문에. 정훈이 그때 번호표를 잘못 뽑아 줬다. 둘이 같이 웃었다. 하윤은 그날 날씨를 2월의 진눈깨비로 정해 두었다.

은영이 정훈의 등을 두드렸다. “잘됐다. 진짜로.”

자리에 앉자 질문이 쏟아졌다. 하윤은 진눈깨비와 번호표를 차례로 꺼냈다. 정훈은 처음엔 굳어 있다가, 하윤이 테이블 밑에서 그의 무릎을 두 번 두드리자 따라 웃었다. 사전에 정한 신호였다. 웃을 차례.

세 번째 고기판이 올라올 즈음, 술이 오른 남자 하나가 정훈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야, 박정훈. 너 아직도 경찰 오면 떨리냐?”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고기 굽는 소리만 났다.

“김태균, 너 그만 마셔.” 은영이 말했다. 목소리가 크지 않았는데 태균이 팔을 풀었다. “쟤 건드리지 마. 15년째 똑같은 소리 하는 너도 지겹다.”

하윤은 정훈의 무릎을 두드리지 않았다. 웃을 차례가 아니었다. 대신 그의 접시에 고기 한 점을 놓았다. 애인은 이럴 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냥 먹으라고 놓아 준다.

8시 반쯤 담임이 왔다. 오경숙 선생님. 지금은 인근 고등학교 교감이라고 했다. 쉰아홉, 단정한 회색 재킷. 다들 일어나 인사했고 선생님은 한 명씩 이름을 불렀다.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계단 쪽에서 꽃배달 기사가 올라왔다.

흰 국화 한 다발이었다. 리본에 검은 글씨로 ‘3-7 송지아’. 기사가 영수증 철을 내밀며 물었다. “나은영 님?”

“네, 저예요.”

은영이 서명을 했다. 하윤은 화장실에 가는 척 은영의 뒤를 지나갔다. 영수증 철 맨 윗장, 주문자 연락처 칸에 숫자가 길었다. +1 604로 시작했다. 국내 꽃집 영수증에 국가번호가 붙어 있었다. 해외에서 주문한 꽃이었다.

“올해도 왔네.” 누군가 말했다.

“매년 오잖아. 지아 엄마가 보내는 거라며.”

“지아 엄마가 무슨 돈이 있다고 매년…….”

“그만.” 은영이 국화를 테이블 끝, 빈자리 앞에 놓았다. 소주잔 하나를 그 앞에 따랐다. 아무도 그 잔을 건드리지 않았다.

누군가 지아의 이름을 다시 꺼냈을 때, 하윤의 눈은 오경숙 선생님에게 가 있었다. 선생님은 지아 이야기를 하는 아이를 보지 않았다. 국화를 보지도 않았다. 은영을 봤다. 아주 짧게. 은영이 선생님의 눈을 피해 집게로 고기를 뒤집었다. 다 익은 고기였다.

10시가 조금 넘어 은영의 휴대폰이 테이블 위에서 켜졌다. 하윤은 그 옆자리였다. 화면에 은행 앱 알림이 떴다.

[해외송금] Ji-A S. 님께 송금이 완료되었습니다.

은영이 휴대폰을 엎었다. 빠르지 않았다. 늘 하던 동작처럼 자연스러웠다. 하윤은 소주잔을 입에 댔다. 마시지는 않았다.

흰 국화. 받는 사람 나은영. 주문 번호 +1 604. 은영 휴대폰: 해외송금 ‘Ji-A S.’ 엎을 때 손이 익숙함. 매달 하는 일. 담임: 지아 이야기 → 은영을 봄. 은영의 15주년은 졸업이 아니라 2011년부터.

하윤은 화장실 칸 안에서 그 네 줄을 적었다. 휴대폰으로 604를 검색했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밴쿠버 일대. 그리고 노트를 덮고, 거울 앞에서 립스틱을 고쳤다. 정훈의 여자친구 얼굴로.


화장실 앞 복도는 좁았다. 환풍기가 덜덜거렸다. 은영이 손을 씻고 나오다 하윤과 마주쳤다.

“정훈이 괜찮아? 태균이 쟤는 원래 저래.”

“괜찮아요. 총무님이 막아 주셔서요.”

은영이 웃었다. 하윤은 비켜서지 않았다. 복도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너비였다.

하윤은 이 일을 하면서 한 가지를 배웠다. 사람은 누가 자기 비밀을 맞히면 무너지지 않는다. 틀리게 맞히다가 고쳐 말하면 무너진다. 상대가 끝까지 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니까.

“총무님, 매년 꽃 보내는 거 총무님이죠?”

은영의 웃음이 그대로 굳었다.

“아니다.” 하윤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받는 건 총무님인데, 보내는 건 다른 사람이네. 604면 캐나다 서쪽이고요.”

환풍기 소리가 컸다. 은영은 젖은 손을 니트 옆구리에 닦았다. 한 번, 두 번. 손이 다 말랐는데도 닦았다.

“당신 뭐예요.”

“정훈 씨 여자친구요.” 하윤이 말했다. “오늘 밤까지는요.”

은영의 눈이 하윤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복도 끝 비상구 쪽으로 걸어갔다. 하윤이 따라갔다. 비상구 문을 열자 계단참에 찬 바람이 들었다. 은영은 계단에 앉지 않고 벽에 등을 댔다.

“그날 밤, 지아가 우리 집에 왔어요.” 은영이 말했다. “터미널에서 정훈이 만나고 나서. 돈이 없어서 버스를 못 탔대요. 얼굴이…….” 은영이 말을 멈췄다. “선생님한테 전화했어요. 제가. 선생님이 새벽에 차를 가지고 오셨어요.”

“그 사람 때문에요?”

“정훈이가 카페에 글 올리는 거 알죠. 해마다.” 은영이 휴대폰을 꺼내 쥐었다. 화면은 켜지 않았다. “그 사람이 거기 꼭 댓글 달아요. 15년째. 정훈이가 뭘 알면, 정훈이 글에 뭐가 묻어나요. 정훈이는 거짓말을 못 하잖아요.”

“그래서 정훈 씨한테는 말 안 하셨어요.”

“못 했어요.” 은영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졌다. “그 사람 아직 안양 살아요. 명학역 근처에서 철물점 해요. 추석 때마다 지아 엄마 집에 와요. 이혼했는데도.”

지아는 이름을 바꿨다. 스무 살에 선생님의 사촌을 따라 밴쿠버로 갔다. 지금은 거기서 요리를 한다. 은영은 그 이상을 말하지 않았다. 하윤도 묻지 않았다.

“송금은요?”

“지아 엄마 돈이에요. 매달 시장에서 저한테 현금으로 줘요. 엄마 이름으로 보내면 그 사람이 알 수도 있으니까. 저는 그거 보내고, 지아 소식 받아서 엄마한테 전하고.” 은영이 웃었다. 웃는 게 아니었다. “15년이요. 앱에 진짜 이름은 못 쓰겠더라고요. 별칭 칸에 옛날 이름을 적었어요. 그거 하나는 남겨 두고 싶어서.”

Ji-A S. 하윤은 그 별칭을 머릿속에서 한 번 읽었다. 남겨 둔 이름. 누가 계속 불러 주지 않으면 사라지는 이름.

“꽃은 지아가 보내요. 우리 다 잊지 말라고. 아니, 자기 잊지 말라고가 아니라…….” 은영이 말을 골랐다. “자기 살아 있다고. 저한테만 알아들으라고.”

계단 아래에서 누군가 2차 가자고 소리쳤다. 은영이 하윤의 팔을 잡았다. 손톱이 들어올 만큼 세게.

“정훈이한테 말할 거예요?”

하윤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의뢰인은 정훈이었다. 정훈은 15년 동안 진실을 몰랐다. 대행은 의뢰인의 편이다. 사장님이라면 뭐라고 했을까. 사장님이라면 이 계단참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다는 안 할게요.” 하윤이 말했다. “대신 하나만 부탁드려요. 지아 씨한테 한 줄만 전해 주세요. 정훈이 미안해한다고.”

“정훈이가 왜 미안해해요? 걔가 뭘 했다고.”

“그건 정훈 씨가 말할 거예요.”

은영이 하윤의 팔을 놓았다. 손톱 자국이 반달처럼 남았다.


2차는 노래방이었다. 정훈과 하윤은 가지 않았다. 고깃집 앞 편의점 파라솔에 앉아 정훈이 캔커피 두 개를 땄다. 추석 전날 밤이라 길에 차가 없었다. 건너편 아파트 창문 몇 개에서 전 부치는 냄새가 내려왔다.

“오늘 고마웠어요.” 정훈이 말했다. “대행료 아깝지 않았어요.”

“정훈 씨.”

“네.”

“그날 터미널에서요.”

정훈이 캔을 내려놓았다. 하윤은 그를 보지 않고 건너편 창문에 눈을 두었다. 외운 문장을 깨는 건 눈이 아니었다. 옆자리였다.

“……3만 원 있었어요.” 정훈이 말했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지갑에. 만 원짜리 세 장. 지아가 차비 좀 빌려 달라고 했어요. 집에 못 있겠다고. 아빠가, 그 사람이, 손을 댄다고. 저는 무서웠어요. 지아가 그런 말을 하는 게. 그래서 없다고 했어요. 지갑 있는 거 뻔히 보이는데.”

그는 손바닥으로 캔을 감쌌다. 다 식은 캔이었다.

“그다음 날부터 지아가 없었어요. 경찰이 와서 물어보는데, 3만 원 얘기를 못 하겠더라고요. 그거 말하면 제가 보낸 거잖아요. 어디 갔는지 모르는 데로. 제가 3만 원만 줬으면 지아가 어디 가서 죽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그 문장을 만들었어요.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고. 경찰한테 말하고, 엄마한테 말하고, 15년 동안 저한테 말했어요.”

하윤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있었다. 지아는 살아 있어요. 밴쿠버에서 요리를 해요. 그 말이 혀끝까지 왔다. 하윤은 캔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혀를 덮었다.

11시 40분. 정훈의 휴대폰이 파라솔 테이블 위에서 울렸다. 메시지 한 통이었다. 발신 번호가 길었다. +1로 시작했다.

정훈은 화면을 오래 봤다. 그러다 하윤 쪽으로 돌렸다. 손이 떨려서 화면이 흔들렸다.

괜찮아. 고마웠어.

“이게 뭐예요.” 정훈이 말했다. “누가…… 이게 뭐예요?”

한글 두 문장이었다. 마침표까지 찍혀 있었다. 은영이 노래방 어두운 방 구석에서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밴쿠버는 아침 7시 40분이었다.

“모르겠어요.” 하윤이 말했다. 정훈의 여자친구 목소리였다. “근데 답장은 해요. 하고 싶은 말 있잖아요.”

정훈은 한참 자판 위에 엄지를 올려놓고 있었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치지 않았다. 휴대폰을 두 손으로 감싸고 이마에 댔다. 어깨가 한 번 크게 들썩였다가 내려갔다. 하윤은 그 어깨에 손을 올리지 않았다. 애인 배역이라면 올렸을 것이다. 하윤은 배역 밖에서 그냥 옆에 앉아 있었다.


택시는 서부간선도로를 탔다. 기사가 라디오를 켜 두었다. 귀성길 정체 소식이 끝나고 뉴스가 이어졌다. 건설 현장 사고 재판이 어쩌고 하는 앵커의 목소리가 나왔다.

“기사님, 라디오 좀 꺼 주실 수 있어요?”

기사가 라디오를 껐다. 차 안이 조용해졌다. 하윤은 창에 머리를 기댔다.

스스로 사라진 사람은 혼자 사라지지 않는다. 지아에게는 은영이 있었다. 새벽에 차를 몰고 온 선생님이 있었다. 매달 시장에서 현금을 건네는 엄마가 있었다. 사라진 사람 뒤에는 꼭 숨겨 주는 사람이 있고, 숨겨 주는 사람은 해마다 무언가를 지킨다. 꽃을 받고, 잔을 따르고, 2011년부터 셈을 한다.

하윤은 정숙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영순 말로는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피아노 뚜껑을 여는 사람이었다. 2주 전 처음 갔던 주말에도 정숙은 아침에 거실로 내려와 뚜껑을 열고, 흰 융으로 건반을 하나씩 닦았다. 소리가 나지 않게. 그런데 9월 20일, 유진이 사라진 날에는 하루 종일 닫아 두었다. 하윤은 그때 그걸 슬픔이라고 읽었다.

9/20(일). 피아노 닫힘. 의뢰인 휴대폰 계속 확인. 회장 리야드 없음. 15시~16시 남쪽 창. “작년에도.”

노트를 펼쳐 그 줄을 다시 읽었다. 슬픔이라고 쓴 단어는 없었다. 하윤이 그렇게 읽었을 뿐이었다. 정숙은 울지 않았다. 사진을 꺼내 보지도 않았다. 뚜껑을 닫고, 그 위에 흰 융을 네모반듯하게 접어 올려 두고, 하루를 보냈다. 은영이 빈자리 앞에 소주잔을 따르듯이.

슬퍼서가 아니었다. 기념일을 지키듯이.

택시가 한강을 건넜다. 하윤은 볼펜을 꺼내 그 줄 옆에 물음표 하나를 그렸다. 그리고 그 물음표를 오래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