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 · 4장 시험
대행 · 도해

4장 시험

서울 성북구 성북동, 2026년 9월 19일 토요일
약 11분

한성대입구역 승강장 의자에 앉아 하윤은 노트를 폈다. 열차 두 대가 지나갔다. 두 시까지는 사십 분이 남아 있었다.

시험 1. 오른손으로 귤. 껍질을 끊는다. 시험 2. 23마디를 틀리지 않는다. 시험 3. 밤. 1층.

세 줄을 다시 읽었다. 대행이 할 일이 아니었다. 대행은 배역을 하러 가는 사람이지 의뢰인의 남편을 재러 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도석이 이 노트를 봤다면 뭐라고 했을지 하윤은 알았다. 그래도 지우지 않았다.

손목의 자국은 다 빠졌다. 그 자리를 엄지로 눌러 봤다. 아프지 않았다. 아프지 않은 게 이상했다. 일주일 내내 그 자리가 있다는 걸 잊은 적이 없었다.

세 번째 열차가 들어왔다가 떠났다. 하윤은 노트를 닫고 출구 계단을 올라갔다.


대문은 지난주처럼 저절로 열렸다. 정숙은 현관에서 카디건 단추를 봤고, 이번엔 이마를 보기 전에 화장실로 데려갔다. 컨실러를 두 번 두드렸다. 손을 씻는 데 지난주보다 덜 걸렸다.

회장은 같은 자리에 있었다. 남쪽 창가, 체크무늬 담요. 하윤이 왼손을 담요 위에 얹자 그는 손을 내려다보고, 얼굴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유진아. 리야드는 모래가 밀가루 같았다.”

“응, 밀가루 같았지.”

지난주의 눈물은 오지 않았다. 하윤은 조금 안도했고, 안도한 자신이 조금 싫었다.

네 시에 마영순이 과일 접시를 내왔다. 사과 네 쪽과 귤 셋. 하윤은 소파에서 일어나 휠체어 옆 낮은 의자로 옮겨 앉았다. 귤을 집었다. 오른손으로.

엄지손톱을 꼭지 옆에 찔러 넣었다. 왼손으로 연습하던 일주일이 손끝에 남아 있어서 오른손이 오히려 서툴렀다. 껍질이 한 뼘쯤 따라오다 툭 끊겼다. 하윤은 버리지 않았다. 끊긴 데서 다시 뜯었다. 또 끊겼다. 껍질이 손바닥만 한 조각으로 접시 위에 쌓였다.

회장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하윤은 귤 한 쪽을 떼어 그의 앞에 내밀었다.

“아부지, 귤.”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귤을 봤다. 껍질 조각들은 보지 않았다. 손을 뻗어 받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한 쪽을 더 달라는 듯 손바닥을 펴서 내밀었다. 하윤은 한 쪽을 더 놓았다.

탁, 하고 찻잔이 받침에 놓이는 소리가 났다. 정숙이었다. 정숙은 소파 끝에서 하윤의 오른손을 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찻잔을 다시 들지도 않았다.

저녁 준비를 거들러 부엌에 들어갔을 때 정숙이 도마 앞에서 말했다. 하윤 쪽을 보지 않고.

“그 애는 오른손으로 안 까요.”

“알아요. 손이 미끄러져서요.”

정숙은 칼질을 멈추지 않았다. 애호박이 일정한 두께로 쓰러졌다.

“아부지가 모르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숙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썬 호박을 볼에 담아 하윤에게 건넸다. “소금 조금만.” 그게 다였다.

시험 1. 반응 없음. 껍질 안 봄. 받아먹음. 의뢰인이 봄.

다섯 시쯤 대문 앞에 작은 트럭이 섰다. 정원사라는 노인이 포대 여섯 개를 손수레로 날랐다. 포대 터진 자리에서 붉은 흙이 디딤돌 위로 점점이 흘렀다. 굵은 모래알이 섞인 흙이었다.

“마사토예요.” 정숙이 창가에서 말했다. 회장의 휠체어 옆이었다. “저 모퉁이 담장 밑에 새 화단을 만들어요. 가을에 국화를 심으려고.”

회장의 눈이 흙을 따라갔다. 손수레가 담장 모퉁이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노인은 빈 손수레로 돌아왔다가 다시 포대를 싣고 갔다. 해가 기울자 디딤돌 위의 흙은 더 붉어졌다.


저녁상에서 정숙은 지난주보다 말이 많았다. 하윤에게가 아니라 회장에게 했다. 오늘 정원사 할아버지가 허리를 다쳤다더라, 국화는 노란 걸로 할까 흰 걸로 할까. 회장은 대답하지 않았고 정숙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대답이 오지 않는 쪽으로 말을 거는 데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러다 한 번, 정숙이 하윤 쪽을 보고 말했다.

“그 애는 내가 가르친 애들 중에 제일 못 쳤어요. 여섯 살부터 쳤는데.”

“엄마가 가르쳐서 그래. 엄마한테 배우면 다 못 쳐. 그치?”

유진의 말투로 받았다. 정숙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웃음이 되기 전에 멈췄다.

저녁을 먹고 나서 하윤이 먼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정숙이 청하기 전이었다.

뚜껑은 열려 있었다. 하윤은 의자 높이를 손으로 한 번 쓸었다. 등 뒤에서 휠체어 바퀴 소리가 다가와 멈췄다. 지난주와 같은 거리였다.

첫 소절. 미, 레샵, 미, 레샵. 하윤은 이번 주에 연습실에 가지 않았다. 대신 원룸 책상 모서리를 건반 삼아 왼손만 백 번 짚었다. 23마디에서 맞는 자리로 가는 연습이었다. 지난번엔 틀리는 연습을 했으니 그만큼 갚아야 했다.

스무 마디. 스물한 마디. 스물두 마디.

23마디. 왼손이 맞는 건반에 떨어졌다. 소리가 맑았다. 거실이 아주 잠깐 조용해졌다. 하윤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등 뒤에서 소리가 났다.

허밍이었다.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오른손의 선율을 따라왔다. 음정이 조금씩 낮았다. 그래도 박자는 정확했다. 하윤의 손이 반 박자 느려지자 허밍도 반 박자 느려졌다. 하윤이 다시 박자를 찾자 허밍도 따라왔다. 가운데 밝은 부분을 지나 처음 선율이 돌아올 때까지. 마지막 화음까지.

하윤은 건반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허밍이 끝난 걸 확인하고 나서야 손을 뗐다.

손뼉 소리는 나지 않았다.

돌아보니 회장은 창 쪽을 보고 있었다. 입을 조금 벌린 채로. 정숙은 피아노 옆구리에 손을 짚고 서 있었다. 그 손가락이 피아노 몸통의 나뭇결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오늘은 안 틀렸네.” 정숙이 말했다.

“응. 연습했어. 잘했지? 그치?”

하윤은 회장을 보며 말끝을 올렸다. 회장은 말끝을 받지 않았다. 한동안 지나서야 그가 말했다.

“리야드는 밤에 추웠다. 낮엔 덥고 밤엔 추워. 모래가.”

시험 2. 허밍. 처음부터 끝까지. 박자 정확. 손뼉 없음.

하윤은 그 아래 한 줄을 더 적다가 지웠다. 노래는 사람에게서 가장 늦게 떠난다고 어디서 들었다. 이름을 잊은 사람도 어릴 때 부르던 노래는 끝까지 부른다고. 허밍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았다. 틀린 데서 손뼉을 치는 사람도, 맞는 데서 허밍을 하는 사람도, 둘 다 이 곡을 오래 들은 사람일 뿐이었다.


밤 열한 시, 유진의 방에 올라갔을 때 침대맡 액자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지난주 엎어 둔 사진이었다. 철근 더미 위의 남자들, ‘1980 리야드’. 누군가 그것을 다시 세워 놓았다. 원래 있던 자리, 원래 있던 각도로. 액자 유리에 먼지 하나 없었다. 닦고 세운 것이었다.

하윤은 그 앞에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이번에는 엎지 않았다. 대신 침대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사진에 등을 지고 누우니 창이 보였다. 창이 검었다.

새벽 한 시. 하윤은 물을 마시러 내려간다는 핑계를 스스로에게 대고 계단을 내려갔다.

1층 복도 끝이 회장의 침실이었다. 휠체어 때문에 2층에서 옮겼다고 했다. 문은 한 뼘쯤 열려 있었다. 간병인이 밤에 드나들려고 늘 그렇게 둔다고 마영순이 말했었다. 방 안 콘센트에 꽂힌 작은 수면등이 주황빛을 냈다.

하윤은 문틈 앞에 섰다.

회장은 반듯이 누워 있었다. 이불이 가슴께까지 덮여 있었고, 두 손이 그 위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입이 벌어져 있었다. 숨이 길게 들어갔다가, 걸렸다가, 다시 나왔다. 들어가는 숨과 나오는 숨 사이에 틈이 있었다. 하윤은 그 틈을 셌다. 셋, 넷. 그리고 다음 숨.

일 분을 서 있었다. 이 분을 서 있었다. 회장은 한 번도 뒤척이지 않았다.

하윤은 2층으로 올라가 휴대폰 알람을 3시 50분에 맞췄다.

진동이 울렸을 때 하윤은 잠들어 있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몰랐다. 맨발로 계단참까지 내려가 난간 뒤에 앉았다. 거기서 회장의 방문이 비스듬히 보였다.

네 시 조금 넘어 복도 끝 마영순의 방에 불이 켜졌다. 마영순이 대야 하나와 둘둘 만 무언가를 안고 나왔다. 회장의 방으로 들어갔다. 불이 켜졌다. 형광등이 아니라 침대맡 스탠드였다.

“회장님, 옆으루 누우셔유. 그렇지. 아이고 잘하시네.”

낮은 목소리. 이불 걷는 소리.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냄새가 계단참까지 올라왔다. 시큼하고 무거운 냄새. 하윤은 그 냄새를 알았다. 요양원 동행 대행을 몇 번 나가 봤다.

“시트까지 젖었네. 괜찮어유, 괜찮어. 금방 갈아유.”

회장이 무어라고 웅얼거렸다. 아이가 잠결에 내는 소리였다. 하윤은 한 단어를 알아들었다.

“어무이.”

“야, 어무이 여기 있어유.” 마영순이 대답했다. 망설임이 없었다. 매일 밤 하는 대답이었다. “다 됐어유. 이제 주무셔유.”

마영순이 젖은 시트를 둘둘 말아 안고 나왔다. 하윤은 난간 뒤에서 몸을 낮췄다. 마영순은 계단 쪽을 보지 않았다. 다용도실로 가서 세탁기 뚜껑을 열었다. 물 받는 소리가 났다.

하윤은 소리 나지 않게 2층으로 올라갔다.

침대에 앉아 노트를 폈다. 시험 3, 이라고 적힌 줄을 오래 봤다. 볼펜으로 줄을 그었다. 한 번으로는 글자가 보여서 두 번 그었다. 그 위의 시험 1, 시험 2에도 줄을 그으려고 볼펜을 올렸다. 손이 내려가지 않았다.

하윤은 노트를 덮었다. 창밖이 아직 캄캄했다. 아래층에서 세탁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9월 20일 일요일

여섯 시 반, 하윤은 다용도실 뒷문으로 나갔다. 마영순이 뒷마당 빨랫줄에 시트를 널고 있었다. 큰 시트라 혼자서는 끝이 땅에 끌렸다. 마영순은 한쪽 끝을 줄에 걸고, 다른 쪽 끝을 들어 올리려고 까치발을 했다.

하윤은 말없이 다가가 늘어진 끝을 잡았다. 젖은 천이 손바닥에 차가웠다. 세제 냄새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다른 냄새가 남아 있었다. 둘은 시트를 마주 잡고 탁탁 털어 줄에 걸었다. 빨래집게를 마영순이 하나, 하윤이 하나 꽂았다.

“일찍 일어나셨네유.”

“잠이 안 와서요.”

마영순은 하윤의 얼굴을 한 번 훑고 말았다. 빈 빨래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들어가면서 말했다.

“이 집은 밤에 다 깨 있어유. 그래서 다들 잠이 안 와유.”

아침에 거실로 들어가 보니 피아노 뚜껑이 닫혀 있었다.

지난주 일요일 아침 정숙은 그 뚜껑을 열고 흰 융으로 건반을 하나씩 닦았다. 오늘은 그 융이 닫힌 뚜껑 위에 네모반듯하게 접혀 놓여 있었다. 닦을 준비만 해 두고 닦지 않은 사람처럼.

정숙은 정원에서 화분 흙을 갈고 있었다. 장갑 낀 손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정원 탁자 위에 휴대폰이 화면을 위로 한 채 놓여 있었다. 정숙은 흙을 한 삽 옮길 때마다 고개를 그쪽으로 기울였다. 화면은 계속 꺼져 있었다.

부엌에서 마영순이 하윤에게 낮게 말했다.

“오늘은 피아노 얘기 꺼내지 마셔유.”

“왜요?”

“날이 날이라서유.”

하윤은 의뢰서를 떠올렸다. 금지 화제, 따님의 실종 경위. 그 위 칸에 적힌 날짜. 2023년 9월 20일 이후 연락 두절. 손가락으로 셈할 필요도 없었다. 3년이었다. 오늘로 꼭.

정숙은 하루 종일 그 날짜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점심상에서도, 오후 차를 마실 때도. 유진의 이름도 부르지 않았다. 하윤을 부를 일이 있으면 “저기” 하고 불렀다. 하윤은 그게 무엇을 피하는 말인지 알았다. 대답하지 않고 “응” 하고 다가갔다.

회장도 그날은 리야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침에도, 점심에도. 마영순이 “회장님, 모래 얘기 해 주셔유” 하고 말을 걸었을 때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지난 주말 내내 같은 문장을 되풀이하던 입이 하루 종일 닫혀 있었다.

밥 먹을 때만 열렸다. 점심상에서 회장은 마영순이 떠 주는 대로 전복죽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상을 밀지 않았다. 빈 그릇 위로 지난주 토요일의 출렁이던 국 대접이 겹쳤다. 원래, 가끔. 마영순은 오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다.

오후 세 시쯤 회장이 휠체어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두 번 쳤다. 마영순이 다가가자 그는 손가락으로 창 쪽을 가리켰다. 마영순이 휠체어를 돌려 창에 바짝 붙였다. 남쪽이었다. 소나무 너머 담장, 담장 너머 비탈진 지붕들.

회장은 그쪽을 향한 채 한 시간을 앉아 있었다. 고개를 한 번도 돌리지 않았다.

“작년 이날도 그러셨어유.” 마영순이 행주를 접으며 말했다. “저쪽만 보시고.”

하윤은 휴대폰 지도를 열었다. 성북동 이 집에서 남쪽으로 곧게 선을 그으면 시내를 지나고, 남산 자락을 지나고, 한강에 닿았다. 이 창에서는 그중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담장과 지붕과 하늘뿐이었다.

하윤은 지도를 닫았다. 눈앞에 회장의 뒷모습이 있었다. 마른 목덜미, 귀 뒤의 흰 머리. 휠체어 손잡이를 잡은 마영순의 손.

9/20(일). 피아노 닫힘. 의뢰인 휴대폰 계속 확인. 회장 리야드 없음. 15시~16시 남쪽 창. “작년에도.”


다섯 시 반, 하윤은 회장의 휠체어 옆에 쪼그려 앉았다. 회장은 여전히 남쪽 창을 향해 있었다.

“아부지, 나 갈게. 다음 주에 또 올게.”

담요 위에 손을 얹었다. 회장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윤은 손을 얹은 채 기다렸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았고, 그래서 손을 거두었다. 손목은 잡히지 않았다. 회장은 하윤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다섯 시 오십 분, 하윤이 현관에서 신발을 신을 때 정숙이 2층에서 내려왔다. 손에 공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하드커버 스프링 공책이었다. 표지가 연두색이었고, 모서리가 닳아 판지가 보였다. 앞표지에 반쯤 떨어진 고양이 스티커. 그 아래 유성펜 글씨, ‘2012’.

“그 애 대학 때 일기예요. 2학년.”

하윤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역할에 도움이 되면.”

정숙은 공책을 하윤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 하윤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돌아서서 거실로 갔다. 닫힌 피아노 앞을 지나며 뚜껑 위의 융을 집어 들었다. 펴지 않고 그대로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삼각지에서 6호선으로 갈아탔다. 일요일 저녁 열차는 한산했다. 하윤은 문 옆 구석 자리에 앉아 공책을 무릎 위에 펼쳤다.

유진의 글씨는 둥글었다. 왼손잡이 특유의 기울기가 있었다. 글자 끝이 오른쪽 위로 끌려 올라갔다. 말끝을 올리는 버릇이 글씨에도 있었다.

3월. 아부지가 아랍 숫자 쓰는 법을 가르쳐 줬다. 0은 점 하나, 5는 동그라미. 리야드에서 월급 봉투 숫자를 읽으려고 제일 먼저 배웠다고. 동그라미가 다섯이라니, 나는 평생 헷갈릴 것 같다.

6월. 아부지 따라 현장에 갔다. 안전모가 커서 자꾸 눈을 덮었다. 아부지는 콘크리트 기둥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면서 다녔다. 두드리면 안다고. 뭘 아는데? 물으니까 대답 안 했다. 아부지는 대답 안 하는 게 대답이다.

하윤은 그 장을 빨리 넘겼다.

8월. 오빠가 회사에 들어간 지 넉 달. 저녁 먹을 때 아부지가 현장 얘기를 물으면 오빠는 대답을 너무 잘한다. 숫자까지 다 맞게. 아부지는 고개만 끄덕인다. 나는 오빠가 대답하는 게 아니라 외운 걸 읽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말은 안 했다.

할머니 이야기가 많았다. 할머니는 아부지를 ‘아재’라고 불렀다. 큰아버지 이름으로 부르는 날도 있었다. 아부지는 할머니 숟가락을 대신 들었다. 할머니가 처음 기저귀를 찬 날, 아부지는 할머니 방에 혼자 들어가 한참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가 밤에 깨서 어무이를 찾으면, 아부지가 할머니의 어무이가 되었다. 유진은 그걸 문틈으로 봤다고 적었다.

열차가 역을 떠났다. 창이 다시 검은 거울이 되었다. 하윤은 11월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날짜 밑에 한 단락이 있었다. 다른 날보다 글씨가 작고 꾹꾹 눌려 있었다.

‘아부지는 연기를 잘한다. 할머니 앞에서는 특히. 할머니가 아부지를 못 알아봐도 아부지는 할머니 아들 연기를 끝까지 한다. 할머니가 하는 걸 다 따라 한다. 나는 그게 무섭다.’

하윤은 그 문장을 한 번 더 읽었다. 세 번째로 읽으려다 고개를 들었다.

검은 창에 얼굴이 비쳤다. 남색 카디건. 어깨까지 오는 머리. 유진과 닮은 턱. 그리고 왼쪽 눈썹 위, 오후 내내 땀에 컨실러가 지워진 자리에 쌀알만 한 흉터가 다시 드러나 있었다.

창 속의 여자가 하윤을 마주 봤다. 하윤은 그 얼굴이 누구 연기를 하고 있는지 잠깐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