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 · 2장 첫 주말
대행 · 도해

2장 첫 주말

서울 성북구 성북동, 2026년 9월 12일 토요일
약 12분

대문은 검은 철문이었다. 담장 위로 능소화 넝쿨이 넘어와 있었는데, 꽃은 다 지고 마른 꽃자루만 매달려 있었다. 서하윤은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카디건 소매를 한 번 끌어내렸다.

남색 카디건은 화요일에 택배로 왔다. 상자 안에는 카디건 하나, 흰 셔츠 둘, 회색 면바지 하나. 세탁소 비닐을 벗기자 섬유유연제 냄새 밑으로 오래 닫혀 있던 옷장 냄새가 올라왔다. 소매 끝이 손등을 반쯤 덮었다. 유진은 하윤보다 팔이 조금 길었다.

차유진. 왼손잡이(수저, 귤, 문고리). 아버지는 “아부지”. 말끝을 올린다. “그치?” “맞지?” 피아노: 「엘리제를 위하여」. 23마디 왼손에서 틀림. 매번.

목요일 사전 인터뷰는 세 시간이 걸렸다. 정숙은 녹음 넷과 영상 둘을 틀어 주었다.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치며 웃는 목소리. 생일 케이크 앞에서 “아부지, 소원 빌었는데 안 알려 줄 거다? 그치?” 하는 목소리. 하윤은 그 목소리를 이틀 밤 이어폰으로 들었다. 말끝을 올리는 건 쉬웠다. 어려운 건 올린 끝을 다시 내리지 않는 것이었다.

피아노는 더 어려웠다. 하윤이 배운 건 초등학교 때 2년이 전부였다. 망원동 연습실을 사흘 빌려 그 곡 하나만 쳤다. 처음 이틀은 틀리지 않으려고 쳤고, 마지막 날은 틀리려고 쳤다. 일부러 틀리는 게 더 어려웠다. 손이 자꾸 맞는 건반으로 갔다.

계약은 토요일 오후 2시부터였다. 첫 주만 11시에 와 달라고 정숙이 부탁했다. 집을 먼저 익혀야 한다고.

초인종을 누르자 철문이 저절로 열렸다.


정숙은 현관에서 하윤을 위아래로 훑지 않았다. 카디건 단추를 봤고, 소매 끝을 봤고, 마지막으로 이마를 봤다.

“잠깐 이리 와요.”

거실 옆 작은 화장실이었다. 정숙은 세면대 서랍에서 컨실러를 꺼내 약지 끝에 덜었다. 그리고 하윤의 왼쪽 눈썹 위를 눌렀다. 쌀알만 한 흉터였다. 남들은 잘 알아보지 못했다. 배역에 따라 하윤도 가리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 애는 여기 흉터가 없어요.”

“말씀드렸어야 했는데요.”

“어쩌다 그랬어요?”

“어릴 때요.”

정숙은 더 묻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려 경계를 펴고, 거울 속 하윤과 눈을 맞춘 채 한동안 서 있었다. 그러고는 수도꼭지를 틀어 손을 씻었다. 손을 씻는 데 오래 걸렸다.

부엌으로 가는 길, 냉장고 옆에 코르크 게시판이 있었다. 약 시간표, 간병인 근무표, 동네 약국 전화번호. 그 한가운데 종이 두 장이 압정 넷씩으로 박혀 있었다. 하나는 사무실에서 본 이태준 교수의 소견서 사본이었다. 다른 하나는 손으로 쓴 안내문이었다.

‘가족 역할 치료 안내. 주말 방문자는 “유진”으로 부릅니다. 환자 앞에서 실명, 직업, 치료 관련 대화 금지. 문의는 한정숙에게.’

글씨가 반듯했다. 오선지에 음표를 그리던 사람의 글씨였다. 맨 아래 날짜가 9월 8일. 사무실에서 계약서를 쓴 다음 날이었다. 이 집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나 냉장고를 열 것이고, 누구나 이 종이를 볼 것이다. 하윤은 압정 머리를 하나씩 손끝으로 눌러 보았다. 떼어 내려면 손톱이 아플 만큼 깊이 박혀 있었다.

“영순 씨.”

부엌에서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나왔다. 예순 남짓, 짧은 파마머리, 팔뚝이 단단했다. 마영순은 하윤에게 고개를 숙이고, 게시판에 한 번 눈을 주었다가 하윤에게 돌아왔다.

“유진 씨, 오셨어유.”

말끝에 충청도가 남아 있었다. 첫마디부터 이름을 틀리지 않았다. 연습한 사람이었다.


회장은 거실 남쪽 창가에 있었다.

휠체어 바퀴 옆으로 햇빛이 길게 누웠다. 무릎에 체크무늬 담요, 마른 어깨에 회색 니트 조끼. 손이 컸다. 담요 위에 올린 손등에 검버섯이 몇 개 있었지만 손톱은 짧고 깨끗했다. 그는 정원의 소나무 쪽을 향해 있었다. 보고 있다기보다 눈이 그쪽에 놓여 있었다.

정숙이 휠체어 옆에 쪼그려 앉았다.

“여보. 유진이 왔어요.”

회장의 고개가 느리게 돌아왔다. 눈이 하윤을 지나쳤다가 되돌아왔다. 인터뷰에서 정숙은 말했다. 그 애는 집에 오면 아버지 무릎에 손부터 얹었다고. 하윤은 한 걸음 다가가 왼손을 담요 위에 얹었다.

“아부지, 나 왔어. 늦었지?”

회장은 그 손을 내려다봤다. 오래.

“리야드는.”

목이 쉬어 있었다.

“리야드는 모래가 밀가루 같았다. 손으로 쥐면 다 빠져나가. 밀가루 같았어.”

“응. 아부지 맨날 그 얘기 하잖아.”

“밀가루 같았어.” 그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아랫입술이 떨렸다. “유진아.”

부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확인하는 소리였다. 회장의 눈가가 붉어지더니 눈물이 주름을 따라 비스듬히 흘렀다. 그는 닦지 않았다. 담요 위의 손이 올라와 하윤의 손을 덮었다. 차갑고 말랐다.

하윤은 웃으려고 했다. 유진이라면 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목 안쪽이 먼저 뜨거워졌다. 눈앞이 흐려졌다. 그게 어디서 온 건지 하윤은 몰랐다. 배역에서 온 건지, 다른 데서 온 건지.

정숙은 피아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엌 문간에서 마영순이 행주를 반으로 접었다.

“울지 마, 아부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 왔잖아. 그치?”


점심은 12시 반이었다.

미역국, 가자미조림, 계란찜, 잘게 썬 김치. 하윤은 왼손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일주일 동안 집에서도 왼손으로 밥을 먹었는데, 남의 식탁에서는 손목이 또 낯설었다.

마영순이 국을 떠 회장의 입 앞에 댔다. 회장은 고개를 돌렸다. 마영순이 다시 댔다. 담요 위의 손이 올라와 상 가장자리를 밀었다. 세게는 아니었다. 그릇들이 한 뼘쯤 밀려났고 국물이 출렁여 상보에 떨어졌다.

“원래 점심을 잘 안 드세요.” 마영순이 행주로 국물을 찍어 내며 말했다. 놀란 기색이 없었다.

“원래요?”

“가끔유.”

정숙은 아무 말 없이 가자미 살을 발라 하윤의 밥 위에 한 점 놓았다. 유진이 좋아한 반찬이었다.

하윤은 화장실에 간다며 일어나 세면대 앞에서 노트를 꺼냈다.

9/12(토). 점심 거부, 상을 밂. 간병인 “원래” → “가끔”. 말을 고쳤다.


오후 두 시, 회장은 창가에서 졸았다. 하윤은 소파 끝에 앉아 유진의 어릴 적 사진첩을 넘겼다. 정숙은 부엌에서 마영순과 장 볼 목록을 맞추고 있었다.

진동이 울렸다.

짧게 두 번. 탁자 위에서 울리는 딱딱한 소리가 아니라, 천에 싸인 낮은 소리였다. 하윤의 휴대폰은 조용했다.

회장의 담요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담요 밑으로 오른손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무언가를 눌렀다. 진동이 멎었다. 손이 다시 담요 위로 올라왔다.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입은 조금 벌어져 있었고 숨이 고르게 이어졌다.

하윤의 손가락이 사진첩 모서리에 걸린 채 멈췄다.

두 번 짧게. 하윤의 휴대폰도 월세가 빠져나갈 때 꼭 그렇게 울었다. 은행 앱이었다.

부엌에서 마영순이 무를 사야 한다고 했다. 정숙이 대파도, 하고 덧붙였다. 아무도 거실을 보지 않았다.


오규식은 네 시에 왔다.

검은 정장에 은색 넥타이핀. 쉰 후반. 그는 현관에서 구두를 벗어 코를 바깥으로 돌려놓고 거실로 들어와 회장에게 허리를 숙였다.

“회장님, 규식입니다.”

회장의 눈은 창밖에 있었다. 오규식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기다리지 않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가 하윤 쪽으로 돌아섰다.

“서하윤 씨죠. 오규식입니다. 회장님 비서실장이고요.”

게시판의 안내문을 이 사람이 모를 리 없었다. 회장은 담요 끝 실밥을 뜯고 있었다.

“여기서는 유진이에요.”

“아, 그렇죠. 실례했습니다.” 그가 웃었다. 입술만 움직였다. “서하윤 씨, 좋은 직업이시네요. 남의 집에 들어가는 일.”

그는 정숙에게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넸다. 정숙은 봉투를 열지 않고 피아노 위에 엎어 놓았다. 오규식은 십오 분 있다 갔다. 현관에서 구두를 신으며 마영순과 눈을 맞췄다. 마영순이 아주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부엌에서 정숙이 지나가듯 말했다. 여사님은 오 실장이 들인 사람이라고. 저녁마다 그 사람한테 전화로 보고한다고.


유진의 방은 2층 계단 끝 오른쪽이었다.

“여기서 자요. 시트는 새로 깔았어요.” 정숙은 문만 열어 주고 내려갔다.

방은 3년 전에 멈춰 있었다. 하윤은 그걸 먼지가 아니라 물건의 각도로 알았다. 책상 의자가 반쯤 빠져 있었다. 누가 방금 일어난 것처럼. 3년 동안 아무도 그 의자를 밀어 넣지 않았다. 창틀에 말라 버린 다육 화분 둘. 옷장 문에 붙은 메모, ‘9/22 치과’. 연도는 없었다.

책꽂이 맨 윗칸 한쪽이 비어 있었다. 얇게 먼지가 앉은 칸 바닥에 먼지 없는 직사각형 다섯 개가 나란히 남아 있었다. 같은 크기의 수첩들이 꽂혀 있던 자리. 치운 지 오래되지 않았다. 인터뷰 때 정숙은 말했다. 회사 물건은 치웠어요. 그 애 회사 얘기는 하지 말아 줘요.

침대 머리맡 선반에 액자가 둘 있었다.

하나는 유진과 회장이었다. 학사모를 쓴 유진이 아버지 팔짱을 끼고 있었다. 회장은 지금보다 스무 살은 젊었고 웃지 않았다. 웃지 않는데 어깨가 딸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다른 하나는 빛이 바랜 컬러 사진이었다. 하얀 안전모를 쓴 젊은 남자들이 철근 더미 위에 서 있었다. 뒤로 희뿌연 하늘과 크레인. 맨 왼쪽의 마른 청년이 회장이었다. 턱과 큰 손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사진 아래 볼펜 글씨, ‘1980 리야드’.

하윤은 그 사진을 오래 봤다. 철근은 철사로 묶여 있었다. 남자들의 장갑은 손바닥만 까맸다. 한 사람은 귀에 담배를 꽂고 있었다. 햇빛이 너무 세서 다들 눈을 찡그렸고, 웃는 얼굴은 없었다.

하윤은 액자를 엎어 놓았다. 유리가 선반에 닿으며 작게 딸깍했다.

그러고는 침대 끝에 앉아 한참 자기 손등을 봤다.


차민혁은 저녁 일곱 시에 왔다.

마흔 중반, 넥타이 없는 남색 정장. 그는 아버지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아버지, 민혁이요” 하고 존댓말로 인사했다. 회장은 그를 향해 고개만 돌렸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이었다. 민혁은 일어나 바지 무릎을 털었다.

그리고 하윤을 봤다. 정확히 3초.

“반갑습니다.” 그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대신 정숙에게 돌아섰다. “어머니 취미치고는 비싸네요. 회당 80이면.”

“치료예요.”

“그렇죠, 치료.” 민혁은 냉장고 옆 게시판 앞에 가서 소견서를 읽었다. 처음 읽는 사람처럼 끝까지 읽었다. “이 교수님 소견이면 어쩔 수 없죠. 아버지가 좋아지시면 저야 감사하고요.”

“저녁 먹고 가요.”

“약속이 있어서요. 도현이 학원 데리러 가야 하고.” 민혁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하윤에게 돌아서서 처음으로 웃었다. “주말마다 오신다고요. 토요일 두 시부터 일요일 여섯 시까지. 그럼 다음 주에 또 뵙겠네요. 유진 씨.”

그는 이름에 힘을 주지 않았다. 힘을 주지 않아서 더 또렷하게 들렸다.

그는 저녁을 먹지 않고 갔다. 현관문이 닫히자 정숙이 피아노 위의 서류 봉투를 들어 서랍에 넣었다.

저녁상에는 후식으로 귤이 올라왔다. 하윤은 하나를 집어 왼손 엄지로 꼭지를 눌렀다. 껍질이 갈라지는 자리를 손톱으로 따라가며 천천히 돌렸다. 연습한 대로였다. 반쯤 돌았을 때 껍질이 얇아졌다. 손을 늦췄다. 끊기지 않았다. 마지막 바퀴를 돌자 껍질이 용수철처럼 늘어져 접시 위로 떨어졌다.

회장이 그 껍질을 보고 있었다. 하윤의 얼굴이 아니라 껍질을. 하윤은 알맹이 한 쪽을 떼어 그의 손바닥에 놓았다.

“아부지, 귤.”

회장은 귤을 입에 넣고 오래 씹었다.

설거지가 끝나자 정숙이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1987년 이 집에 들인 그랜드피아노였다. 건반 끝이 상아색으로 바래 있었다.

“유진아, 아부지 좋아하시는 거.”

하윤은 의자에 앉았다. 등 뒤에서 휠체어 바퀴 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멈췄다. 첫 소절은 쉬웠다. 손이 연습실의 건반을 기억했다. 스무 마디, 스물한 마디. 하윤은 숨을 들이쉬었다. 23마디에서 왼손이 한 칸 옆을 짚었다. 탁한 소리가 거실에 퍼졌다. 하윤은 멈추지 않고 이어 갔다. 유진은 멈추지 않았다고 했다.

곡이 끝났다. 뒤에서 손뼉 소리가 났다. 느리고 커다란 손이 맞부딪치는 소리였다. 회장은 하윤이 돌아볼 때까지 손뼉을 쳤다. 정숙은 피아노 옆에 서서 눈을 감고 있었다.


밤 열한 시. 유진의 침대는 하윤에게 조금 길었다. 발끝에 남는 자리가 있었다.

시트에서는 새 냄새가 났는데 베개에서는 아니었다. 정숙은 시트를 갈면서 베갯잇은 갈지 않았다. 하윤은 그 베개를 침대 끝으로 밀어 두고 자기 겉옷을 접어 머리 밑에 받쳤다. 남의 냄새 위에서 자는 일에는 익숙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래층은 조용했다. 가끔 마영순이 복도를 지나가는 슬리퍼 소리가 났다. 두 시간에 한 번쯤. 하윤은 휴대폰 불빛 아래서 노트를 폈다.

오규식. 실명을 두 번 부름. 일부러. 간병인과 눈인사. 차민혁. 아버지에게 존댓말. 3초 보고 끝. 소견서를 끝까지 읽음(처음 읽는 척). 회장. 귤 껍질을 봄. 얼굴 말고 껍질을.

마지막 줄 끝에 물음표를 그리려다 말았다. 치매 환자가 무엇을 보는지에 이유를 붙이는 건 대행이 할 일이 아니었다. 하윤은 노트를 덮고 불을 껐다. 선반 위에 엎어 둔 액자의 검은 등판이 창빛에 희미하게 떠 있었다. 하윤은 돌아누웠다.


일요일 아침, 하윤은 계단을 내려가다 멈췄다. 정숙이 피아노 뚜껑을 열고 흰 융으로 건반을 한 개씩 닦고 있었다. 낮은 음부터 높은 음까지. 소리가 나지 않게 아주 살살. 다 닦고 나서도 뚜껑을 닫지 않았다.

오전에 하윤은 휠체어를 밀고 성북동 골목을 걸었다. 마영순이 다섯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담장마다 담쟁이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비탈이 가팔라 하윤은 손잡이에 체중을 실었다.

두 번째 모퉁이에서 오래된 주택 하나가 헐리고 있었다. 가림막 틈으로 굴착기 팔이 보였고, 트럭 짐칸에서 인부 둘이 녹슨 철근을 내리고 있었다. 철근끼리 부딪는 소리가 골목 끝까지 울렸다. 회장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하윤은 걸음을 빨리했다. 바퀴가 보도블록 턱에 걸려 휠체어가 덜컹했다. 마영순이 “천천히유” 했다. 하윤은 사과하고, 가림막이 끝날 때까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어무이.”

회장이 말했다. 고개가 높은 담장 위로 들려 있었다.

“어무이 어데 갔노.”

하윤은 인터뷰에서 할머니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금지 화제에도 없었다. 휠체어를 세우고 그 앞으로 돌아가 쪼그려 앉았다. 담요 끝을 그의 무릎 밑으로 다시 넣었다.

“할머니 집에 계셔, 아부지. 우리도 집에 가자. 그치?”

“어무이가 밥 차려 놨다.”

“응. 밥 차려 놨대. 식기 전에 가자.”

회장의 턱이 한 번 아래로 움직였다. 마영순이 뒤에서 아무 말 없이 하윤을 봤다. 하윤은 휠체어를 돌렸다. 내리막이었다. 손잡이를 꽉 쥐었다.


오후 다섯 시 사십 분. 정숙은 부엌에서 하윤에게 싸 줄 반찬을 통에 담고 있었다. 마영순이 회장의 저녁 약을 가지러 안방으로 갔다.

거실에 둘만 남았다. 하윤은 휠체어 옆에 서서 가방끈을 어깨에 걸었다.

“아부지, 나 갈게. 다음 주에 또 올게.”

회장의 손이 올라왔다.

손목이 잡혔다. 하윤은 처음에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담요 위에서 귤 한 쪽을 받아 들던 손, 차갑고 마른 손. 그 손이 지금 하윤의 손목뼈를 정확히 감싸고 있었다. 엄지가 맥 짚는 자리를 눌렀다. 하윤이 팔을 당겼지만 손은 꿈쩍하지 않았다. 휠체어에 앉은 일흔두 살의 손아귀가 아니었다.

회장이 손목을 끌어당겼다. 하윤의 몸이 반쯤 숙여졌다. 그의 입술이 귀에 닿을 만큼 가까웠다. 숨에서 귤 냄새가 났다.

“넌 우리 유진이가 아니구나.”

목소리는 쉬지 않았다. 낮고 분명했다.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손이 풀렸다.

마영순이 약 접시와 물컵을 들고 나왔다. 회장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입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그가 다시 쉰 목소리로 말했다.

“리야드는 모래가 밀가루 같았다. 밀가루 같았어. 유진아, 손으로 쥐면 다 빠져나가.”

“네, 회장님. 약 드셔야지유.”

하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숙이 부엌에서 반찬 통 세 개를 쇼핑백에 담아 들고 나왔다. “다음 주에 봐요, 유진아.” 하윤은 쇼핑백을 받았다. 고맙다고 말했다. 자기 목소리로 했는지 유진의 목소리로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철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골목에 가로등이 막 켜졌다.

하윤은 가로등 아래서 카디건 소매를 걷었다. 손목 안쪽에 붉은 자국이 네 줄 나 있었다. 바깥쪽에 엄지 자리 하나.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가 따로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