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 · 1장 하객
대행 · 도해

1장 하객

서울 강남구 웨딩홀, 2026년 9월 5일 토요일
약 15분

신부대기실 앞 복도는 꽃 냄새가 너무 진했다. 서하윤은 그 냄새를 맡으며 배역 노트를 마지막으로 펼쳤다.

이수빈. 신부 대학 동기. 경영학과 15학번. 기숙사 같은 층(B동 4층). 공통 기억: ① 1학년 가을 MT 때 세희가 버스에서 멀미함. ② 시험 기간 새벽 2시 컵라면(세희는 뚜껑을 반만 뗌). ③ 졸업 사진 찍는 날 세희가 학사모를 거꾸로 씀. 세희를 부르는 법: “세희야” 말고 “진세”. 성까지 붙여 부르는 건 둘만의 장난. 금지: 가족 이야기. 세희는 보육원 출신. 묻지 말 것.

하윤은 마지막 줄을 손톱으로 한 번 눌렀다. 묻지 말 것. 배역의 절반은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무엇을 말하지 않느냐로 정해졌다.

“누나, 립스틱.”

정빈이 자기 입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윤은 휴대폰 화면에 얼굴을 비춰 보고 아랫입술 가장자리를 엄지로 닦았다. 정빈은 오늘 신부의 ‘대학 선배’였다. 그는 이 업계 4년 차였고, 하객 대행이라면 한 달에 열 번도 넘게 뛰었다. 결혼식장에 들어서면 그는 진짜로 기쁜 사람이 되었다. 하윤은 그게 늘 신기했다.

“수빈아, 너 오늘 말 많이 하지 마. 너 원래 말 없잖아.” 정빈이 배역의 이름으로 말했다.

“선배나 말 줄이세요.”

“나는 선배라서 말이 많아도 돼.”

복도 끝에서 문숙자가 손을 흔들었다. 신부 측 ‘이모’였다. 예순셋, 분홍 한복. 전직 라디오 성우로 엄마 역할과 이모 역할의 일인자였고, 오늘은 패밀리에서 온 하객 여섯 명의 조장이기도 했다. 다가오더니 하윤의 카디건 단추 하나를 고쳐 채웠다.

“신부가 들어오래. 동기는 너 하나니까 너만.”

하윤은 노트를 핸드백 안주머니에 넣었다. 검은 몰스킨, 다섯 권째였다. 숨을 한 번 내쉬고 대기실 문을 열었다.


진세희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서른한 살. 사전 인터뷰 때 봤던 얼굴보다 화장이 두꺼웠고, 그 두께만큼 긴장해 있었다. 사진기사가 나가자 세희는 어깨에서 힘을 뺐다.

“진세.”

하윤이 부르자 세희가 웃었다. 웃음이 반 박자 늦었다. 그건 세희의 잘못이 아니었다. 오늘 처음 보는 ‘친구’를 반가워해야 하는 자리였으니까. 하윤은 그 반 박자를 메우려고 먼저 다가가 손을 잡았다.

“학사모 거꾸로 쓰지 말고.”

“야.” 세희가 진짜로 웃었다. “그거 언제 적 얘기야.”

“7년? 8년?”

인터뷰에서 들은 기억이었지만 하윤은 그 장면을 이미 머릿속에 그려 두었다. 3월의 운동장, 바람, 거꾸로 쓴 학사모, 웃음을 참는 사진기사. 남의 기억을 빌릴 때는 늘 날씨부터 만들었다. 날씨가 있어야 기억이 진짜처럼 굴었다.

세희의 손은 차가웠다. 하윤은 그 손을 쥔 채 세희가 말하는 순서를 들었다. 오늘 하객은 몇 명 오는지, 신랑 쪽은 몇 명인지, 사회는 누가 보는지. 신부는 결혼식 날 이런 걸 말하지 않는다. 신부는 보통 드레스 얘기를 하고, 지난밤 못 잔 얘기를 하고, 엄마 얘기를 한다. 세희에게는 그 마지막 이야기가 없었다. 그래서 숫자를 말했다.

“신랑 쪽은 아버님이랑 친척분들 서른 명쯤 오신대. 어머님은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아버님 좋으셔?”

“응. 말씀이 별로 없으신데 좋으셔. 지난주에 처음 뵀어.”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식 일주일 전에 시아버지를 처음 만났다. 그 문장은 노트에 적지 않고 머릿속 한쪽에 접어 두었다.


예식홀은 하얀 장미와 유칼립투스로 꾸며져 있었다. 하윤은 신부 측 셋째 줄에 앉았다. 오른쪽에 정빈, 왼쪽에 패밀리의 하객 둘. 그 너머로 신부 측 하객이 스무 명 남짓. 패밀리에서 온 여섯을 빼면 진짜는 몇이나 될까. 하윤은 그런 계산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눈이 먼저 했다. 축의금 봉투를 낼 때 이름을 쓰다가 멈칫하는 사람, 신부 이름을 사회자가 부를 때 반 박자 늦게 박수 치는 사람. 셋을 더 찾았다. 다른 업체였다.

괜찮았다. 가족이 없는 신부가 하객을 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윤은 이 일을 하면서 그런 결혼식에 수십 번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걸 부끄러워했지만 하윤은 그 부끄러움이 이해되지 않았다. 결혼식은 원래 연극이었다. 누가 객석을 채우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신랑 측 혼주석이 보였다.

남승우는 서른다섯이라고 했다. 키가 크고, 웃을 때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갔다. 그 옆 혼주석에 앉은 아버지는 회색 머리를 단정하게 넘겼고, 한복 대신 짙은 회색 양복을 입었다. 예순 중반. 손을 무릎 위에 포개고 앉은 자세가 꼿꼿했다.

하윤은 그 자세를 어디서 본 것 같았다.

사회자가 혼주 인사를 청했다. 신랑 아버지가 일어나 마이크 앞에 섰다. 그는 목을 한 번 가다듬고, 메모 없이 말을 시작했다.

“바쁘신 가운데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해 주러 와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두 사람이 걸어갈 길에 꽃만 있지는 않겠지만,”

하윤의 등이 의자 등받이에서 떨어졌다.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다면 어떤 길도 꽃길이 될 거라 믿습니다.”

그 문장을 하윤은 정확히 세 번 들은 적이 있었다. 두 번은 결혼식에서, 한 번은 칠순 잔치에서. 세 번 다 같은 업체였다. 명가대행. 망원동 패밀리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사무실을 둔, 이 바닥에서 제일 오래된 회사. 그 회사의 혼주 축사 템플릿 3번 문장이었다. 그 회사 사람들끼리는 ‘꽃길 3번’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문장을 가장 잘 읽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하윤은 알았다.

조만수. 명가대행 20년 차, 아버지 전문. 하윤은 그와 장례식장에서 두 번 마주쳤다. 한 번은 그가 고인의 형으로, 한 번은 고인의 오랜 친구로 왔다. 두 번 다 그는 영정 앞에서 정확히 같은 시간만큼 고개를 숙였다. 7초. 하윤은 그 7초를 기억했다.

지금 신랑 아버지가 축사를 마치고 하객들에게 허리를 굽혔다. 하윤은 속으로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그는 고개를 들었다.


“선배.”

하윤은 정빈의 팔꿈치를 건드렸다. 정빈은 박수를 치고 있었다. 진짜로 기쁜 얼굴로.

“신랑 아버지 봐요.”

“좋으신 분 같네.”

“조만수 선생님이에요. 명가.”

정빈의 박수가 한 박자 늦어졌다. 그는 박수를 멈추지 않은 채 고개를 아주 조금 돌렸다. 그리고 다시 웃었다. 얼굴은 웃는데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 씨. 맞네.”

“신랑 쪽도 사 온 거예요.”

“그럴 수도 있지. 신랑도 집안 사정이 있겠지.”

그럴 수도 있었다. 하윤도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그런데 눈이 계속 단서를 줍고 있었다.

첫째, 손. 조만수는 무릎 위에 두 손을 포갰는데 오른손이 위였다. 오른손 약지에 반지 자국이 있었다. 피부가 띠처럼 하얗게 눌린 자국. 반지는 지금 빼고 없었다. 평소에 반지를 오른손에 끼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사전 인터뷰에서 세희는 시아버지가 상처(喪妻)한 지 5년이라고 했다. 아내를 잃은 남자가 결혼반지를 계속 낀다면 왼손에 낀다. 오른손 약지에 반지를 끼는 사람은 대개 다른 이유가 있다. 조만수에게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 배역이 없는 날엔 오른손에 큼직한 금반지를 꼈다. 장례식장에서 본 반지였다.

둘째, 방명록. 하윤은 식 시작 전 신랑 측 방명록 앞을 지나며 일부러 걸음을 늦췄다. 서른 명 가까운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필체는 네 가지뿐이었다. 하객 대행을 쓰면 방명록은 보통 한두 사람이 몰아서 쓴다. 신부 측 방명록도 그랬다. 문숙자가 세 가지 필체로 열 명을 썼으니까.

셋째는 방금 일어났다. 축사를 마치고 돌아온 조만수에게 신랑 남승우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하윤은 입 모양을 읽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아들은 아버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식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15분이 남아 있었다. 사회자가 리허설 마이크를 두드렸다. 하윤은 일어났다.

“어디 가?” 정빈이 물었다.

“화장실.”

“누나.”

정빈의 목소리가 배역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하윤의 손목을 아주 가볍게 잡았다가 놓았다.

“사장님이 뭐라고 할지 알지.”

알았다. 역할 밖으로 나가지 마라. 강도석 사장은 그 말을 하루에 한 번은 했다. 패밀리에 입사한 첫날에도, 하객 대행 오십 번째 날에도. 대행은 남의 이야기에 들어가는 일이다. 들어가서 그 이야기를 바꾸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객석이다, 무대가 아니다.

하윤에게는 그 말이 편했다. 2021년 봄, 대학로 소극장에서 처음 주연을 맡았다. 첫날 무대 한가운데서 대사를 잃었고, 막이 중간에 내려왔다. 그 뒤로 하윤은 객석 쪽에만 앉았다.

신부 측 첫 줄의 문숙자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무릎 위의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가 접었다. 문숙자식 신호였다. 조심해.

하윤은 로비로 나갔다. 신부대기실 앞에는 웨딩플래너와 사진기사가 서 있었다. 하윤은 걸음을 늦추지 않고 웃으며 지나갔다. 수빈은 신부의 가장 친한 동기였다. 신부대기실을 마지막으로 들르는 건 수빈다운 일이었다.

“진세, 나 잠깐만.”

세희가 거울 속에서 고개를 돌렸다. 하윤은 문을 닫았다.

“왜? 무슨 일 있어?”

하윤은 세희 앞에 쪼그려 앉았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하얗게 퍼져 있었다. 세희의 차가운 손을 다시 잡고, 수빈의 말투로 시작했다.

“진세, 너 보증금 승우 씨 계좌로 보냈다며. 이모가 그러던데.”

“응. 지난주에. 신혼집 계약을 승우 씨 명의로 해서.” 세희가 웃었다. “왜, 너도 이모처럼 걱정돼?”

“얼마였지?”

“3억.” 세희의 웃음이 조금 작아졌다. “아빠 돈이야. 그건 알지?”

하윤은 알았다. 세희의 아버지는 세희가 다섯 살 때 공사장에서 떨어져 죽었다. 산재 보상금은 세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신탁에 묶여 있었고, 세희는 그 돈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사전 인터뷰 때 하윤은 그 대목에서 볼펜을 한 번 놓쳤다. 이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윤은 숨을 한 번 쉬었다. 그리고 말투를 바꿨다. 수빈의 말투를 내려놓고, 자기 목소리로.

“세희 씨.”

세희의 눈이 커졌다.

“저 수빈 아니에요. 아시죠. 세희 씨가 저희 회사에 의뢰하셨어요. 그리고 저쪽 아버님도 아버님이 아니에요.”


그다음 10분은 빨랐다.

세희는 처음엔 웃었다. 그다음엔 화를 냈다. 당신이 뭘 아느냐고, 당신 같은 사람이 왜 남의 결혼식을 망치느냐고. 하윤은 아무것도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단서 세 가지를 순서대로 말했다. 꽃길 3번, 오른손 약지, 선생님.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를 덧붙였다.

“신랑 쪽 아버님 성함 아세요?”

“남, 남기섭 씨.”

“주민등록등본 보셨어요? 혼인신고는요?”

세희가 말을 멈췄다. 띄엄띄엄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혼인신고는 식 끝나고 다음 주에 같이 하기로 했다. 등본은 본 적이 없다. 신혼집 계약서는 승우가 가져와서 사진만 봤다.

“제가 틀렸으면 제가 대행료 물어 드릴게요. 회사 대신 제가요. 근데 한 사람만 불러서 확인해 보세요. 저쪽 아버님한테, 아드님 초등학교 이름이 뭐냐고만 물어보세요.”

세희가 웨딩플래너를 불렀다. 웨딩플래너가 신랑 측 대기실로 갔다가 5분 뒤 조만수를 데려왔다. 하윤은 대기실 구석, 드레스 행거 옆에 섰다. 조만수가 들어왔다. 그는 세희를 보고 정중하게 웃었고, 구석의 하윤을 보고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20년 차였다.

“아버님.” 세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승우 씨 초등학교 어디 나왔어요?”

조만수는 3초 동안 세희를 보다가, 하윤에게 눈을 옮겼다가, 다시 세희에게 돌아왔다.

“그건 승우한테 물어보시는 게 낫겠습니다.”

그 대답이 답이었다. 세희의 손에서 부케가 떨어졌다.

조만수는 대기실을 나가면서 하윤 옆을 지났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낮게 말했다. 장례식장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 고인의 형 목소리 그대로였다.

“서 선생. 우리끼리는 이러면 안 되지.”

하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만수는 문을 열고 나갔고, 그 문틈으로 로비가 보였다. 신랑 남승우가 휴대폰을 귀에 대고 비상계단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걸음이 빨랐다.


결혼식은 열리지 않았다.

세희는 웨딩플래너와 함께 은행에 전화했다. 토요일 오후였다. 지급정지 신청은 112를 거쳐야 했고, 그건 세희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하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였다. 신랑 측 하객 서른 명은 1시 반이 되기 전에 모두 사라졌다. 신부 측 하객도 하나둘 사라졌다. 패밀리의 여섯 명은 마지막까지 남았다. 문숙자가 그렇게 정했다. 신부가 혼자 남는 건 안 된다고.

세희는 대기실을 나서기 전에 하윤을 한 번 돌아봤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윤도 기대하지 않았다. 세희가 말했다.

“수빈이라는 이름, 누가 지었어요?”

“제가요.”

“좋은 이름이네요.” 세희가 말했다. “진짜 친구였으면 좋았을 텐데.”


웨딩홀 지하 주차장에 검은 쏘나타가 서 있었다. 운전석 창문이 반쯤 내려가 있었고, 그 틈으로 라이터 켜는 소리가 들렸다. 켰다, 껐다, 켰다, 껐다. 강도석은 담배를 끊은 지 2년이 됐는데 그것만은 버리지 못했다.

하윤은 조수석에 탔다. 도석은 앞만 보고 있었다. 쉰넷, 짧게 깎은 반백의 머리, 형사 시절부터 입었다는 회색 점퍼. 그는 시동을 걸지 않았다.

“숙자 누나한테 들었다.”

“네.”

“대행료 못 받는다. 하객 여섯에 신부 동기 특급까지, 270.”

“제가 물어낼게요.”

“네가 왜 물어내.”

“제가 나갔으니까요.”

도석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하윤의 얼굴을 오래 봤다. 형사의 눈이었다. 상대가 무엇을 숨기는지보다 상대가 무엇을 숨기지 못하는지를 보는 눈.

“역할 밖으로 나가지 마라.”

“알아요.”

“아는데 왜 나가.”

“신부가 3억을 보냈대요. 아버지 산재 보상금이요.”

도석의 손이 라이터 위에서 멈췄다. 아주 잠깐이었다. 하윤은 그걸 봤지만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우리는 객석이다.” 도석이 말했다. “객석에서 일어나서 무대로 올라가면, 그다음부터는 네 이야기가 된다. 남의 이야기 대신 네 이야기를 책임져야 돼. 그거 무거운 거다.”

“알아요.”

“알기는 뭘 알아.”

그는 시동을 걸었다. 차가 주차장 경사로를 올라갔다. 9월 초의 햇빛이 앞유리에 쏟아졌다. 하윤은 눈을 감았다. 신부의 차가운 손이 아직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밥 먹었냐.”

“아뇨.”

“국밥.”

“사장님 또 국밥이에요?”

“싫으면 내려.”

하윤은 내리지 않았다. 도석은 신촌의 오래된 순댓국집에 차를 세웠다. 수저를 하윤 앞에 먼저 놓고, 깍두기를 밀어 주고, 그러는 내내 명가대행 놈들을 흉봤다. 저 회사는 축사 문장을 20년째 안 바꾼다느니. 도석의 욕은 늘 위로처럼 들렸다.

“270은 내가 깐다.” 그가 마지막에 말했다. “대신 다음에도 나가면, 그땐 네가 까.”


9월 7일 월요일, 망원동 패밀리 사무실

패밀리는 망원시장에서 한 골목 들어간 상가 2층에 있었다. 1층은 떡집이었고, 계단을 올라가면 참기름 냄새와 헤어스프레이 냄새가 섞였다. 문을 열면 의상실이 먼저 보였다. 행거 네 줄에 상복, 정장, 한복, 교복까지 걸려 있었다. 그 안쪽이 사무실이었다. 책상 넷, 화이트보드 하나, 벽 한 면을 차지한 축의금 봉투 상자.

화이트보드에는 이번 주 일정이 빼곡했다. 하객, 조문, 병원 동행, 애인. 토요일 칸만 비어 있었다.

“누나, 들었어?” 정빈이 회전의자를 돌리며 말했다. “그 신랑 새끼 어제 잡혔대. 김포공항에서.”

“누가 그래?”

“숙자 쌤 친구의 딸의 남편이 경찰이래.”

“그건 거의 안 아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믿을 만하지. 아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잖아.”

문숙자가 자기 책상에서 장부를 넘기며 웃었다. 이 사무실의 실장이었다. 예약, 장부, 의상, 그리고 가끔 목소리를 바꾼 전화 대행. 라디오 드라마에서 30년 동안 남의 엄마를 했다고 했다. 이제는 진짜 남의 엄마를 한다고.

“하윤아, 사장님이 들어오래.”

사무실 안쪽, 유리문으로 막은 두 평짜리 방이 도석의 방이었다. 하윤이 들어가자 도석은 의자를 가리켰다. 그 맞은편에 누군가 먼저 앉아 있었다.

예순 후반의 여자였다. 회색 코트를 무릎 위에 접어 놓고, 손을 그 위에 포개고 있었다. 머리는 하얗게 셌는데 염색하지 않았고, 짧게 잘랐다. 손가락이 길었다. 손톱은 짧게 깎았다. 하윤은 그 손을 보고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정숙 님이시다.” 도석이 말했다. “장기 의뢰다.”

정숙의 눈이 하윤에게 왔다. 위아래로 훑는 눈이 아니었다. 얼굴 한가운데, 턱선에 오래 머물렀다. 하윤은 그 시선이 익숙했다. 사람들은 대행을 고를 때 얼굴을 산다. 그런데 이 시선은 조금 달랐다. 고르는 눈이 아니라 확인하는 눈이었다.

“닮았네요.” 정숙이 말했다. 혼잣말처럼.

도석이 서류철을 하윤 쪽으로 밀었다. 의뢰서, 그리고 대학병원 신경과 교수의 소견서 사본 한 장.

“남편분이 2년 전부터 알츠하이머를 앓으신다. 따님이 3년 전에 집을 나가서 연락이 끊겼고. 남편분이 따님을 찾으면서 상태가 나빠진다고, 주치의가 가족 역할 치료를 권했다. 비슷한 사람이 따님 역할로 주기적으로 찾아오면 정서가 안정된다는 거지.”

하윤은 소견서를 읽었다. 진단명, 인지 검사 점수, 그리고 마지막 단락. ‘환자가 지속적으로 실종된 딸을 찾으며 야간 배회와 정서 불안이 심화됨. 보호자 동의 하에 가족 역할 치료(대리 가족 방문)를 시도해 볼 만함.’ 서명 이태준.

“매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일요일 저녁 6시까지.” 도석이 말했다. “1박 2일. 회당 80.”

80만 원. 하윤의 한 달 수입의 3분의 1이었다. 화이트보드의 토요일 칸이 왜 비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사진 있나요?”

정숙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하윤은 받았다. 서른 즈음의 여자가 어느 정원 벤치에 앉아 웃고 있었다. 어깨까지 오는 머리, 남색 카디건, 왼손에 든 귤. 웃을 때 입보다 눈이 먼저 움직이는 얼굴이었다. 턱선이, 그래, 하윤과 닮았다. 거울로 볼 때의 자기 턱이 아니라, 남이 찍은 사진 속에서 가끔 낯설게 보이던 자기 턱.

“차유진이에요.” 정숙이 말했다. “우리 막내.”

하윤은 의뢰서를 넘겼다. 의뢰인 한정숙. 방문지 서울 성북구 성북동. 그리고 가족 관계 칸. 남편, 차성근.

하윤의 손가락이 그 칸에서 멈췄다.

멈춘 건 1초도 되지 않았다. 하윤은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집 구조, 함께 사는 사람(상주 간병인 마영순), 금지 화제(따님의 실종 경위, 회사 이야기). 하윤은 그 장을 끝까지 읽었다. 읽는 동안 첫 장의 이름으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돌아가지 않으려고 손바닥으로 그 장의 모서리를 눌러 두었다.

도석의 시선이 옆얼굴에 와 닿았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할게요.” 하윤이 말했다.

“조건 안 물어봐?”

“사장님이 정한 조건이면 괜찮아요.”

도석은 라이터를 꺼내 책상 위에 세웠다. 쓰러지지 않게 손가락으로 잡고 있었다. 정숙이 코트를 들고 일어났다.

“사전 인터뷰는 목요일에 해요. 그 애 녹음이 몇 개 있어요. 노래방에서 찍은 거, 생일 축하 영상. 옷은 그 애 걸 보낼게요. 크기가 맞을 거예요.”

“네.”

정숙은 문손잡이를 잡은 채 서 있었다. 그리고 돌아서지 않은 채 말했다.

“그 애는 귤을 한 줄로 깠어요. 꼭지에서 시작해서 껍질이 안 끊기게. 끊기면 다시 깠고. 버리고 새 귤로.”

정숙이 나갔다. 문 너머에서 문숙자가 배웅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떡집 앞에서 멀어졌다.

하윤은 핸드백에서 검은 노트를 꺼내 새 장을 펼쳤다. 그리고 맨 위에 적었다.

차유진. 귤: 한 줄. 끊기면 버리고 새 귤.

그 아래에 무언가를 더 적으려다, 볼펜을 노트 사이에 끼우고 덮었다.

도석이 손가락을 떼자 라이터가 책상 위에서 한 번 굴러 그의 손에 부딪혔다.

“하윤아.”

“네.”

“이번 건은 길다. 몇 달이 될 수도 있다.” 그는 말을 골랐다. “힘들면 말해라.”

“사장님이 그런 말도 해요?”

“싫으면 말고.”

하윤은 웃었다. 도석은 웃지 않았다. 그는 의자를 돌려 창밖을 향했다. 망원시장의 오후, 그 너머로 한강 쪽 하늘. 그의 얼굴이 이상하게 늙어 보였다. 하윤은 그 얼굴을 노트에 적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사장님은 배역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때 하윤은 그렇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