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 · 19장 증인석
대행 · 도해

19장 증인석

서울 대학병원 신경외과 병동, 2026년 11월 16일 월요일
성년후견 심문기일 D-29
약 14분

오전 10시, 유진이 휴대폰 화면을 하윤 쪽으로 돌렸다.

고지석 변호사의 문자였다. ‘공판절차 재개 신청서, 오늘 09:40 평택지원 접수 완료.’ 문장 끝에 마침표까지 찍혀 있었다.

정숙은 자고 있었다. 머리의 붕대가 얇아졌고, 이불 위에 놓인 손가락이 가끔 무언가를 누르듯 움직였다. 유진은 그 손가락을 보다가 휴대폰을 엎었다. 유진은 토요일 밤부터 병원에 있었다. 보호자 침대에서 잤고, 세수는 병동 화장실에서 했다. 강릉에서 메고 온 배낭 하나가 전부였다.

“아부지가 오늘 아침에 나한테 물었어요. 신청서 문장 어떠냐고.” 유진이 말했다. “내가 고 변호사님 문장은 원래 다 마침표까지 정확하다고 했더니, 그게 아니라 당신이 쓴 문장 말이래요. 첨부한 진술서.”

“뭐라고 썼는데요?”

“‘본인은 2024년 3월 이후 인지 장애를 가장하였음.’ 한 줄.”

하윤은 그 문장의 어미를 들었다. 가장하였음. 한 것으로 한다가 아니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처음으로 아부지 문장이 맞다고 했어요.” 유진이 엎어 둔 휴대폰을 다시 뒤집었다. “3년 만에 처음 한 대화가 문장 검토예요. 우리 집은 원래 그래요.”


11월 25일 수요일, 신경과 외래 진료실.

이태준 교수가 하윤을 불렀다. 법원이 재개 여부를 정하기 전에 주치의 의견을 다시 들어야 했고, 이태준은 그 의견서를 쓰기 전에 ‘가족 역할 치료’에 참여한 사람의 말을 듣겠다고 했다. 자기가 권한 치료였으니까. 소견서에 서명한 사람이 자기였으니까.

진료실은 좁았다. 책상, 모니터, 진찰대, 벽에 붙은 뇌 단면 그림. 회장은 휠체어 없이 들어와 환자 의자에 앉았다. 하윤은 문 옆 보호자 의자에 앉았다. 이태준은 예순이었다. 안경을 이마로 올렸다. 2년 8개월 동안 석 달에 한 번 마주 앉은 얼굴이 그 앞에 있었다.

“시계를 그려 주시겠습니까. 11시 10분으로.”

종이 한 장과 연필이 회장 앞에 놓였다. 하윤은 그 종이를 보며 숨을 참았다. 왜 참는지 몰랐다.

회장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한 번에, 끊김 없이. 그리고 맨 위에 12를 썼다. 그다음 오른쪽 끝에 3, 맨 아래 6, 왼쪽 끝에 9. 네 개의 숫자가 동그라미를 네 칸으로 나눴다. 그 사이에 나머지 숫자들이 고르게 들어갔다. 바늘 둘. 짧은 바늘은 11, 긴 바늘은 2.

12는 꼭대기 제자리에 있었다. 구겨지지 않고, 다른 숫자들과 같은 크기로.

이태준은 종이를 오래 봤다. 서랍을 열고 파일 하나를 꺼냈다. 2024년 3월의 시계, 2024년 9월의 시계, 2025년의 시계 둘, 올해 6월의 시계. 다섯 장 모두 12가 11 옆 구석에 작게 밀려 있었다. 이태준은 새 종이를 그 옆에 놓았다. 여섯 장이 책상 위에 나란히 놓였다.

진료실에 모니터 팬 소리만 났다. 이태준은 안경을 내려 썼다가 다시 올렸다.

“제가 2년 동안 뭘 본 겁니까.”

회장이 대답했다.

“내 어머니를 봤소.”

이태준의 눈이 다섯 장의 시계로 돌아갔다. 구석의 12. 무언가를 기억해 내려는 얼굴이었다.

“어머님은 어느 병원에 다니셨습니까.”

“여기. 3층.”

이태준은 눈을 감았다. 한참 뒤에 떴다. 그는 회장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하윤은 그게 이상했다. 속은 사람은 대개 화부터 낸다. 이태준은 파일을 덮고 하윤 쪽으로 의자를 돌렸다.

“서하윤 씨는 언제 알았습니까.”

“첫 주말에 의심했어요. 확신한 건 9월 27일 새벽 2시요.”

이태준은 그 날짜를 메모지에 적었다. 그리고 하윤에게 물었다. 의사가 아니라 그냥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 치료, 효과는 있었습니까.”

하윤은 회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회장은 책상 위의 시계 여섯 장을 보고 있었다.

“누구한테요?”

이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의견서는 그 주 금요일에 법원으로 갔다. 하윤은 내용을 보지 못했다. 11월 30일, 평택지원은 공판절차를 다시 열기로 결정했다. 첫 기일은 12월 10일 목요일 오후 2시.


권세라 검사의 전화는 결정 다음 날 왔다.

“서하윤 씨, 수원지검 평택지청 권세라입니다. 증인으로 출석해 주셨으면 합니다. 문서를 입수한 경위와, 두 달 동안 본 피고인의 상태.”

목소리가 짧았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도석이 말한 대로였다. 원칙주의자.

“휴대폰에 있는 사진 세 장, 원본 파일로 주세요. 촬영 정보가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미리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권세라가 잠깐 말을 끊었다. “증인은 자기가 처벌받을 수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증언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금고를 연 일도 거기 들어갑니다. 차민혁 씨 측 고소는 아직 살아 있으니까요.”

하윤은 고지석에게서 받은 사본 한 장을 떠올렸다. 11월 20일 회장이 경찰에 낸 진술서. 금고는 본인이 서하윤에게 열어 보라고 한 것임. 문서도 본인이 가져오라고 한 것임. 하윤은 그 진술서를 두 번 읽었다. 두 번째에 알았다. 회장은 또 대신 지고 있었다. 이번엔 하윤의 몫을.

“거부 안 할 거예요.”

“하나 더요. 증언은 대행이 안 됩니다.”

“알아요. 저희 회사 규칙이기도 했어요.”

“그럼 서하윤 씨 이름으로 나오세요.”

전화가 끊겼다. 하윤은 휴대폰을 오래 쥐고 있었다. 10월에 고지석도 같은 말을 했다. 대행 말고 서하윤 씨 본인으로. 그때는 1억이 붙어 있었다. 이번엔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


12월 6일 일요일 밤, 원룸에 정빈과 문숙자가 왔다.

정빈은 편의점 봉투 두 개를 들었고, 문숙자는 패밀리 의상실에서 판사 법복 비슷한 검은 가운을 들고 왔다. 작년 가을 ‘모의 재판 체험’ 행사에 하객으로 나갈 때 산 것이었다. 둘은 하윤의 좁은 방을 법정으로 바꿨다. 책상이 법대, 접이식 의자가 증인석, 침대가 방청석.

“정숙하세요.” 문숙자가 가운을 걸치고 말했다.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내려가 있었다. 라디오에서 30년 동안 판사, 교장, 시어머니를 했다는 목소리. “증인은 앞으로 나오세요.”

정빈은 검사였다. 넥타이를 매고 왔다. “증인, 피고인을 처음 본 게 언제입니까!”

“9월 12일이요.”

“이의 있습니다!”

“검사가 자기 질문에 이의를 왜 해.” 문숙자가 판사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럼 나 변호사도 할게.”

하윤은 웃었다. 10월 27일 이후로 처음 소리 내어 웃었다.

몇 번은 잘됐다. 날짜, 장소, 순서. 하윤은 다 알고 있었다. 노트가 없어도 머릿속에 다 적혀 있었다. 그러다 정빈이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증인, 아버님 성함은요?”

하윤의 입이 열린 채 멈췄다. 정빈이 아차 하는 얼굴을 했다. 문숙자가 가운 소매로 정빈의 뒤통수를 살짝 쳤다. 그리고 판사 목소리를 내려놓고, 문숙자의 목소리로 말했다.

“하윤아. 외워 가지 마.”

“외워야 안 까먹죠.”

“외운 문장은 판사가 알아. 너도 알잖아. 너 그거 맨날 잡아내잖아.” 문숙자가 가운을 벗어 무릎에 접었다. “진짜 사람은 같은 말을 두 번 똑같이 안 해. 막히면 막힌 데서 다시 해. 그게 증언이야. 연기는 막히면 끝이지만.”

문밖에서 소리가 났다. 딸깍. 딸깍. 라이터였다. 켰다, 껐다. 켰다, 껐다. 셋의 고개가 동시에 현관문 쪽으로 돌아갔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났다. 무거운 발소리였다. 천천히 멀어졌다.

“사장님이야.” 정빈이 작게 말했다. “올라올 때부터 계단에 앉아 있었어. 30분.”

하윤은 현관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열지는 않았다.


수원지방법원 평택지원, 2026년 12월 10일 목요일 성년후견 심문기일 D-5

법정은 생각보다 작았다.

방청석 여섯 줄. 하윤은 개정 전까지 맨 뒷줄 끝에 앉아 있었다. 검사석에 권세라. 변호인석에 고지석.

하윤은 방청석을 셌다. 버릇이었다. 둘째 줄에 박용수 씨의 아내 정미란. 검은 패딩, 무릎 위에 영정 사진만 한 크기의 서류 봉투. 그 옆에 응우옌 반 탄의 사촌이라는 젊은 남자와 통역. 셋째 줄에 김정임. 하윤의 어머니. 대전에서 첫차를 탔다. 넷째 줄에 유진과 마영순. 마영순은 돋보기를 목에 걸고 있었다. 다섯째 줄에 정빈과 문숙자. 맨 뒷줄 반대편 끝에 강도석. 점퍼 대신 양복이었다. 라이터는 꺼내지 않았다.

차민혁은 없었다.

2시 정각, 재판부가 들어왔다. 재판장은 쉰 중반의 여자였고, 양옆에 배석판사 둘. 회장은 법정 옆문으로, 걸어서 들어왔다. 회색 양복, 흰 셔츠, 넥타이는 매지 않았다. 고지석이 반 걸음 뒤에 따라왔다. 교도관은 없었다. 회장은 불구속 피고인이었다. 2년 6개월 만에 이 법정에 서는 피고인이었다.

재판장이 공판절차 재개를 알렸다. 진술거부권을 고지했다. 인정신문.

“피고인 이름.”

“차성근.”

“생년월일.”

“1954년 2월 3일.”

“직업.”

“건설 회사 회장이오.”

목소리가 법정 끝까지 갔다. 하윤은 그 목소리를 두 달 동안 들었다. 모래가 밀가루 같았다, 밀가루 같았어. 같은 목에서 나온 소리였다.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재판장이 방청석을 둘러봤다. 피고인신문을 먼저 하겠다고 했다.

“오늘 증인으로 나온 분은 신문을 마칠 때까지 법정 밖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하윤은 통로를 걸어 나갔다. 셋째 줄을 지날 때 어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하윤은 멈추지 않았다. 법정 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복도의 증인 대기석은 철제 의자 넷이었다. 법정 문은 두꺼웠다. 안의 목소리는 웅웅거리는 소리로만 새어 나왔다. 누가 묻고 누가 답하는지도 가려지지 않았다. 하윤은 셌다. 백까지 세고 다시 하나부터. 배역에 들어가기 전 대기실에서 하던 버릇이었다.

안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나중에 들었다. 정빈은 권세라 흉내까지 내 가며 길게, 문숙자는 대사만 짧게, 어머니는 한 줄로 전했다. 셋의 이야기는 순서가 조금씩 달랐다. 대사는 같았다.

피고인은 철근공으로 일을 시작했지요. 그렇소. 1978년 리야드에서. 마흔여덟 해요. 전단보강근이 무엇인지 압니까. 기둥 둘레에 넣는 철근이오. 슬래브가 기둥에 뚫리지 않게 잡아 주는.

30퍼센트를 빼면 어떻게 됩니까.

회장은 거기서 처음 멈췄다고 했다. 정빈은 셋이라고 했고, 문숙자는 둘이라고 했다.

“뚫리오.”

피고인은 그걸 알고 지시했습니까. 원가절감은 내가 지시했소. 질문에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알고 지시했습니까. 내가 지시했소. 결재란은 왜 비어 있습니까. 말로 했소. 종이에 쓸 거 없었소.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3월 초. 회장실. 민혁이한테.

“지시서 원본이 있습니까.”

“없소.”

고지석은 움직이지 않았다고 문숙자가 말했다. 고지석의 신문은 짧았다. 피고인의 연령, 건강, 유족에게 매달 송금해 온 사실. 회장은 송금 액수를 묻자 숫자로 답했다. 300만 원, 세 집, 마흔두 번. 둘째 줄에서 정미란이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가 전한 건 그 대목 하나였다. “마흔두 번이라더라. 나는 서른아홉 번 받았는데.”


“증인 서하윤 씨, 들어오세요.”

실무관이 문을 열었다. 하윤은 방청석 사이 통로를 걸었다. 여섯 줄. 무대까지의 거리를 발로 셌다. 증인석은 법대 앞 가운데, 피고인석과 검사석 사이에 있었다. 작은 책상, 마이크 하나, 선서서 한 장.

피고인석을 지나며 하윤은 회장의 양복 왼쪽 가슴을 봤다. 11월 14일 밤, 그가 종이를 반으로 접어 카디건 안주머니에 넣던 손을 기억했다. 거기에 있는지 없는지, 하윤은 알 수 없었다.

“증인은 선서서를 읽으십시오.”

하윤은 종이를 들었다. 읽는 건 쉬웠다. 남이 쓴 문장이었다.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숨김과 보탬이 없이. 하윤은 그 말을 입 밖에 내며 생각했다. 자기 직업은 숨김과 보탬이었다. 수빈, 유진, 누나, 국밥집 딸. 서명란에 서하윤이라고 썼다. 손이 한 획도 떨리지 않았다.

자리에 앉았다. 마이크 높이를 맞췄다. 권세라가 첫 질문을 했다.

“증인은 피고인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하윤은 고개를 들었다.

법정이 한눈에 들어왔다. 법대, 방청석 여섯 줄, 그 위의 조명. 객석이었다. 그리고 셋째 줄에 어머니가 있었다.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개고, 하윤을 보고 있었다.

2021년 4월. 대학로 소극장. 셋째 줄.

입이 열린 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대사가 하얗게 지워졌다. 귀에서 피 도는 소리가 났다. 하윤은 셌다. 다른 걸 할 수 없어서 셌다. 조만수가 영정 앞에서 고개를 숙이던 시간.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증인?” 재판장이 물었다. “질문을 다시 들려 드릴까요?”

어머니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일어서지도 않았다. 그냥 계속 보고 있었다. 막이 내려가지 않았다. 여기는 막이 없었다.

하윤은 배역 노트를 펼치지 않았다. 노트는 망원동 도석의 책상 위에 있었다. 대신 자기 기억을 열었다. 날씨부터 만들 필요가 없었다. 날씨는 이미 있었다.

“아니요. 들었어요.” 하윤이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떨리는 채로 계속했다. “저는 역할대행 일을 해요. 남의 가족을 연기하는 일이요. 올해 9월부터 주말마다 피고인 댁에 피고인의 딸로 갔어요. 돈을 받고요. 회당 80만 원이었어요.”

권세라가 질문을 이었다. 하윤은 답했다. 9월 27일 새벽 2시 19분, 정원에 서 있던 피고인. 10월 3일, 피고인이 휠체어에서 등을 펴고 한 말. 매달 12일 피고인이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것. 그날 오후에 오던 은행 알림.

“금고는 어떻게 열었습니까.”

“비밀번호를 짐작했어요. 매달 12일에 점심을 안 드시니까. 그게 시작된 게 2023년 여름이니까. 그 전의 12일을 찾았어요.” 하윤은 숨을 한 번 쉬었다. “230512요.”

둘째 줄에서 정미란의 손이 서류 봉투를 쥐었다. 통역이 응우옌 씨의 사촌 귀에 숫자를 옮겼다. 사촌이 고개를 들어 피고인석을 봤다. 회장은 앞만 보고 있었다.

“피고인이 열어 보라고 시켰습니까.”

“아니요.”

고지석이 고개를 들었다.

“피고인이 경찰에 낸 진술서에는 그렇게 쓰여 있어요.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아무도 안 시켰어요. 제가 열었어요. 제 뜻으로요.”

회장이 처음으로 하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권세라가 법정 모니터에 사진 한 장을 띄웠다. 하윤이 11월 7일 밤 11시 8분에 찍은 세 장 가운데 세 번째. 결재란 옆 여백, 파란 잉크.

“증인, 이 부분을 읽어 주시겠습니까.”

모니터 속 손글씨가 크게 번져 보였다.

“이 건은 내가 지시한 것으로 한다. 2023년 5월 14일. 차성근.”

목소리가 갈라졌다. 마지막 이름에서 특히. 하윤은 그 이름이 의뢰서 위에서 자기 손가락을 멈추게 했던 날을 기억했다.

“한 번 더 읽어 주시겠습니까. 천천히.”

하윤은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문장을 따라가지 않고 문장을 봤다. 대본을 처음 받으면 늘 하던 일이었다. 이 사람은 왜 이 말을 이 끝으로 맺는가. 성북동 식탁에서 입에 붙지 않던 한 줄이, 이제 무엇이 걸렸는지 말해 주었다.

“이 건은 내가 지시한 것으로, 한다.”

하윤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재판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재판장님. 저는 대본 읽는 일을 해요. 대사는 끝이 다 말해 줘요. ‘내가 지시했다’는 지시한 사람이 쓰는 문장이에요. 그런데 이건 ‘내가 지시한 것으로 한다’예요. 그렇게 정한다는 말이에요. 이미 한 일은 정할 필요가 없어요.”

“이의 있습니다.” 고지석이 일어섰다. “증인의 의견입니다.”

재판장의 눈이 하윤에게 머물렀다.

“증인이 직업상 경험에 비추어 말하는 것으로 듣겠습니다. 계속하세요.”

하윤은 숨을 쉬었다. 이번엔 떨리지 않았다.

“하지 않은 사람만 이렇게 써요.”

법정이 조용했다. 방청석 어딘가에서 누군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윤은 그게 누구인지 보지 않았다.

회장이 피고인석에서 하윤을 보고 있었다. 오래. 하윤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두 달 동안 식탁 너머로 보던 눈이었다. 멍한 눈도, 새벽 정원의 눈도 아니었다. 하윤은 그 눈에서 무언가를 읽으려 하지 않았다. 그냥 마주 봤다.

회장이 고지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턱을 한 번 당겼다.

고지석이 일어섰다. 외투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종이 한 장이 나왔다. 반으로 접힌 자국이 있었다. 하윤은 그 접힌 선을 알았다. 11월 14일 밤 식탁 위에서 생긴 선이었다. 그 밤 늦게 회장이 고 변호사를 집으로 불러 그 종이를 건넸다고, 유진이 나중에 말했다.

“재판장님, 변호인은 방금 증인이 언급한 문서의 원본을 제출하겠습니다.”

실무관이 종이를 받아 법대로 올렸다. 재판장이 종이를 펼쳤다. 배석판사 둘이 몸을 기울였다. 권세라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펜 끝만 메모지 위에서 멈춰 있었다.

재판장이 피고인에게 물었다. 방금의 증언과 증거에 대해 의견이 있느냐고.

회장이 일어섰다. 고지석이 팔을 잡으려 했다. 회장은 그 손을 가볍게 밀었다. 어머니가 밥상을 밀듯이.

“지시는 내 아들이 했소.”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법정 끝까지 갔다.

“막지 않은 건 나요. 3년 반 동안 입을 닫았소. 그중 2년 아홉 달은 말을 못 하는 사람인 척했소.” 회장이 잠깐 멈췄다. 하윤은 세지 않았다. “그동안 세 집은 말할 곳이 없었소.”

둘째 줄에서 정미란이 울었다. 소리 내지 않고, 서류 봉투에 이마를 대고. 짧게. 통역이 응우옌 씨의 사촌에게 무언가를 옮기다 말았다. 사촌은 통역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권세라가 일어섰다.

“재판장님. 검찰은 차민혁 씨를 입건하겠습니다.”

재판장은 그 말을 받아 적게 했다. 그리고 다음 기일을 추후 지정하겠다고 했다. 판결은 오늘 없었다. 망치 소리도 없었다. 재판장이 일어서자 모두 일어섰다. 그게 끝이었다.


법정 밖 복도는 난방이 약했다.

하윤은 창가에 서 있었다. 유진이 옆에 와 섰다. 둘은 오늘 같은 옷을 입지 않았다. 유진은 검은 코트, 하윤은 회색 코트. 어머니는 화장실에 갔다. 정빈이 멀리서 엄지를 세웠다가 문숙자에게 팔을 붙잡혀 끌려갔다. 도석은 복도 끝 계단 앞에 서 있었다.

법정 문이 열렸다. 회장이 나왔다. 교도관 없이, 고지석과 함께. 걸음이 느렸다. 무릎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복도 한가운데, 하윤 앞에 섰다.

유진이 하윤 옆에 있었다. 회장의 눈이 두 사람을 한 번 지나갔다.

회장은 하윤을 봤다.

“잘했다, 유진아.”

복도가 조용했다. 고지석이 한 걸음 물러섰다.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윤은 그 이름을 들었다. 두 달 동안 하루에 수십 번 들은 이름. 마지막 배역이었다.

하윤은 받았다.

“네, 아부지.”

그리고 숨을 한 번 쉬고, 덧붙였다.

“서하윤이에요.”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그리고 다시 걸었다. 계단 앞의 도석 옆을 지나, 계단을 걸어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