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공구 가방은 장롱 위에서 나흘 동안 그대로 있었다.
하윤은 아침 첫 KTX로 대전에 내려가 의자를 밟고 가방을 내렸다. 끈을 풀고 결속선과 갈고리 밑에서 서류 봉투 둘만 꺼냈다. 갈고리는 그 자리에 두었다.
어머니는 현관에서 하윤의 코트 깃을 세워 주었다. 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하윤이 운동화 끈을 묶는 동안 어머니가 말했다.
“그 카디건, 네 거 아니지.”
“돌려주러 가요.”
남색 카디건이었다. 9월에 정숙이 보내온 유진의 옷. 두 달 동안 주말마다 입었고, 그만둔 뒤로는 옷걸이에 걸어만 두었다. 아침에 코트 안에 그걸 받쳐 입으면서 하윤은 마지막 회차의 의상이라고 생각했다. 의상은 반납하는 것이다.
오후 6시, 성북동 대문 앞에 강도석이 서 있었다.
회색 점퍼, 손에 라이터. 하윤을 보고도 켜지 않았다. 10월 27일 밤 이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도석은 더 늙어 있었다. 아니면 하윤이 그 얼굴을 처음으로 배역 바깥에서 보는 것이었다.
“회장이 불렀다.” 도석이 먼저 말했다. “어제. 공중전화로.”
“저도요.”
도석은 무언가를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초인종을 눌렀다. 둘은 말없이 들어갔다. 정원 화단은 겨울 준비로 짚을 덮어 두었다. 짚 사이로 붉은 마사토가 조금 비쳤다.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피아노 뚜껑은 닫혀 있었다. 휠체어는 현관 옆 벽에 접힌 채 기대어 있었다.
차성근은 식탁 상석에 앉아 있었다.
회색 카디건에 흰 셔츠. 무릎 담요는 없었다. 등을 의자 등받이에 대지 않았다. 그 자세를 하윤은 두 번 본 적이 있었다. 새벽 2시의 정원에서 한 번, 금고가 열린 밤의 현관에서 한 번. 불 켜진 식탁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왔나.”
“네.”
“강 형사도.”
“형사 아니요.”
마영순이 부엌에서 나와 상을 차렸다. 무국, 고등어조림, 시금치나물, 김치 두 가지. 마영순은 하윤 쪽을 보지 않고 수저를 놓았다. 하윤은 셌다. 여섯 벌이었다. 회장, 민혁, 오규식, 도석, 자기. 그리고 한 벌이 더 있었다. 회장의 바로 왼쪽, 유진이 이 집을 나가기 전까지 앉던 자리.
회장이 오른쪽 자리를 턱으로 가리켰다.
“자네는 이쪽.”
하윤은 거기 앉았다. 도석이 그 옆에 앉았다. 회장 왼쪽 자리는 수저만 놓인 채 비었다.
마영순이 물병을 내려놓으며 하윤 귀 옆에서 낮게 말했다.
“아가씨, 저는 문 닫아 준 사람이에요. 그 종이는 읽지도 못하고 이름만 썼어요.”
하윤이 고개를 들었을 때 마영순은 이미 부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고소장의 ‘목격’이라는 두 글자가 그 등 뒤에서 조금 가벼워졌다.
6시 20분, 현관문이 열렸다.
차민혁이 먼저 들어왔다. 짙은 남색 코트, 손에 든 가죽 장갑. 오규식이 반 걸음 뒤에 섰다. 민혁이 거실을 지나 식탁 쪽으로 오는 동안, 회장이 일어섰다. 의자를 뒤로 밀고, 탁자를 짚지 않고.
민혁의 걸음이 멈췄다. 1초. 하윤은 그 1초를 놓치지 않았다. 민혁의 눈이 아버지의 무릎에서 얼굴로 올라갔다. 그리고 웃었다. 언제나처럼 정중하게.
“드디어요.”
“앉아라.”
“앉으셔야죠, 아버지. 2년 넘게 안 쓰신 무릎인데.”
“매일 밤 썼다.”
“알아요.” 민혁이 장갑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화단 흙이 휠체어 바퀴에 묻어 있었으니까요.”
민혁은 회장 왼쪽 의자를 빼려 했다. 회장이 말했다.
“거기는 비워 둬라.”
민혁의 눈이 수저 한 벌만 놓인 빈자리에 머물렀다. 무언가를 셈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한 칸 건너 앉았다. 오규식은 민혁 뒤에 섰다.
“오 실장, 니도 앉아라.”
오규식이 앉았다. 등을 펴고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갰다. 25년 동안 회장 옆에서 그렇게 앉았을 자세였다.
회장이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무국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아무도 따라 먹지 않았다. 회장은 한 숟가락을 더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틀 전, 그는 점심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하윤은 그걸 생각했다.
“후견 청구 취하해라.”
민혁은 대답하기 전에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작았다.
“아버지. 성근건설 직원이 지금 1,214명이에요. 협력업체까지 하면 4천 명이 넘고요. 수주 잔고가 2조 1천억인데 그중 40퍼센트가 공공 공사예요.” 민혁이 숫자를 하나씩 식탁 위에 내려놓듯 말했다. “회장이 중대재해로 실형을 받으면 공공 입찰에서 감점이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 아버지가 3년 동안 지킨 게 그거잖아요.”
“그거 지킨 거 아이다.”
“그럼 뭘 지키셨는데요?”
회장은 그 물음을 건너뛰고 다른 숫자를 말했다.
“가평. 폐쇄 병동 1인실. 면회는 보호자 동의 하에 월 2회.”
“읽으셨네요.”
“오 실장이 병실에 놓고 가더라.”
민혁의 고개가 오규식 쪽으로 돌아갔다. 오규식은 무릎 위의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서류를 흘리는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
“2024년 3월 28일.” 회장이 말했다. “금고 알림. 진단 받고 이레 뒤다.”
“아버지가 걱정돼서 그랬습니다. 치매 환자 금고잖아요.”
“니는 나를 지킨 게 아이다. 보관했다.”
“보관이요.” 민혁이 그 단어를 입안에서 한 번 굴렸다. 그리고 웃었다. “먼저 하신 건 아버지세요. 제 서명을 3년 동안 금고에 보관하신 분이 누군데요.”
회장의 숟가락이 국그릇 가장자리에 닿아 작은 소리를 냈다. 회장이 셈에서 밀리는 소리를 하윤은 처음 들었다.
민혁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취하하면 어떻게 되는지 계산은 해 보셨어요? 후견 심문에서 아버지가 멀쩡하다고 나오면 형사 쪽은 공판이 다시 열립니다. 법정형이 1년 이상이에요. 일흔둘에. 그럼 아버지는 법정에서 뭐라고 하실 건데요?” 민혁이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제가 했다고요?”
“내가 했다고 할 거다.”
민혁의 웃음이 반 박자 늦게 따라왔다. 하윤은 그 반 박자를 알았다. 외운 대사에 없던 대답을 들었을 때 배우의 얼굴이 그렇게 늦었다.
“그럼 지시서는요? 제 서명이 있는데요.”
민혁의 눈이 아버지를 건너뛰어 하윤에게 왔다.
“그 종이가 지금 어디 있는지는 서하윤 씨가 제일 잘 아시겠죠. 남의 집 금고에서 회사 기밀을 가져간 분이니까. 아직 피의자 신분이시고요.”
“회사 기밀이면,” 도석이 말했다. 처음 입을 연 것이었다. “왜 회사에 없고 회장 집 금고에 있었나?”
“강도석 씨가 왜 이 자리에 계신지 모르겠네요.”
“내가 불렀다.” 회장이 말했다. “그리고 그 금고는 내 금고다.”
하윤은 가방을 무릎 위에 올리고 지퍼를 열었다. 서류 봉투를 꺼냈다. 봉투에서 종이를 꺼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대전에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이 동작을 머릿속으로 열 번 했다. 종이를 식탁 한가운데, 고등어조림 접시 옆에 놓았다. 그리고 글자가 민혁 쪽을 향하도록 돌렸다.
A4 한 장. 성근-기획-2303-017. 2023년 3월 8일. 평택 물류센터 현장 원가절감 시행 지시. 전단보강근 30퍼센트. 작성 부사장 차민혁, 서명 차민혁. 회장 결재란은 네모 칸만 남아 비어 있었다. 그 옆 여백에 파란 잉크.
식탁이 조용해졌다. 부엌에서 마영순이 가스 불을 끄는 소리가 났다.
민혁은 종이를 집지 않고 내려다보기만 했다. 웃음은 입가에 그대로 있었다. 눈이 웃음을 따라가지 않았다. 하윤은 추석날 차례상 앞을 떠올렸다. 민혁이 아버지 대신 잔을 올리던 손. 그 손을 회장이 보고 있었다. 지금 회장은 그때와 똑같은 눈으로 민혁의 오른손을 보고 있었다. 식탁 위에 놓인, 서명을 한 손.
민혁이 메모를 소리 내어 읽었다.
“이 건은 내가 지시한 것으로 한다. 2023년 5월 14일, 차성근.” 민혁이 고개를 들었다. 웃음이 돌아와 있었다. “아버지 글씨네요. 됐네요. 아버지가 지시하셨다고 아버지 손으로 쓰셨잖아요. 법정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시면 되겠네요.”
“그래. 그렇게 말할 거다.”
하윤의 눈이 그 문장으로 다시 갔다. 지시한 것으로 한다. 어딘가가 걸렸다.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 한 줄이 입에 붙지 않는 느낌. 무엇이 걸리는지는 아직 몰랐다.
“그럼 이건 아버지가 보관하시면 되겠네요.” 민혁이 말했다. “오 실장님.”
오규식의 손이 종이 쪽으로 나갔다. 빠르지 않았다. 25년 동안 회장의 서류를 거둬 온 손이었다. 몸에 밴 동작이었다.
도석의 손이 더 빨랐다. 그는 식탁 너머로 몸을 숙여 오규식의 손목을 잡았다. 접시가 달그락거렸다. 하윤은 2024년 4월의 이야기를 알았다. 박용수 씨 아내의 집, 합의서, 도석의 주먹. 도석의 어깨에 그때의 힘이 다시 올라오는 게 보였다.
도석은 때리지 않았다. 손목만 쥐고 있었다.
“앉아.”
“강 형사님.” 오규식이 낮게 말했다.
“형사 아니라니까.”
오규식은 3초쯤 버티다 손을 거두었다. 도석이 손목을 놓았다. 오규식의 손목에 손가락 자국이 붉게 남았다. 하윤은 9월의 자기 손목을 생각했다. 그때 그 자국을 남긴 사람이 지금 상석에 앉아 있었다.
현관 쪽에서 쇳소리가 났다.
열쇠였다. 누군가 바깥에서 현관 열쇠를 돌리고 있었다. 마영순이 부엌에서 나오다 멈췄다. 이 집 현관 열쇠를 가진 사람은 회장 부부와 마영순, 그리고 하나가 더 있었다. 오규식이 가진 건 대문 쪽문 열쇠뿐이었다. 남은 하나는 3년 동안 쓰이지 않은 열쇠였다.
문이 열렸다.
차유진은 문간에 서 있었다.
어깨에 작은 배낭 하나. 머리는 사진보다 짧았다. 볼이 바닷바람에 거칠어 보였다. 그리고 남색 카디건. 하윤이 지금 코트 안에 입은 것과 같은 옷이었다. 같은 단추, 같은 꽈배기 무늬, 오른쪽 주머니 위의 같은 보풀 자리.
하윤은 자기도 모르게 일어섰다. 코트를 의자에 걸어 둔 채였다. 거실 이쪽 끝, 식탁 옆에 하윤이 섰다. 저쪽 끝, 현관 앞에 유진이 섰다. 그 사이에 피아노가 있었다. 같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거실 양쪽에서 서로를 봤다.
유진이 먼저 말했다. 전화로 들은 목소리였다. 정숙의 녹음보다 낮은.
“엄마가 두 벌 샀어요. 하나는 내가 들고 나갔고.”
“돌려드리러 왔어요.” 하윤이 말했다.
“안 돌려줘도 돼요.”
유진은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왔다. 민혁이 일어섰다. 오규식은 눈을 내리깔았다. 회장은 일어서지 않았다. 식탁 모서리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얬다. 일어서지 않은 것인지 일어서지 못한 것인지 하윤은 알 수 없었다.
유진은 아버지를 보지 않았다. 식탁 위의 종이를 먼저 봤다. 감사팀 사람의 순서로. 문서번호, 날짜, 작성자, 서명, 결재란. 유진의 눈이 빈 네모 칸에서 멈췄다. 그리고 파란 잉크로 옮겨 갔다. 유진은 그 한 줄을 오래 읽었다. 두 번, 세 번.
“아부지.”
회장이 딸을 올려다봤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
“네가 오빠를 미워하는 것보다 나를 미워하는 게 나았다.”
유진의 턱이 굳었다. 하윤은 그 턱을 알았다. 거울 속 자기 턱이 아니라, 남이 찍은 사진 속에서 가끔 낯설게 보이던 턱.
“그건 아부지가 정할 일이 아니잖아요.”
회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혁이 코트 단추를 하나 채웠다. 3년 만에 여동생을 만난 사람 같지 않았다. 협상 상대가 하나 늘었을 뿐이라는 표정이었다.
“유진아.” 민혁이 말했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너 3년 동안 숨어 있던 거, 회사 지분 문제로 법원 가면 할 말 있어?”
“있어.”
유진이 오빠를 똑바로 봤다.
“오빠가 나 미행시킨 거. 2023년 9월 6일부터 19일까지. 회색 그랜저, 번호 끝자리 4417. 회사 앞에서 한 번, 우리 오피스텔 주차장에서 여덟 번. 내가 다 적어 놨어. 수첩 다섯 권에.”
오규식의 고개가 더 내려갔다. 하윤은 오규식의 정수리를 처음 봤다. 머리가 생각보다 많이 빠져 있었다.
민혁은 한참 동생을 봤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로 눈을 옮겼다. 웃음이 사라지자 민혁의 얼굴에서 회장이 보였다.
“아버지, 후회하실 겁니다.”
“벌써 했다.”
민혁은 장갑을 꺼내 끼었다. 한 손가락씩, 천천히. 그는 현관에서 구두를 신으며 부엌 쪽 마영순에게 말했다.
“어머니 병원비는 계속 회사에서 처리하겠습니다. 마 여사님도 수고 많으십니다.”
문이 닫혔다. 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차 시동 소리. 수저 한 벌이 민혁의 자리에 손대지 않은 채 남았다.
오규식은 일어서지 않았다.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검은 케이스, 모서리가 닳은. 그걸 식탁 위, 지시서 옆에 놓았다.
“회장님. 사직서는 쓰지 않겠습니다.”
회장이 그에게 얼굴을 돌렸다.
“사직서를 쓰면 제가 나가는 걸로 끝납니다.” 오규식이 말했다. “이 안에 2023년 9월부터 기록이 있습니다. 따님 동선, 사진, 지시받은 문자. 금고 알림도 들어 있습니다. 잠금은 풀어 두었습니다.”
오규식은 마영순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고개를 숙였다. 깊게.
“마 여사님, 진술서는 제가 썼습니다. 죄송합니다.”
마영순은 행주를 쥔 채 서 있었다. 오규식은 하윤에게도 허리를 굽혔다. 이번엔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는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었다. “차에 있겠습니다. 부르시면 오겠습니다.” 문이 닫혔다.
도석이 일어났다.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집어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회장과 눈이 마주쳤다. 회장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도석은 마당으로 나갔다. 유리창 너머로 그가 화단 앞에 서는 게 보였다.
유진은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뚜껑을 열지 않았다. 닫힌 뚜껑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식탁에 하윤과 회장만 남았다.
“원본 이리 다오.”
하윤은 종이에 손을 얹었다. 회장은 이걸 법정에서 숨길 수도 있었다. 태울 수도 있었다. 그러면 남는 건 하윤의 휴대폰 속 사진 세 장. 출처를 대야 하는 사진, 남의 금고에서 찍은 사진.
“사진 찍었제.” 회장이 말했다. “세 장.”
“어떻게 아세요.”
“마 여사가 문 닫기 전에 봤다더라. 셔터 소리가 세 번 났다고.”
하윤은 종이를 들었다. 회장 앞으로 밀었다. 회장은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파란 잉크가 안쪽으로 가게. 그리고 카디건 안주머니에 넣었다.
하윤은 가방에서 두 번째 봉투를 꺼냈다. 겉에 회장의 글씨로 ‘유진에게’. 봉해진 채였다. 회장의 눈이 그 봉투를 따라왔다. 하윤은 그걸 회장에게 건네지 않았다. 일어나 거실을 가로질러 피아노 앞으로 갔다. 유진에게 직접 내밀었다.
“이건 유진 씨 거예요.”
유진이 봉투를 받았다. 겉의 글씨를 엄지로 한 번 쓸었다.
하윤은 식탁으로 돌아왔다. 회장이 말했다.
“월요일에 고 변호사한테 공판 재개 신청하라고 할 거다. 내가 나간다.”
“가서 뭐라고 하실 건데요?”
회장은 카디건 안주머니 위에 손을 한 번 얹었다가 내렸다.
피아노 의자 쪽에서 종이 찢는 소리가 났다. 유진이 봉투를 열었다. 편지 한 장이 나왔다. 하윤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남의 편지였다. 창밖 마당에서 도석이 라이터를 켰다. 불꽃이 짧게 섰다가 꺼졌다. 다시 켰다. 다시 껐다. 담배는 꺼내지 않았다.
회장이 식탁 가운데 귤 바구니에서 귤 하나를 집었다. 하윤 앞으로 내밀었다.
“까 봐라. 자네 식으로.”
하윤은 귤을 받았다. 두 달 동안 하윤은 이 식탁에서 귤을 왼손으로, 꼭지부터, 한 줄로 깠다. 끊기면 버리고 새 귤로. 남의 손이었다.
하윤은 두 엄지를 꼭지 자리에 세웠다. 왼손도 오른손도 아니었다. 껍질째 귤을 반으로 쪼갰다. 즙이 손톱 밑으로 스몄다. 껍질은 한 줄도 아니었고 끊긴 것도 아니었다. 그냥 두 쪽이었다.
하윤은 반쪽을 회장 앞에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