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 · 16장 응급실
대행 · 도해

16장 응급실

서울 대학병원 응급실, 2026년 11월 8일 일요일
성년후견 심문기일 D-37
약 12분

응급실 커튼은 연두색이었다. 하윤은 눈을 그 색에 붙들어 두었다. 커튼 안에서 정숙이 무슨 일을 당하는지 보지 않으려고.

새벽 2시 10분이었다. CT실에 다녀온 정숙의 침대가 다시 커튼 안으로 들어갔다. 의사가 따라 들어갔다가 나왔다. 서른 중반쯤, 가운 주머니에 볼펜이 네 자루 꽂혀 있었다.

“보호자분이세요?”

하윤은 입을 열었다. 딸이에요, 라는 말이 혀끝에 있었다. 두 달 동안 그 집에서 그렇게 살았다. 엄마, 하고 불렀다. 이 사람의 왼손이 지금도 하윤의 니트 소매 끝을 기억하고 있었다.

“가족은 아니에요.” 하윤이 말했다. “가족분들 오고 계세요.”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한 얼굴이 아니었다. 바쁜 얼굴이었다.

“뇌출혈입니다. 바로 수술 들어가야 해요. 동의서에 서명하실 분이 필요합니다. 오시면 바로 저 부르세요.”

의사가 다른 커튼으로 갔다. 하윤의 두 손은 비어 있었다. 의료 동의. 패밀리 규칙이 넘을 수 없는 선으로 못 박은 세 가지 가운데 하나였다. 공문서 서명, 법정 증언, 의료 동의. 하윤은 그 선을 2년 동안 한 번도 넘어 본 적이 없었다. 넘고 싶어진 것도 처음이었다.

3시가 조금 넘어 민혁이 왔다. 서영이 뒤따랐다. 민혁은 넥타이를 매지 않은 셔츠 차림이었다. 그런데도 단정했다. 새벽 3시에 단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접수대에서 이름을 대고, 의사를 불러 달라고 하고, 동의서를 받아 서명했다. 읽는 데 20초가 걸렸다. 서명은 날카롭고 비스듬했다.

하윤이 아는 서명이었다. 어젯밤 손전등 불빛 아래, 부사장 칸에 있던 서명.

민혁이 펜을 돌려주고 돌아섰다. 커튼 옆에 선 하윤과 눈이 마주쳤는데도 걸음은 그대로였다. 그는 지나가던 보안요원에게 손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이분 저희 가족 아닙니다.” 정중한 목소리였다. “어머니가 고용하셨던 분인데, 계약은 끝났고요. 가족 아닌 분은 나가 주세요.”

보안요원이 하윤 쪽으로 몸을 틀었다. 하윤은 커튼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연두색 커튼 아래로 정숙의 침대 바퀴가 보였다.

서영의 눈이 하윤의 가방에 한 번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서영은 남편 팔을 잡았다.

“갈게요.” 하윤이 말했다.


응급실 밖 보호자 대기실은 의자가 서른 개쯤 있었다. 텔레비전이 소리 없이 켜져 있었다. 하윤은 맨 뒷줄 구석에 앉았다. 가방을 무릎에 올리고 두 팔로 안았다.

대기실 반대편 끝에 회장이 있었다.

휠체어였다. 무릎 담요가 덮여 있었다. 누가 집에서 가져와 덮어 준 것이다. 그 옆 의자에 오규식이 앉아 있었다. 정장 차림 그대로. 마영순은 자판기 앞에서 종이컵을 들고 있었다.

회장의 고개가 앞으로 조금 숙어 있었다. 입이 반쯤 벌어져 있었다. 눈은 텔레비전 쪽에 있었지만 텔레비전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첫 주말 하윤이 대문을 들어섰을 때의 눈. 아무것도 담지 않은 눈.

두 시간 전 그는 현관에 서 있었다. 맨발로, 꼿꼿하게. 오규식의 눈앞에서, 하윤의 눈앞에서. 그런데 지금 그는 휠체어에 다시 앉아 있었다. 담요를 덮고, 고개를 숙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윤은 그를 오래 봤다. 이쪽을 봐 달라고.

회장의 눈이 천천히 돌아왔다. 대기실을 가로질러. 하윤에게 닿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알아보는 기색도, 경고도, 부탁도. 표정이 없는 게 아니었다. 표정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윤에게는 그 차이가 보였다. 그래서 더 읽을 수가 없었다. 회장의 눈은 하윤을 지나 텔레비전으로 돌아갔다.

연기로 돌아간 것이다. 이해한다고 덜 아프지는 않았다.

오규식이 일어섰다. 자판기 쪽으로 가는 길에 하윤 옆을 지났다.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서하윤 씨. 가방이 무거워 보이십니다.”

하윤은 가방을 더 세게 안았다. 오규식은 마영순에게서 종이컵을 받아 회장에게 돌아갔다. 컵을 회장의 손에 쥐여 주었다. 회장은 쥐었다. 쥐고만 있었다.

수술은 아침 7시에 시작했다. 하윤은 수술실 앞까지 가지 못했다. 대기실 전광판에 정숙의 이름이 떴다. 한○숙. 수술 중. 그 글자는 정오가 되도록 ‘수술 중’에서 바뀌지 않았다. 하윤은 병원을 나왔다.


11월 9일 월요일

전화는 아침 10시에 왔다.

“서하윤 씨 되시죠. 경찰서 수사과입니다.”

남자 목소리였다. 사무적이었다. 하윤은 원룸 바닥에 앉아 있었다. 가방은 베개 밑에 있었다. 어제 오후 집에 와서 옷을 입은 채 잤다.

“고소 사건이 접수돼서 출석을 요청드리려고요. 주거침입하고 절도 혐의입니다.”

“고소한 사람이 누군데요.”

“차민혁 씨요. 대리인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성북동 자택 서재 금고에서 회사 기밀 문서를 가져가셨다고 돼 있네요.” 종이 넘기는 소리. “목격자 진술서도 첨부돼 있습니다. 같은 집 간병인분이요.”

하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출석 일자는 조율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번 주 중으로 연락 주세요.”

전화가 끊겼다. 하윤은 휴대폰을 바닥에 엎어 놓았다.

같은 집 간병인. 서재 문을 닫던 손. 소리 나지 않게, 아주 천천히. 하윤은 그걸 못 본 척해 주겠다는 손으로 읽었다. 아니었다. 다 보고, 확인하고, 문을 닫고 부엌으로 가서 휴대폰을 든 손이었다. 오규식의 세단은 두 시간이 안 돼 대문 앞에 섰다. 계산이 맞았다.

2년 동안 매일 보고했다는 사람이었다. 하윤만 그걸 잊었다. 쌀 위에 손등을 얹던 그 손을 보며, 무언가를 읽었다고 착각했다. 하윤은 손바닥을 폈다. 12일은 다 지워지고 없었다.

11시에 두 번째 전화가 왔다.

“서하윤 씨. 오규식입니다.”

”……”

“경찰서에서 연락받으셨지요. 저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오규식은 정말 마음이 무거운 사람처럼 말했다. 그게 그의 일이었다. “주거침입이야 형식상 붙인 거고요. 문서만 돌려주시면 고소는 취하하겠습니다. 대표님께서도 일을 크게 만들고 싶어 하지 않으세요.”

“사모님은요.”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아직 깨어나지는 않으셨고요.” 오규식이 잠깐 쉬었다. “그리고 서하윤 씨. 어머님 계좌 일도 조용히 정리하고요.”

하윤의 손이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

“3년 동안 매달 12일에 들어간 돈 말씀입니다. 회장님께서 판단력이 온전치 못하신 상태에서 보내신 돈이라면, 나중에 가족분들이 돌려받겠다고 나설 수도 있는 돈이라서요. 저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어머님 연세도 있으신데.”

“우리 엄마한테 연락하지 마세요.”

하윤의 목소리가 반듯해졌다. 오규식은 그 말투를 처음 들었을 것이다.

“서하윤 씨 하시기에 달렸지요.” 오규식이 말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갈 곳이 없었다.

하윤은 휴대폰 연락처를 처음부터 끝까지 내렸다. 도석의 이름에서 엄지가 멈췄다. 사장님. 2년 동안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누른 이름이었다. 하윤은 그 이름을 지나쳤다. 그만두겠습니다, 라고 말한 지 2주도 안 됐다. 그건 하윤이 정한 일이었다.

저녁 7시, 정빈의 전화가 왔다.

“누나.”

“응.”

“사장님이 누나 걱정해서 밥을 안 먹어. 사흘째. 숙자 쌤이 국밥 시켜 놨는데 손도 안 대.” 정빈이 숨을 한 번 쉬었다. “근데 그건 사장님 일이고. 누나 어디야?”

“집.”

“집 나와. 지금.”

“왜.”

“숙자 쌤이 누나 반찬 싸 줘서 아까 갖다주러 갔거든. 누나 건물 앞에 검은 차 있어. 남자 둘. 내가 계단 올라가니까 한 명이 따라 들어왔다가 나 보고 다시 나갔어. 내 얼굴 사진도 찍은 거 같아.” 정빈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반찬은 문 앞에 두고 왔어. 누나, 장조림 있어. 근데 지금 그거 먹으러 나오지 말고, 그냥 딴 데로 가.”

하윤은 창가로 갔다. 커튼 틈으로 내려다봤다. 골목 끝 전봇대 옆에 검은 승용차가 서 있었다. 시동은 꺼져 있었다. 운전석에 담뱃불 하나가 켜졌다가 꺼졌다.

“정빈아.”

“응.”

“고마워.”

“누나가 고마워하면 나 무서워.” 정빈이 말했다. “어디 가는지는 말하지 마. 나 거짓말 못 해. 아들 역할만 잘해.”

하윤은 가방 하나만 메고 뒷문 계단으로 나왔다. 장조림은 문 앞에 그대로 두었다. 그날 밤은 영등포의 24시 찜질방에서 잤다. 가방을 베고, 팔로 감고.


11월 10일 화요일, 대전

대전역에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탔다. 어머니의 연립주택은 대전 동구의 오래된 골목 끝에 있었다. 2층. 계단 난간 페인트가 하윤이 고등학생 때와 같은 색으로 벗겨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집에서 잔 게 7년 전이었다. 명절에는 와서 밥만 먹고 갔다. 그것도 최근 2년은 한 번씩 빠졌다.

문을 연 어머니의 얼굴에 놀람이 먼저 나왔다가 금방 들어갔다. 쉰여덟. 시장 반찬가게에서 오전 일을 하고 막 들어온 참이었다. 앞치마 끈 자국이 카디건 허리에 남아 있었다.

“밥은.”

“아직.”

어머니는 그 말만 듣고 부엌으로 갔다. 왜 왔냐고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등이었다. 이 집에도 그런 등이 있었다.

저녁은 된장찌개와 어묵볶음, 무생채였다. 둘은 텔레비전을 켜 놓고 먹었다. 9시 뉴스가 시작되자 어머니가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돌렸다. 하윤은 그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기 버릇이 어디서 왔는지 그제야 알았다.

설거지는 하윤이 했다. 어머니는 방바닥에 앉아 빨래를 갰다. 하윤은 고무장갑을 벗고 그 옆에 앉았다. 수건 하나를 집어 반으로 접었다.

“엄마. 매달 12일에 돈 들어오지.”

어머니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수건을 반으로, 또 반으로.

“어떻게 알았니.”

“봤어.”

어머니는 수건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그리고 다음 수건을 집었다.

“2023년 6월부터다. 12일마다. 300만 원씩. 차성근이라고 찍혀서.”

”……”

“처음엔 돌려보냈다. 은행 가서 반환 신청을 했다. 다음 달에 또 왔다. 또 돌려보냈다. 세 번 그랬다.” 어머니가 수건을 접었다. “네 번째 달에는 은행 앞까지 갔다가 그냥 왔다.”

“왜.”

“모르겠다. 문 앞에 서 있는데 안 들어가지더라.”

하윤은 손에 든 수건을 내려다봤다. 장례식장 지하 계단 맨 아래 칸. 빈소 입구에서 다섯 걸음.

“그 돈으로 네 아빠 납골당 자리 값을 냈다. 평택 추모공원.” 어머니가 말했다. “너한테 말하면 네가 안 갈까 봐 말 안 했다. 그 돈으로 산 자리라고 하면.”

“어차피 안 갔잖아.”

“그러니까.”

어머니는 그 말을 하고 처음으로 하윤을 봤다. 둘 다 웃지 않았다. 그래도 방 안의 공기가 조금 느슨해졌다.

“그 회사 사람은.” 하윤이 물었다.

“양복 입은 사람이 올해 두 번 왔다. 9월에 한 번, 지난달에 한 번. 받은 돈 얘기를 하더라. 회장님이 정신이 온전치 않을 때 보낸 거라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어머니가 양말 두 짝을 맞춰 말았다. “그리고 네 얘기도 했다. 따님이 요즘 회장님 댁에 다니신다고. 주말마다.”

하윤은 들고 있던 수건을 내려놓았다. 10월 8일 밤의 카톡. 요즘 무슨 일 하니. 어머니는 묻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왜 나한테 안 물었어.”

“네가 말을 안 하니까.”

어머니는 마지막 수건을 개서 쌓았다. 탑이 반듯했다.


밤 11시가 넘었다. 어머니가 이불을 깔았다. 한 채였다. 하윤의 옛날 이불은 버린 지 오래라고 했다. 둘은 한 이불 양 끝에 누웠다. 불을 껐다.

천장에 형광등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하윤은 그걸 보며 말했다. 어둠 속이라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엄마. 2021년에 아빠가 내 공연 왔었어.”

어머니의 숨소리는 바뀌지 않았다. 잠들었나 보다, 하윤은 생각했다.

“내가 알려 줬다.”

하윤이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어머니의 옆얼굴이 천장을 보고 있었다.

“그해 봄에 네 아빠가 전화를 했다. 14년 만에. 번호를 안 바꿨더니 그게 되더라.” 어머니가 말했다. 남의 이야기를 하듯 고르게. “네가 뭐 하고 사냐고 묻더라. 연극 한다고 했다. 주인공이라고. 언제 하냐고 해서 날짜를 알려 줬다.”

”……”

“공연 끝나고 문자가 왔다. 그날 밤에.”

어머니가 몸을 일으켰다. 머리맡 서랍을 열었다. 휴대폰 하나를 꺼냈다. 지금 쓰는 것이 아니었다. 액정 모서리가 거미줄처럼 금 간, 몇 년 전 기종이었다. 어머니는 충전 선을 꽂고 전원을 눌렀다. 화면이 켜지는 데 한참 걸렸다. 그동안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문자함을 열어 하윤에게 건넸다.

저장된 이름은 ‘애아빠’였다. 메시지는 그것 하나만 남아 있었다. 다른 건 다 지운 것 같았다. 2021년 4월 9일 금요일, 오후 10시 3분.

막 내려가는 거 봤다. 내 탓이다. 다시는 안 간다.

하윤은 그 세 문장을 읽었다.

한 번. 화면이 꺼졌다. 하윤은 다시 켰다. 두 번. 화면이 꺼졌다. 다시 켰다.

5년 동안 하윤은 그날 대사를 잃은 게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셋째 줄에 앉은 그 손 때문에. 그래서 아버지를 미워할 수 있었다. 미워하는 동안은 무대 공포증에도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했다. 내 탓이다. 그리고 그는 약속을 지켰다. 다시는 오지 않았다. 하윤은 그 뒤로 무대에 서지 않았으니 올 곳도 없었다. 둘이 같은 날 같은 이유로 같은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2년 뒤, 아버지는 평택의 4층 슬래브 아래에서 죽었다.

어머니는 하윤에게서 휴대폰을 돌려받지 않았다. 다시 누워 천장 쪽으로 얼굴을 두었다.

“그 문자 받고 나서 내가 답을 안 했다.” 어머니가 말했다. “뭐라고 할지 몰라서. 그게 마지막이었다.”

하윤은 휴대폰을 가슴 위에 엎어 놓았다. 화면 불빛이 이불 사이로 새다가 꺼졌다. 어둠 속에서 어머니의 손이 이불 위로 건너왔다. 하윤의 손등을 한 번 덮었다. 그리고 돌아갔다.

둘 다 울지 않았다. 형광등 자국이 천장에 그대로 있었다.


새벽 3시, 하윤은 일어났다. 어머니의 숨소리가 길었다.

부엌 서랍에서 서류 봉투 두 장을 꺼냈다. 관리비 고지서가 들어 있던 누런 봉투였다. 하나에 지시서 원본을 투명 파일째 넣었다. 다른 하나에 ‘유진에게’ 봉투를 넣었다. 봉해진 채로.

안방 장롱 앞에 의자를 놓고 올라섰다. 장롱 위에 아버지의 공구 가방이 있었다. 먼지가 앉아 있었다. 사고 뒤 현장 사람들이 가져다준 가방이라고, 어머니가 언젠가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었다. 가죽이 갈라진 손잡이, 지퍼 대신 묶는 끈. 하윤은 끈을 풀었다. 결속선 한 타래가 맨 위에 있었다. 그 밑에 손때가 까맣게 앉은 철근 갈고리.

하윤은 갈고리를 손에 쥐었다. 손잡이가 닳아서 손가락 모양으로 패여 있었다. 아버지 손가락이 30년 동안 쥔 자리였다. 하윤의 손가락은 그 홈에 맞지 않았다. 너무 가늘었다.

봉투 두 장을 가방 바닥에 눕혔다. 갈고리를 그 위에 다시 놓고, 결속선을 얹었다. 끈을 원래대로 묶었다. 매듭 모양까지.

의자에서 내려왔을 때 하윤의 손바닥에 녹 냄새가 배어 있었다. 씻지 않았다.


11월 12일 목요일

수요일 하루를 하윤은 거의 잤다. 어머니는 아침에 반찬가게에 나갔다가 오후에 돌아왔다. 둘은 그날 별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안 해도 되는 날이었다.

목요일 오후 1시, 하윤은 대전역에서 서울행 기차를 탔다. 가방은 가벼웠다. 공구 가방 안에 두고 온 것의 무게가 그 가벼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천안을 지날 무렵 정빈의 메시지가 왔다.

누나 사모님 수술 잘 됐대. 의식도 돌아왔대. 사장님이 그러는데 말은 아직 잘 못 하신대. 그래도 사람은 알아보신대!! 그리고 그 검은 차 오늘은 없어. 내가 아침에 가 봤어. 장조림은 내가 먹었어 미안

하윤은 첫 줄을 다시 읽었다. 사람은 알아보신대.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풀렸다.

차창 밖으로 빈 논이 지나갔다. 날짜가 화면 위쪽에 떠 있었다. 11월 12일.

오늘 회장은 점심을 굶었을 것이다. 병원 복도 어딘가에서 숟가락을 손등으로 밀었을 것이다. 정숙이 깨어난 날에도. 하윤은 그걸 확신했다. 한 달 전이었다면 몰랐을 것이다.

2시 20분, 휴대폰이 짧게 떨었다. 어머니였다.

왔다.

두 글자였다. 하윤이 50만 원을 보내면 다음 날 오는 ‘받았다’와 달랐다. 무엇이 왔는지 어머니는 쓰지 않았다. 쓰지 않아도 됐다.

하윤은 답장을 썼다. 응. 그리고 지우지 않고 보냈다.


밤 11시, 하윤은 원룸 바닥에 앉아 있었다. 정빈 말대로 골목 끝 전봇대 옆은 비어 있었다. 문 앞에 장조림 통은 없었다. 빈 통이 깨끗이 씻겨 신발장 위에 놓여 있었다. 정빈의 글씨로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맛있었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모르는 번호가 떴다. 02로 시작하는 번호였다. 하윤은 받지 않았다. 신호가 두 번, 세 번 울렸다. 경찰서일 수 있었다. 오규식일 수 있었다. 네 번째 신호에 하윤은 받았다.

“여보세요.”

“내다.”

하윤은 숨을 멈췄다.

그 목소리였다. 개천절 오후 피아노 옆에서 들은 목소리. 짧고 낮고, 끝이 경상도 쪽으로 내려앉는 목소리. 리야드도 모래도 없는 목소리. 그 목소리를 이 작은 전화기로 듣는 건 처음이었다.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아주 멀리서 자판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병원 복도의 소리였다. 누군가 동전을 넣고 걸어온 전화였다.

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회장도 서두르지 않았다. 둘은 그 침묵을 같이 들었다.

“내일모레, 토요일에 집으로 와라.” 회장이 말했다. “이제 안 한다.”

“뭘요.”

“연기.”

전화가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