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는 금요일 저녁에 왔다.
“돈은 못 드려요.”
정숙은 인사도 없이 그 말부터 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피아노 교사가 하루 종일 학생 이름을 부르고 난 저녁 같은 목소리였다.
“와 줄 수 있어요? 유진이 말고. 하윤 씨로.”
하윤은 왼손을 내려다봤다. 손바닥에 볼펜 자국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일주일 동안 아침마다 그 숫자를 다시 썼다. 세수를 하면 흐려졌고 설거지를 하면 반쯤 지워졌다. 그래도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썼다. 노트가 없으니 손이 노트였다.
“갈게요.”
정숙은 고맙다고 하지 않았다. 숨을 한 번 길게 내쉬고 끊었다.
토요일, 하윤은 남색 카디건을 옷걸이에 걸어 둔 채 나왔다. 청바지에 회색 니트, 검은 코트, 늘 신던 운동화. 머리는 유진처럼 풀지 않고 아무렇게나 하나로 묶었다. 2시가 아니라 3시에 초인종을 눌렀다. 대문 앞에 서는 시각까지 자기가 정하고 싶었다.
마영순이 대문을 열었다. 그 눈이 하윤의 코트에서 운동화로 내려갔다. 아가씨, 하고 부르려다 입을 다물었다.
“들어오세요.”
회장은 거실 창가에 있었다. 무릎 담요, 휠체어, 정원 쪽으로 기운 고개. 하윤이 거실에 들어서자 고개가 천천히 돌아왔다.
하윤은 기다렸다. 유진아, 하고 부를 차례였다. 첫 주말부터 그는 하윤을 보면 늘 그렇게 불렀다. 마영순이 등 뒤에 서 있었다. 연기를 해야 하는 자리였다.
회장은 부르지 않았다.
그의 눈이 하윤의 회색 니트에서 하나로 묶은 머리로 옮겨 갔다. 그리고 얼굴에 머물렀다. 오래. 하윤은 속으로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거실 벽시계 초침 소리가 다섯 번 났다.
“리야드는,” 회장이 말했다. “11월이면 밤이 춥다. 낮엔 덥고 밤엔 춥다. 모래가 밀가루 같았다.”
그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윤은 코트를 벗지 못하고 서 있었다. 이름을 부르지 않은 것. 이 집에서 그건 대사 한 줄보다 컸다.
정숙은 부엌 식탁에 앉아 있었다. 일주일 사이에 얼굴이 꺼져 있었다. 하윤을 보고 일어나려다 식탁 모서리를 짚었다.
“앉아 계세요.”
“괜찮아요. 요즘 머리가 좀 무거워서.” 정숙이 관자놀이를 손가락 두 개로 눌렀다. “혈압약을 먹는데도 그래요. 나이 탓이지.”
식탁 위에 귤 한 봉지가 있었다. 망에 든 채로. 지난 토요일에 샀다는 그 귤이었다. 몇 개는 껍질이 물러 있었다.
저녁 준비는 마영순과 하윤이 했다. 하윤이 하겠다고 했다. 손을 놀려야 했다.
마영순은 쌀을 씻었고 하윤은 무를 썰었다. 부엌에는 물소리와 칼 소리만 있었다. 마영순은 2년 동안 이 집의 부엌을 지켰다. 하윤이 이 집에 드나든 두 달 동안, 마영순이 먼저 말을 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묻는 말에만 답했다. 원래 점심을 잘 안 드세요.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가씨.
“회장님이 지난주에 귤을 안 드셨어요.”
하윤의 칼이 멈췄다.
마영순은 하윤을 보지 않았다. 쌀뜨물을 따라 내며 말했다. 날씨 얘기를 하듯이.
“까 드려도 안 드셨어요. 사모님이 까 드려도요. 손에 쥐여 드리면 쥐고만 계시고.”
”…”
“12일엔 점심을 안 드시잖아요. 매달.” 마영순이 솥에 물을 맞췄다. 손등을 쌀 위에 얹어 물 높이를 쟀다. “그날 오후엔 꼭 은행 알림이 오고.”
하윤은 칼을 내려놓고 왼손을 폈다. 무즙에 젖은 손바닥 한가운데 숫자가 거의 지워져 있었다. 1의 꼬리와 ‘일’의 받침만 희미하게 남았다.
“언제부터요?”
“제가 온 날부터요.” 마영순이 솥뚜껑을 닫았다. “그 전은 모르고요.”
마영순은 재작년 9월에 이 집에 왔다. 하윤은 그걸 사전 인터뷰 자료에서 읽었다. 2024년 9월.
하윤은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았다. 마영순이 왜 이 말을 지금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입을 다물고 지내던 사람이었다. 오규식에게 매일 보고한다고 정숙이 귀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지금, 아무도 묻지 않은 걸 말하고 있었다. 마영순의 옆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손만 읽혔다. 쌀 위에 얹었던 손등이 아직 젖어 있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정숙이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하윤이 물었다.
“사모님. 회장님이 12일에 점심 안 드시는 거요. 언제부터예요?”
정숙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멈췄다. 소리가 나지 않을 만큼만 눌린 채로.
“재작년…… 아니.” 정숙이 고개를 저었다. “그 전 해예요. 여름. 유진이 나가기 전부터였어요. 6월이었나. 그 사람이 점심상을 처음 밀었을 때, 나는 사고 때문에 입맛을 잃었나 했어요.”
2023년 6월.
하윤은 거실 소파 끝에 앉았다. 회장은 침실에 들어가 있었다. 마영순은 부엌에서 그릇을 닦았다. 피아노 의자에 앉은 정숙의 등. 그 너머로 닫힌 서재 쪽 복도. 하윤은 노트가 없었다. 그래서 머릿속에 칸을 그렸다. 배역 노트를 쓸 때처럼. 한 칸에 하나씩.
매달 12일. 점심을 굶는다. 그날 오후 은행 알림이 온다.
처음엔 유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딸이 사라진 뒤 생긴 버릇. 그런데 유진이 사라진 날은 9월 20일이었다. 12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정숙은 지금 유진이 나가기 전부터였다고 했다.
2023년 6월에 시작했다. 그렇다면 6월 12일이 첫 번째다. 첫 번째 12일 앞에는 무엇이 있나. 한 달 전의 12일.
5월 12일.
하윤의 손이 소파 팔걸이를 쥐었다.
그 날짜는 하윤의 달력에 적힌 적이 없었다. 적지 않아도 3년 동안 매년 왔다. 하윤은 그날마다 휴대폰을 엎어 놓고 잤다. 뉴스를 켜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아무 날도 아닌 것처럼 지나가게 두었다. 2023년 5월 12일 금요일, 오후 1시 5분께.
회장은 그날을 한 달에 한 번씩 굶었다. 3년 동안. 하윤이 1년에 한 번 엎어 놓은 날을, 그는 열두 번씩 엎었다.
그리고 은행 알림.
하윤은 그다음 칸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넘어가면 무엇이 나올지 짐작이 갔다. 대신 다른 칸을 열었다. 유진의 편지.
금고 번호는 몰라요. 여섯 자리라는 것만 알아요. 아부지는 숫자로 기념일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에요. 숫자는 장부에 적는 사람이에요.
5월 12일은 기념일이 아니었다. 아무도 기념하지 않는 날이었다. 장부에 적는 날이었다. 갚을 것이 생긴 날. 개천절 오후 피아노 옆에서 그가 한 말이 있었다. 내가 빚진 게 있다.
여섯 자리. 장부에 날짜를 적는 사람은 날짜를 어떻게 적을까. 하윤은 서류에서 본 여섯 자리 날짜들을 떠올렸다. 주민등록번호 앞자리. 계약서 귀퉁이의 일련번호. 영수증의 발행일. 연, 월, 일. 두 자리씩.
2, 3, 0, 5, 1, 2.
하윤은 그 숫자를 머릿속에서 한 번 눌렀다. 손끝이 소파 팔걸이 위에서 여섯 번 움직였다. 맞는지는 알 수 없었다. 틀리면 어떻게 되는지도 몰랐다. 몇 번 틀리면 잠기는 금고일 수도 있었다. 틀린 기록이 누구에게 가는 금고일 수도 있었다. 한 번이었다. 많아야 두 번.
피아노 소리가 멎었다.
정숙이 뚜껑을 닫고 있었다. 손가락이 끼지 않게.
“열쇠.” 정숙이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아직 가지고 있어요?”
“네.”
정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편지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정숙은 알았다. 편지를 피아노 의자 밑에 붙인 사람도 정숙일 것이다. 열쇠에 빨간 실을 감은 사람도.
“오늘 밤에 마 여사님이 나갈 거예요.”
밤 10시 반, 정숙이 부엌에 대고 말했다.
“여사님, 미안한데 지금 마트 좀 다녀와 줄래요? 기저귀가 내일 아침 것까지 없네요. 돈암동 큰 마트는 자정까지 하니까. 택시 타고 다녀와요.”
마영순이 고무장갑을 벗었다. 부엌 구석 수납장 쪽으로 눈이 한 번 갔다. 하윤의 눈도 따라갔다. 수납장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그 안에 기저귀 팩이 두 개 보였다. 뜯지 않은 것.
마영순은 수납장 문을 닫았다. 그리고 앞치마를 벗어 걸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대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택시 문 소리. 멀어지는 엔진 소리. 하윤은 2층 계단참에서 그 소리를 다 들었다. 거실 불이 꺼졌다. 정숙은 2층으로 올라오지 않고 거실 옆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만큼 열려 있었다.
11시.
하윤은 계단을 내려갔다. 열 번째 칸에서 멈추지 않았다. 복도 끝, 회장 침실 문 아래로 빛이 새지 않았다. 숨소리가 들렸다. 일정하고 길게. 자는 사람의 숨인지 자는 척하는 사람의 숨인지 하윤은 가려내지 않았다. 가려낼 수 없었다.
서재 문. 짙은 호두나무, 놋쇠 손잡이. 하윤은 지갑 동전 칸에서 열쇠를 꺼냈다. 빨간 실이 손가락에 감겼다. 열쇠를 구멍에 넣었다. 반들반들한 구멍이었다. 누군가 자주 열고 닫은 문이었다.
돌렸다. 걸쇠가 빠지는 소리가 복도에 생각보다 크게 났다. 하윤은 숨을 참았다. 옆방의 숨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서재에서는 종이와 잉크 냄새가 났다. 담배 냄새는 나지 않았다. 하윤은 휴대폰 손전등을 켰다. 불빛을 바닥 쪽으로 낮췄다.
책상 하나, 의자 하나. 책상 위에 만년필 두 자루가 나무 쟁반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벽 한쪽에 액자. 모래 언덕 앞에 헬멧을 쓴 젊은 남자들. 유진의 방에 있던 사진과 같은 날 찍은 다른 한 장인 듯했다. 하윤은 그 사진을 비추지 않았다.
금고는 보이지 않았다. 세 벽이 다 책장이었다. 건축 구조 계산서, 시방서, 사우디 시절 영문 매뉴얼, 법전 몇 권. 금고가 들어갈 만한 자리가 없었다.
하윤은 손전등을 바닥으로 내렸다.
무대에서 배운 것이 있었다. 세트는 거짓말을 해도 바닥은 거짓말을 못 한다. 배우가 같은 동선을 백 번 걸으면 바닥에 자국이 남는다. 하윤은 마룻바닥을 한 뼘씩 훑었다. 책상 앞, 의자 밑, 문 앞. 그리고 오른쪽 벽 책장 앞.
책장 한 칸 아래 마루에 반원 두 개가 있었다. 희미하게 하얀, 긁힌 자국. 문짝이 바닥을 쓸며 열린 자리였다.
그 칸의 책들은 다른 칸보다 책 등이 반듯했다. 꽂혀 있기만 하고 한 번도 뽑힌 적 없는 책들. 하윤은 책장 옆면을 손으로 더듬었다. 손가락 끝에 홈이 걸렸다. 당겼다. 책장 한 칸이 통째로 경첩에 돌아 열렸다. 마루에 반원이 하나 더 그려졌다.
회색 금고였다. 허리 높이. 손잡이 위에 숫자판이 있었다. 0부터 9까지, 그리고 별표와 우물 정 자.
하윤은 손전등을 금고 위에 엎어 세웠다. 불빛이 천장으로 번졌다. 오른손 검지를 숫자판 앞에 댔다. 손이 떨렸다. 하윤은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잡았다.
삐. 생각보다 높은 소리였다. 하윤은 문 쪽을 돌아봤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
삐.
-
삐.
-
삐. 여기까지는 어떤 날짜든 될 수 있었다. 2023년 5월의 어느 날.
-
삐.
하윤의 손가락이 마지막 숫자 위에서 멈췄다. 유진은 삐 소리가 여섯 번 났다고 했다. 아부지가 등 뒤로 누를 때. 그날 회장은 딸을 등지고 이 숫자를 눌렀다. 딸이 묻는 걸 다 듣고 나서. 덮어라, 하고 나서.
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윤은 숨을 쉬지 않았다. 1초. 2초. 숫자판의 불빛이 곧 꺼질 듯했다.
금고 안쪽에서 무언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작은 모터 소리. 그리고 철컥.
손잡이가 아래로 내려갔다.
금고 안은 두 칸이었다.
위 칸에 투명 파일 하나. 하윤은 꺼냈다. A4 한 장. 종이 머리에 회사 로고가 있었다. 성근건설. 그 아래 문서번호. 성근-기획-2303-017. 2023년 3월 8일. 제목. 평택 물류센터 현장 원가절감 시행 지시.
하윤은 유진의 목소리를 들었다. 외워서가 아니라 잊지 못해서 외운 번호.
본문은 짧았다. 전단보강근 항목. 설계 수량 대비 30% 절감. 그 아래 결재란. 네모 칸이 넷. 담당, 팀장, 부사장, 회장.
부사장 칸에 서명이 있었다. 날카롭고 비스듬한 서명. 그 옆에 인쇄된 이름. 부사장 차민혁. 작성자 칸에도 같은 이름이 있었다.
회장 칸은 비어 있었다.
하윤은 그 빈칸을 오래 봤다. 유진이 3년 동안 머릿속으로 백 번은 본 서명. 거기 있을 거라고 했던 아부지 서명. 그 칸은 하얬다.
그리고 빈칸 옆 여백에, 파란 잉크.
만년필 글씨였다. 획이 굵었고 꾹꾹 눌러 썼다. 종이 뒷면까지 자국이 배어 나왔다.
이 건은 내가 지시한 것으로 한다. 2023. 5. 14. 차성근
하윤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무언가가 걸렸다. 문장 어딘가가 이상했다. 사과문도 아니고 자백도 아니었다. 대본 귀퉁이에 연필로 적는 지문 같았다. 이 배우는 여기서 이렇게 한다. 무엇이 이상한지는 지금 알 수 없었다. 손전등 불빛이 흔들렸다.
아래 칸에는 두꺼운 서류철이 있었다. 하윤은 표지를 넘겼다. 은행 이체 확인증이 날짜순으로 철해져 있었다. 2023년 6월 12일. 7월 12일. 8월 12일. 장마다 세 줄. 받는 사람 세 명. 금액은 모두 300만 원.
정미란. 그리고 하윤이 읽을 줄 모르는 베트남어 이름. 그리고 첫 줄.
김정임.
하윤은 서류철을 덮지 못했다. 손이 표지를 잡은 채 멈춰 있었다. 그 이름은 하윤이 매달 50만 원을 보내는 계좌의 이름이었다. 매달 그다음 날 ‘받았다’ 세 글자를 보내오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 회사 사람이 또 연락 왔더라. 요즘 무슨 일 하니.
서류철 맨 뒤에 봉투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흰 편지 봉투. 봉해져 있었다. 겉에 만년필 글씨. 파란 잉크. 지시서 여백의 그 글씨와 같은 손이었다.
유진에게.
하윤은 휴대폰 카메라를 켰다. 지시서를 금고 위에 펴 놓고 찍었다. 손이 떨려서 첫 장은 흐렸다. 두 번째는 메모가 잘렸다. 세 번째에 결재란과 파란 글씨가 한 화면에 들어왔다. 세 장.
서류철 쪽으로 카메라를 돌렸다. 김정임이라는 글자가 화면에 들어왔다. 하윤은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엄지가 화면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하윤은 카메라를 껐다.
그때 등 뒤에서 공기가 바뀌었다.
문은 닫혀 있었다. 닫아 두었다. 그런데 복도의 찬 공기가 발목에 닿았다. 하윤은 돌아섰다.
서재 문이 열려 있었다. 문간에 마영순이 서 있었다. 코트를 입은 채로. 한쪽 팔에 마트 비닐봉지를 걸고 있었다. 봉지 안에 기저귀 팩 하나가 비쳤다. 나간 지 40분이 되지 않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마영순의 눈이 하윤에게서 하윤의 손으로, 열린 금고로, 금고 위에 엎어 세운 휴대폰 불빛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다시 하윤의 얼굴로 돌아왔다. 표정이 없었다. 놀란 얼굴도, 화난 얼굴도 아니었다. 하윤이 이 집에서 2개월 동안 읽지 못한 그 얼굴 그대로였다.
하윤은 말을 하지 못했다. 무슨 대사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영순이 한 발 물러섰다.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렸다. 그리고 손잡이를 잡았다. 소리 나지 않게, 아주 천천히, 서재 문을 닫았다.
복도의 공기가 끊겼다. 발소리가 부엌 쪽으로 멀어졌다.
하윤은 한참 그대로 서 있었다. 닫힌 문을 보며. 그 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보지 않은 걸로 하겠다는 뜻인지. 다 봤으니 이제 서두르라는 뜻인지.
하윤은 서두르기로 했다.
지시서 원본을 투명 파일째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너무 컸다. 꺼내서 가방에 넣었다. ‘유진에게’ 봉투도 가방에 넣었다. 서류철은 아래 칸에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어머니의 이름이 든 종이를 가져갈 수는 없었다. 그건 하윤의 것도 회장의 것도 아니었다.
금고 문을 밀었다. 철컥, 삐. 책장을 돌려 닫았다. 마루의 반원이 하나 더 겹쳤다. 그 자국은 지울 수 없었다. 서재 문을 잠갔다. 열쇠를 지갑에 넣었다. 빨간 실 끝을 안으로 밀어 넣지 못했다.
새벽 1시, 하윤은 유진의 방 침대 끝에 앉아 있었다. 코트를 입은 채였다. 가방 끈이 어깨에 걸려 있었다.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천장으로 불빛이 지나갔다. 자동차 전조등. 정원 나무 그림자가 천장을 한 바퀴 쓸더니 한자리에 머물렀다.
하윤은 창가로 갔다. 대문 앞에 검은 세단이 서 있었다. 시동이 걸린 채였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남자가 내렸다. 새벽 1시에도 정장이었다. 오규식.
마영순이 연락했나. 하윤은 커튼 가장자리를 쥐었다. 아니면 다른 무엇이. 하윤은 알 수 없었다. 오규식이 대문 옆 작은 문에 열쇠를 꽂았다. 그 집 열쇠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윤은 계단으로 나갔다. 반쯤 내려갔을 때 현관 불이 켜졌다.
정숙이 먼저 나와 있었다. 잠옷 위에 카디건을 걸치고, 맨발로 현관 마루 끝에 서 있었다. 오규식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구두를 벗지 않았다.
“사모님. 늦은 시각에 죄송합니다.” 오규식이 고개를 숙였다. “금고가 열렸다는 알림이 와서요. 회장님 휴대폰으로 가는 알림이 제 휴대폰으로도 옵니다.”
하윤의 손이 계단 난간을 쥐었다.
알림. 금고는 혼자 열리고 닫히는 게 아니었다. 휴대폰 두 대 안에서 열리고 닫혔다. 철컥, 하는 순간 이 남자의 주머니가 울렸다. 그는 그 소리를 듣고 세단에 시동을 걸었을 것이다.
“내가 열었어요.”
정숙이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피아노 뚜껑을 닫을 때처럼 반듯했다.
오규식이 고개를 들었다. 정숙을, 그리고 그 뒤 계단의 하윤을 봤다. 아주 잠깐. 다시 정숙에게로.
“그러셨군요.” 오규식이 공손하게 말했다. “그럼 사모님, 비밀번호를 아십니까?”
정숙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이 열렸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계단 위에서도 정숙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이마, 볼, 입술. 물이 빠지듯.
“사모님?”
정숙의 오른손이 관자놀이로 올라갔다. 손가락 두 개. 저녁 식탁에서 하던 그 동작. 그런데 이번엔 손가락이 관자놀이에 닿지 못했다. 손은 중간에서 떨어졌다.
“머리가……”
무릎이 꺾였다.
하윤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남은 칸을 셌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정숙의 머리가 현관 마루에 닿기 전에 손이 먼저 닿았다. 정숙의 머리가 하윤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무거웠다. 사람의 머리가 이렇게 무거운 줄 몰랐다.
“사모님. 사모님.”
정숙의 눈이 하윤 쪽을 향했다. 초점이 맞지 않았다. 왼손이 하윤의 니트 소매를 쥐었다. 피아노를 50년 친 손가락이 소매를 쥐고 놓지 않았다. 오른손은 바닥에 늘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119요!” 하윤이 외쳤다. 누구에게 외치는지도 모르고.
부엌 쪽에서 마영순이 뛰어나왔다. 손에 이미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마영순이 주소를 불렀다. 성북동, 번지, 대문 색깔. 또박또박. 충청도 말끝이 하나도 늘어지지 않았다.
오규식은 현관에 선 채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화면이 켜져 있었다. 그는 아무 번호도 누르지 않았다.
구급차는 11분 뒤에 왔다.
구급대원 둘이 정숙을 들것에 옮겼다. 정숙의 왼손은 끝까지 하윤의 소매를 놓지 않았다. 구급대원이 보호자 한 명 타라고 했다. 하윤은 정숙의 손을 잡은 채 구급차에 올랐다. 가방이 어깨에서 미끄러졌다. 하윤은 팔꿈치로 가방 끈을 걸어 올렸다. 놓을 수 없었다. 그 안에 종이 한 장과 봉투 하나가 있었다.
뒷문이 닫히기 직전, 하윤은 고개를 돌려 현관을 봤다.
현관 불빛 아래 마영순이 서 있었다. 그 옆에 오규식. 그리고 그 둘 뒤, 복도에서 걸어 나온 사람이 있었다.
회장이었다.
휠체어가 없었다. 무릎 담요도 없었다. 내복 바람에 맨발이었다. 그는 현관 마루 끝에 서 있었다. 등을 꼿꼿이 펴고. 새벽 2시의 정원에서처럼. 그의 눈이 구급차를 향해 있었다. 들것 위의 정숙을 향해.
오규식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서 있는 사람을 봤다.
오규식의 손에서 휴대폰 화면이 꺼졌다.
뒷문이 닫혔다. 사이렌이 울렸다. 정숙의 손가락이 하윤의 소매 안에서 한 번 움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