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 · 14장 왜 저였어요
대행 · 도해

14장 왜 저였어요

서울 망원동 패밀리 사무실, 2026년 10월 26일 월요일
성년후견 심문기일 D-50
약 14분

월요일 아침 7시, 1층 떡집은 벌써 김을 올리고 있었다. 하윤은 시루 냄새를 지나 계단을 올라갔다. 사무실 열쇠는 문숙자가 준 것이었다. 새벽 의상 피팅이 있는 날 먼저 와서 문을 열라고. 그 열쇠를 피팅 아닌 일로 쓰는 건 처음이었다.

의상실 불은 켜지 않았다. 행거에 걸린 상복들이 어둠 속에서 어깨만 드러냈다. 하윤은 유리방 문을 열었다. 도석의 책상. 서류 더미, 다 마신 믹스커피 봉지 세 개.

서랍은 세 칸이었다. 첫 칸에는 볼펜과 인감과 사무실 임대 계약서. 둘째 칸에는 지난 장부들. 맨 아래 칸은 잠겨 있지 않았다. 형사였던 사람이 서랍을 잠그지 않았다. 아무도 열지 않을 거라고 믿었거나, 언젠가 누가 열기를 바랐거나.

하윤은 노트를 펼쳐 책상 귀퉁이에 놓았다. 그리고 손을 넣기 전에 서랍 안을 먼저 봤다. 무엇이 어디에 어떤 각도로 놓였는지. 남의 집 화장대에 앉기 전에 늘 하던 일이었다. 나갈 때는 들어올 때처럼 두어야 했다.

고무줄로 묶은 버스표 묶음. 고무줄은 두 번 꼬여 있었다.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강릉. 하윤은 한 장씩 넘겼다. 맨 아래가 2023년 10월, 그다음이 11월, 12월. 한 달에 한 장, 빠진 달이 없었다. 출발은 늘 아침 7시대였다. 맨 위가 이달 14일이었다. 서른일곱 장. 표 끝에 ‘현금’이라고 찍혀 있었다. 서른일곱 장 모두.

명함 한 장. 성근건설 비서실장 오규식. 뒤집었다. 뒷면에 도석의 볼펜 글씨가 있었다. 10.10. 그 아래 한 줄. 아버님 일.

그리고 감열지 영수증 한 장. 글자가 거의 날아가 있었다. 하윤은 그것을 창 쪽으로 기울였다. 떡집 김이 유리창을 흐리게 덮고 있었다. 빛이 비스듬히 들어와서야 몇 글자가 떠올랐다. 평택. 병원 장례식장. 주차 정산. 그리고 날짜. 2023-05-15. 시각은 지워지고 없었다.

5월 15일. 모를 수 없는 날짜였다. 아버지 빈소가 차려진 날이었다. 장례식장 지하 계단 맨 아래 칸에 서 있다가, 끝내 들어가지 않고 계단을 올라가 버린 날.

하윤은 노트에 적었다. 배역 노트를 쓰듯이. 다만 이번에 적는 사람은 배역이 아니었다.

사장님. 서랍 맨 아래 칸. 잠기지 않음. 강릉 버스표 37장. 23.10부터 매달. 전부 현금. 오규식 명함. 뒷면 “10.10. 아버님 일.” 평택 병원 장례식장 주차. 23.5.15. “강력계는 사고는 안 맡는다.”

마지막 줄은 서랍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3주 전 이 책상 앞에서 들은 말이었다. 하윤은 그 줄을 맨 아래에 적고 볼펜을 놓았다.

물건은 원래대로 돌려 두었다. 고무줄은 두 번 꼬았다. 명함은 앞면이 위로. 영수증은 버스표 묶음 밑에 반쯤 걸치게. 서랍을 닫고 나서 하윤은 문자 한 통을 보냈다.

내일 밤 9시에 사무실에서 봬요.

답은 20분 뒤에 왔다. 왜. 한 시간 뒤에 한 통이 더 왔다. 알았다.


화요일 밤 9시, 사무실에는 불이 다 켜져 있었다.

정빈은 의상실에서 낮에 하객 대행에 입고 나갔던 정장을 털어 걸고 있었다. 문숙자는 자기 책상에서 장부를 맞추고 있었다. 둘 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다. 하윤이 들어가자 둘은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게 이상했다. 멈추지 않으려고 애쓰는 손이었다. 도석이 무슨 말을 했거나, 둘이 무언가 냄새를 맡았거나.

하윤은 에코백을 어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유리방으로 들어갔다. 가방이 무거웠다. 유리문을 닫았다. 문은 낡아서 끝까지 닫히지 않았다. 늘 손가락 하나만큼 틈이 남았다.

도석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라이터가 책상 위에 서 있었다.

하윤은 앉지 않았다. 노트를 펼쳐 그의 앞에 놓았다. 어제 아침에 적은 쪽.

도석이 읽었다. 한 줄씩.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 줄에서 눈이 멈췄다. 강력계는 사고는 안 맡는다. 자기 말이었다.

“서랍 열었냐.”

“잠겨 있지 않던데요.”

도석은 노트를 덮지도, 밀어내지도 않았다.

“강 형사님.”

도석의 손이 라이터로 갔다. 쥐지는 않았다. 손가락 끝만 닿았다.

“그렇게 부르지 마라.”

“유진 씨는 그렇게 부르던데요.”

라이터가 쓰러졌다. 책상 위를 한 번 굴러 서류 더미에 걸렸다. 도석은 그걸 세우지 않았다.

하윤은 그제야 의자를 끌어 앉았다. 손님 의자였다. 7주 전 정숙이 앉았던 자리. 하윤은 무릎 위에 손을 포갰다. 오른손이 위로 가 있었다. 알아차리고도 바꾸지 않았다.

“다 말해 주세요. 처음부터.” 하윤이 말했다. “사장님이 저한테 사전 인터뷰 하듯이요. 날짜, 관계, 공통 기억, 금지 화제.”

도석은 오래 하윤을 봤다. 형사의 눈이 아니었다. 무엇부터 꺼내야 덜 무너지는지 고르는 사람의 눈이었다. 그러다 고르기를 그만둔 것 같았다. 그는 처음부터 말했다. 질문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윤은 그가 그렇게 말하는 걸 처음 들었다.

“2023년 5월 12일. 그 현장에 내가 들어갔다. 경기남부청 TF. 잔해 밑에 철근이 설계도보다 듬성듬성했다. 그건 사고가 아니었다.”

“강력계는 사고는 안 맡는다면서요.”

“사고면 안 맡지.”

하윤은 그 대답을 받아 적지 않았다. 노트는 그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9월 12일에 유진이가 평택서 민원실에 왔다. 강도석 형사님이세요, 하고. 내 명함을 쥐고 있더라. 압수수색 때 감사팀 책상마다 한 장씩 놓고 나온 거. 왼손에 USB를 쥐었는데 손이 떨려서 고리가 손등을 쳤다. 말은 안 떨었다. 날짜하고 번호로 말했다. 회장님 보고 완료. 그 한 줄 때문에 왔다.”

“9월 20일에 사라지게 도운 것도요.”

“휴대폰을 한강 벤치에 두고 가자고 한 게 나다. 성인이 휴대폰을 두고 사라지면 경찰은 가출로 본다.” 도석은 서류 더미 쪽으로 눈을 내렸다. “내가 경찰이라 알았다.”

“그다음엔요.”

“이듬해 4월에 오규식을 쳤다. 박용수 씨 집에서. 합의서를 들고 와서 애가 보는 앞에서 도장을 찍으라더라.” 그는 오른손 손등을 엄지로 쓸었다. 마디 하나가 다른 마디보다 컸다. 하윤은 그 마디를 2년 동안 봤지만 이유를 물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잘렸다. 9월에 여기 차렸다.”

“왜 하필 대행이에요.”

“이 바닥은 가짜 이름이 일이다. 가짜 딸, 가짜 아들, 가짜 조문객. 누가 한 달에 한 번 강릉에 가든, 누가 사모님하고 한 달에 한 번 전화를 잇든, 아무도 안 묻는다. 묻는 게 실례인 업계니까.”

유리 너머 의상실에서 정빈의 등이 보였다. 정장을 털던 손이 멈춰 있었다. 문숙자의 장부도 한 장도 넘어가지 않았다.

“정빈이랑 실장님은요. 알았어요?”

“모른다.” 도석도 유리 쪽을 봤다. “몰랐다.”

과거형으로 고쳐 말했다. 이제는 알게 됐으니까.

“편지는요.”

“사모님한테 건넨 게 나다.”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지 않았다. 놀랍지 않다는 게 놀라웠다. 일주일 전이었다면 이 방에서 들은 모든 문장이 하윤을 쓰러뜨렸을 것이다. 지금은 하나씩 제자리에 들어갔다. 빈칸이 많은 대본에 대사가 채워지듯이.

남은 빈칸은 하나였다.

“왜 저였어요.”

도석은 쓰러진 것부터 집어 세웠다.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붙잡고 있지 않아도 섰다.

“네가 그 집에 들어갈 자격이 제일 많은 사람이라서.”

“자격이요?”

하윤이 웃었다. 소리 없이, 입꼬리만.

“사장님이 정한 거잖아요. 자격도, 배역도. 제 대본도 사장님이 쓰고.”

도석이 몸을 숙여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버스표 묶음, 명함, 감열지 영수증. 하나씩 꺼내 노트 옆에 놓았다. 영수증은 어제 아침 하윤이 버스표 밑에 반쯤 걸쳐 둔 그대로였다. 왜, 와 알았다, 사이의 한 시간. 그 사이에 그는 사무실에 나와 이 서랍을 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치우지 않았다.

“2023년 5월 15일. 너 거기 있었다. 지하 계단 맨 아래 칸. 빈소 입구에서 다섯 걸음. 내가 진술 받고 나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올 때까지 발 하나 안 움직이더라.”

하윤은 말이 없었다.

“담배를 권했다. 피울래요, 하고. 네가 안 피워요, 하더라.”

“기억 안 나요.”

“그럴 거다. 넌 그날 아무도 안 봤다. 빈소 안쪽만 봤다.”

하윤은 그날을 떠올렸다. 검은 원피스에 흰 운동화. 검은 구두가 없어서 그냥 신고 갔다. 계단 난간이 손바닥에 차가웠다. 조화 리본의 금박 글씨가 형광등에 번쩍였다. 신발장 앞에 작업화가 많았다. 흙이 묻은 채로. 빈소 안에서 누가 소주잔을 엎는 소리. 그리고, 켰다 껐다 하는 작은 소리. 그게 그날 밤의 소리였는지, 지금 이 방의 소리인지 하윤은 가려낼 수 없었다. 도석의 엄지가 뚜껑 위에 얹혀 있었다.

“제 공연 보고 연락하신 거라면서요. 입사할 때.”

“기록을 찾았다. 네 이름 넣고. 「빈집」 한 줄 나오더라.”

“그거 보고 연기 잘하는 줄 알았어요?”

“닮아서.”

“유진 씨랑요.”

“그래.”

“그게 다예요?”

도석이 손을 뗐다. 이번엔 쓰러지지 않았다.

“네가 빈소에 못 들어가는 걸 봤다.” 그의 목소리가 낮았다. 욕이 한 마디도 섞이지 않았다. “이번엔 들어가게 해 주고 싶었다.”

유리방 안이 조용했다. 떡집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바닥으로 올라왔다.

“그건 제가 정해요.”

하윤이 말했다. 크지 않게. 도석이 고개를 들었다.

“들어갈지 말지. 언제 들어갈지. 누구 딸로 들어갈지. 그건 제가 정해요, 사장님. 사장님이 아니라.”

도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는 얼굴이 아니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하나를 고르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하윤은 그 얼굴을 노트에 적지 않았다. 적을 노트가 지금 그의 앞에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요.” 하윤이 말했다. “회장님은 아세요. 제가 누군지.”

도석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언제부터.”

“첫 달에요. 오규식 씨가 뒷조사를 했대요. 개천절에 회장님이 직접 그러셨어요. 자네, 서기철 씨 딸이지.”

“왜 말 안 했냐.”

“사장님은요?” 하윤이 명함을 집어 뒷면이 보이게 놓았다. 10.10. 아버님 일. “오규식 씨 온 거 왜 말 안 했어요? 서하윤 씨한테 안부 전해 달라고, 아버님 일은 늘 마음이 아프다고 한 거.”

도석은 명함을 봤다. 자기 글씨를.

“우리 둘 다 똑같네요. 하나씩 숨기고.” 하윤은 명함을 다시 뒤집었다. “셈은 맞네요.”

“하윤아.”

“사장님이 맨날 그랬잖아요. 역할 밖으로 나가지 마라.” 하윤은 그 문장을 도석의 목소리로 했다. 짧고 낮게, 끝을 내리꽂듯이. 2년 동안 들은 대로. 그리고 자기 목소리로 돌아왔다. “저는 그게 저 지키려는 말인 줄 알았어요. 남의 이야기에 휘말리지 말라고. 다치지 말라고.”

도석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사장님 대본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거였네요.”

“그런 거 아니다.”

“그럼 뭐예요.”

도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윤은 기다렸다. 7초. 조만수가 영정 앞에서 고개를 숙이던 시간만큼. 그 시간 동안 도석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저도 대행이었네요.” 하윤이 말했다. “사장님 대행.”

하윤은 에코백을 무릎 위로 올렸다. 지퍼를 열었다. 검은 몰스킨 다섯 권. 어젯밤 원룸 책장에서 다 꺼내 왔다. 1권은 모서리가 둥글게 닳았고, 3권은 장례식장에서 비를 맞아 표지가 울었다. 5권에는 고무줄이 감겨 있었다. 하윤은 그 다섯 권을 도석의 노트 옆에, 버스표와 명함과 영수증 위에 쌓았다.

“이거 두고 갈게요.”

“그건 네 거다.”

“아니요. 사장님이 쓴 대본 받아 적은 거예요.” 하윤은 맨 위 5권의 고무줄을 한 번 튕겼다. “성북동 얘기는 거의 다 이 안에 있어요. 회장님 손, 사모님 피아노, 간병인 여사님 약통. 필요하실 거예요.”

“하윤아.”

“하나만 더 여쭤볼게요.” 하윤이 일어났다. “유진 씨도 알았어요? 제가 누구 딸인지.”

도석은 노트 다섯 권을 보고 있었다.

“그건 유진이한테 물어봐라.”

하윤은 그 대답에 처음으로 웃었다. 이번엔 눈까지.

“이제야 사장님 같네요.”

하윤은 의자를 원래 자리로 밀어 넣었다. 들어올 때처럼.

“그만두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깍듯한 말이었다. 하윤은 화가 나면 존댓말이 반듯해졌다. 이 사무실에서 그 버릇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도석은 더더욱.

“성북동은 어쩔 거냐.”

질문이었다. 하윤은 문손잡이를 잡은 채 돌아보지 않았다.

“그것도 제가 정해요.”


의상실을 지날 때 정빈이 옷걸이를 든 채 서 있었다. 하윤은 그 앞을 지나갔다. 정빈이 따라 나왔다.

계단 중간에서 정빈이 하윤의 손목을 잡았다. 웨딩홀 복도에서처럼 가볍게가 아니었다. 꽉.

“누나.”

“놔.”

“누나, 잠깐만. 나 무슨 얘긴지 반도 못 알아들었는데, 그래도 잠깐만.”

하윤은 정빈의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세게 하지 않았다. 정빈은 힘을 주고 있었지만 하윤이 펴는 손가락은 하나씩 펴졌다. 마지막 새끼손가락까지.

“정빈아. 너 내일 아들 몇 집이야.”

정빈이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두 집.”

“잘해.”

하윤은 계단을 내려갔다. 위에서 유리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문숙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디오 목소리가 아니었다. 엄마 목소리도, 이모 목소리도 아니었다. 하윤이 2년 동안 한 번도 듣지 못한, 문숙자 자기 목소리였다.

“당신이 틀렸어.”

대답은 없었다. 딸깍, 하고 라이터 뚜껑 닫히는 소리가 났다. 부싯돌 긁는 소리는 이어지지 않았다.

떡집 셔터는 내려가 있었다. 하윤은 망원시장 쪽으로 걸었다. 에코백이 가벼웠다. 너무 가벼워서 어깨가 자꾸 끈을 찾았다.


수요일 아침, 하윤은 알람 없이 깼다. 나갈 곳이 없었다.

휴대폰 검색창에 다섯 글자를 쳤다. 평택 붕괴. 3년 동안 한 번도 쳐 보지 않은 글자였다. 화면이 기사로 가득 찼다. 하윤은 가장 오래된 것을 골랐다.

2023년 5월 12일 오후 1시 5분께, 경기 평택시 포승읍 성근물류센터 신축 공사 현장에서 4층 슬래브 일부가 무너져 작업자 3명이 숨졌다.

3년 전에는 여기서 창을 닫았다. 하윤은 다음 문장으로 내려갔다.

숨진 작업자는 철근공 서기철(57) 씨, 형틀목수 박용수(45) 씨, 신호수 응우옌 반 탄(31) 씨로……

하윤의 눈이 그 줄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아버지 이름은 괄호 안의 숫자와 함께 있었다. 57. 하윤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마흔한 살이었다. 열 살 때 집을 나간 사람. 괄호 안의 숫자는 하윤이 본 적 없는 아버지의 나이였다.

박용수(45). 응우옌 반 탄(31).

두 이름은 개천절 거실에서 이미 들었다. 회장이 매일 부르는 사람의 소리로 부르던 이름. 괄호 안의 숫자는 처음이었다. 마흔다섯. 서른하나. 그날 하윤은 스물여섯이었다.

세 사람. 유진의 편지 마지막 줄. 이름에 이제 나이가 붙었다.

기사 사진은 회색 가림막이었다. 가림막 위로 크레인 팔 하나가 멈춰 있었다. 가림막 틈으로 휘어진 철근 끝이 몇 가닥 삐져나와 있었다. 하윤은 사진을 손가락으로 벌려 키웠다. 철근 끝이 화면 가득 커졌다. 녹이 슬기 전의, 아직 회색인 쇠였다.

하윤은 기사를 하나씩 다 읽었다. 기소 기사. 회장의 이름. 공판 정지 기사. ‘피고인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 1심 기사. 현장소장 유죄. 회장 몫의 재판은 여전히 멈춰 있다는 한 줄. 하윤이 3년 동안 채널을 돌려 피한 문장들이었다. 다 읽는 데 40분이 걸렸다. 40분이면 되는 일이었다.

창밖이 어두워질 때까지 하윤은 방바닥에 앉아 있었다.


2021년 4월 9일. 대학로 지하 소극장, 객석 일흔두 석.

「빈집」은 철거를 앞둔 동네의 빈집에 숨어 사는 여자 이야기였다. 하윤은 주인공 연희였다. 첫 장면에서 연희는 손전등을 들고 무대 왼쪽 문으로 들어와, 아무도 없는 방에 대고 혼잣말을 한다. 3분짜리 독백. 하윤은 그 독백을 석 달 동안 연습했다.

손전등 불빛이 객석 쪽으로 한 번 쓸고 지나가는 동선이 있었다. 그 순간 객석 셋째 줄이 보였다.

손이 먼저 보였다. 무릎 위에 모자를 쥔 손. 손가락 마디가 굵고, 손등이 햇볕에 까맸다. 철근을 30년 묶은 손이었다. 하윤은 그 손을 얼굴보다 먼저 알아봤다. 열 살 때 마지막으로 잡아 본 손이었다. 얼굴은 그다음에 왔다. 몸에 맞지 않는 점퍼. 반쯤 센 머리.

대사가 사라졌다.

다음 문장이 무엇이었는지 하윤은 지금도 기억하지 못한다. 석 달 동안 외운 3분이 통째로 빠져나갔다. 손전등이 손 안에서 떨렸다. 불빛이 무대 바닥을 이리저리 헤맸다. 객석에서 누군가 기침을 했다. 얼마나 서 있었는지 하윤은 몰랐다. 나중에 조연출이 1분 40초였다고 했다. 조명이 꺼졌다. 막이 내려왔다.

분장실에서 나왔을 때 셋째 줄은 비어 있었다.

그 뒤로 하윤은 오디션장 문 앞에서 다섯 번 돌아섰다. 아버지가 왜 그날 거기 있었는지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아버지가 대학로 소극장 공연 날짜를 어떻게 알았는지도. 물을 사람은 둘이었다. 한 사람은 2년 뒤에 평택에서 죽었다. 다른 한 사람에게는 전화를 걸 수 없었다.

목요일 밤, 하윤은 그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을 화면에 띄웠다. 엄마. 그 아래 3주 전 카톡이 답 없이 남아 있었다. 그 회사 사람이 또 연락 왔더라. 그리고 서초동 엘리베이터 앞의 목소리. 어머님께도 안부 전해 주십시오.

하윤은 입력 칸에 썼다. 엄마, 혹시 그 회사 사람이.

지웠다. 통화 버튼에 엄지를 올렸다. 누르지 않았다. 화면이 저절로 꺼질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성북동에서는 일주일 내내 연락이 없었다. 정숙도, 마영순도. 하윤이 그만뒀다는 걸 정숙은 도석에게 들었을 것이다. 하윤은 그 침묵이 정숙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것.

10월 31일 토요일 오후 2시.

하윤은 원룸 바닥에 앉아 있었다. 벽시계가 2시를 가리켰다. 2시는 성북동 대문 초인종을 누르는 시각이었다. 지금쯤 마영순이 대문을 열 시간. 회장의 휠체어가 거실 창가에 있을 시간. 정숙이 피아노 뚜껑을 열어 두고 기다릴 시간. 시계 초침이 12를 지났다. 아무도 대문 앞에 서 있지 않았다.

회장 집에 처음으로 ‘유진’이 오지 않는 토요일이었다.

지갑 동전 칸에는 놋쇠 열쇠가 그대로 있었다. 빨간 실도. 하윤은 노트 다섯 권을 두고 나오면서 그 열쇠는 두고 오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밤이 되었다. 하윤은 휴대폰으로 「엘리제를 위하여」 악보를 띄웠다. 손가락으로 벌려 23마디를 키웠다. 왼손 음표 세 개. 유진이 늘 틀린 곳. 하윤이 일부러 틀리고, 한 번은 일부러 안 틀리고, 한 번은 진짜로 틀린 곳. 하윤은 방바닥에 왼손을 올려놓고 그 세 음을 짚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손뼉 칠 사람도 없었다.

9시 40분, 휴대폰이 울렸다. 정숙이었다.

토요일에 귤을 샀는데 아무도 안 까요.

하윤은 그 문장을 읽었다. 한 번, 두 번. 답장 칸을 누르지 않았다.

귤 한 봉지가 식탁 위에 있을 것이다. 아무도 까지 않은 채. 회장은 귤을 자기 손으로 까지 않는다. 까 주면 먹는다. 평생 그랬다고 유진이 말했다.

하윤은 습관처럼 가방에 손을 넣었다. 안주머니가 비어 있었다. 노트는 망원동 유리방 책상 위에 있었다. 1권부터 5권까지. 첫 주말의 그 줄도 거기 있었다. 9/12(토). 점심 거부, 상을 밂. 추석 밤 정원에서 들은 그 줄도. 12일은 그대로 보내라.

그 노트들이 기억하던 걸 이제 하윤이 기억해야 했다. 다 기억할 수는 없었다. 하나만 고르라면.

하윤은 볼펜 뚜껑을 열었다. 왼손을 펴서 무릎 위에 올렸다. 손금 한가운데에 볼펜 끝을 댔다. 잉크가 피부에서 한 번 미끄러졌다. 하윤은 꾹 눌러 다시 썼다.

12일.

그리고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 안의 숫자가 번지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