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 · 13장 증인
대행 · 도해

13장 증인

서울 하윤의 원룸, 2026년 10월 20일 화요일
성년후견 심문기일 D-56
약 13분

편지는 네 번 접혀 있었다. 세로로 한 번, 가로로 한 번, 그걸 다시 반으로. 봉투에 맞추려고 접은 게 아니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려고 접은 모양이었다. 접힌 자리마다 종이 결이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오래 들고 다닌 편지였다.

처음 읽은 건 일요일 밤 성북동 거실에서였다. 피아노 의자에 걸터앉아, 스탠드 하나만 켜 놓고. 정숙은 식탁에 앉아 등을 보이고 있었다. 하윤이 다 읽을 때까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 등이 많은 걸 말했다. 정숙은 이 편지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언제 의자 밑에 붙였는지도. 하윤은 묻지 않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집으로 오는 택시 안에서 읽었다. 네 번째는 월요일 새벽 4시였다. 화요일 아침, 원룸 접이식 탁자 위에 편지와 열쇠를 나란히 놓고 다섯 번째로 읽었다.

열쇠는 놋쇠였다. 요즘 문에는 잘 쓰지 않는, 길쭉하고 이가 굵은 열쇠. 머리에 빨간 실이 몇 바퀴 감겨 있었다. 다른 열쇠와 헷갈리지 않으려고 누군가 감은 실이었다. 매듭이 단정했고, 실 끝을 안으로 밀어 넣어 두었다. 피아노 교사의 손 같았다.

편지는 볼펜으로 썼다. 꾹꾹 눌러 써서 뒷면에 글자가 도드라졌다.

하윤 씨.

이렇게 불러도 될지 모르겠어요. 저는 하윤 씨를 사진으로만 봤어요.

순서대로 쓸게요. 감사팀에서 그렇게 배웠어요. 날짜 먼저, 생각은 나중에.

2023년 8월. 평택 물류센터 현장 원가를 감사했어요. 철근 발주량이 설계 수량보다 적었어요. 다른 항목은 다 맞았고 전단보강근만. 정확히 30퍼센트였어요. 사고 두 달 전 날짜로 원가절감 지시가 나간 기록이 있었고, 그다음 날 부사장실에서 보낸 이메일이 한 통 있었어요. 본문은 한 줄이었어요. “회장님 보고 완료.”

2023년 9월 5일 저녁. 서재에서 아부지한테 물었어요. 아부지는 금고 앞에 서서 제 말을 끝까지 들었어요. 그리고 한 마디만 했어요. “덮어라.”

9월 6일 아침. 회사 서버에서 그 이메일 원본이 지워졌어요. 전날 밤 제 USB에 옮겨 둔 사본만 남았어요. 그날 퇴근길부터 같은 차가 제 뒤에 있었어요. 회색 그랜저, 번호 끝자리 4417.

9월 20일. 저는 집을 나왔어요. 휴대폰은 두고 나왔어요. 엄마한테는 아무 말도 못 했어요.

여기까지가 기록이에요. 지금부터는 부탁이에요.

서재 금고 안에 원가절감 지시서 원본이 있어요. 문서번호는 여기 안 쓸게요. 이 편지가 다른 손에 갈 수도 있으니까요. 거기 아부지 서명이 있을 거예요. 제가 3년 동안 머릿속으로 백 번은 본 서명이에요. 같이 넣은 열쇠는 서재 문 열쇠예요. 엄마가 넣어 줄 거예요.

금고 번호는 몰라요. 여섯 자리라는 것만 알아요. 9월 5일에 아부지가 등 뒤로 번호를 누를 때 삐 소리가 여섯 번 났어요. 제 생일도, 엄마 생일도, 회사 창립일도 아니었어요. 그날 밤 제가 눌러 봤어요. 아부지는 숫자로 기념일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에요. 숫자는 장부에 적는 사람이에요.

하윤 씨한테 이런 부탁을 할 자격이 저한테 없다는 거 알아요. 하윤 씨가 그 집에서 누구로 지내는지도 알아요. 제 옷을 입고, 제 방에서 자고, 저 대신 아부지 귤을 까 주는 거.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어느 쪽이 더 큰지는 모르겠어요.

아부지를 감옥에 보내 달라는 게 아니에요. 그 세 사람한테 누가 그랬는지 말해 달라는 거예요.

유


세 사람.

하윤은 매번 거기서 멈췄다. 앞의 문장들은 날짜와 숫자였다. 유진은 그것들을 장부처럼 적었다. 그런데 마지막 줄에서만 숫자가 사람이 되었다.

이름은 다 알았다. 개천절 오후 거실에서 회장 입으로 들었다. 같은 무게로, 같은 간격을 두고.

그런데 나이도 얼굴도 몰랐다. 3년 전 기사를 끝까지 읽지 않았으니까. 첫 문단에서 ‘3명 사망’까지 읽고 창을 닫았다. 그 뒤로 뉴스에서 평택이라는 말이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 그런 사람에게 유진은 지금, 그 세 사람한테 말해 달라고 했다.

유진은 알고 쓴 걸까. 그 셋 중 하나가 이 편지를 읽는 사람의 아버지라는 걸.

하윤은 편지를 원래 자국대로 접었다. 그리고 노트를 펼쳤다.

유. 날짜로 말한다. 23.8 / 9.5 / 9.6 / 9.20. 생각은 나중에. 금고: 여섯 자리. 기념일 아님. 장부. “세 사람.”

열쇠는 지갑 동전 칸에 넣었다. 지퍼를 닫는데 빨간 실이 삐져나왔다. 하윤은 실 끝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정숙이 한 것처럼.


오후에는 사무실에 나갔다.

화이트보드의 이번 주 하윤 칸은 평일까지 비어 있었다. 평일 칸이 빈 건 처음이었다. 문숙자가 일부러 비워 둔 모양이었다. 성북동 일이 길어질 거라는 걸 하윤보다 먼저 안 사람처럼.

도석은 유리방에 있었다. 하윤이 들어가자 고개를 들었다가 바로 서류로 내렸다.

“주말은.”

“똑같았어요.”

“회장님은.”

“리야드요. 모래가 밀가루 같았대요.”

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터가 책상 위에 세워져 있었다. 지난주 장부의 칸 하나가 떠올랐다. 10월 10일. 오규식, 성근건설. 그 칸을 문숙자의 볼펜이 적었고 하윤의 눈이 읽었다. 도석의 입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어볼 수 있었다. 사장님, 오규식 씨가 왜 왔어요. 하윤은 묻지 않았다. 대신 편지가 든 가방을 무릎 위로 끌어올렸다. 둘 다 하나씩 숨기고 있었다. 셈은 맞았다.

“사장님.”

“왜.”

“아니에요.”

도석은 그래서 뭔데, 하고 묻지 않았다. 질문으로 대답하던 사람이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하윤은 유리방을 나오며 그게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8시, 모르는 번호가 울렸다.

“서하윤 씨. 오규식입니다.”

성북동 대문 앞에서 처음 들었던 목소리였다. 공손하고, 이름을 꼭 불렀다.

“내일 오전 11시에 시간 좀 내 주시겠습니까. 변호사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서초동 법무법인 대해입니다. 주소는 문자로 드리겠습니다.”

“회장님이 부르신 거예요?”

“회장님 일입니다, 서하윤 씨.”

회장님이 부른 것과 회장님 일은 다른 말이었다. 하윤은 전화를 끊고 그 두 문장을 노트에 나란히 적었다.


법무법인 대해는 서초동 법원 맞은편 빌딩 14층에 있었다. 회의실 한쪽 벽이 통유리였고, 유리 너머로 법원 건물의 지붕이 보였다. 탁자 위에 생수 네 병, 하윤 몫으로 놓인 커피 한 잔, 파란 서류철 하나.

고지석은 마흔일곱이라고 했다. 머리를 짧게 다듬었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맸다. 친근해 보이려고 일부러 느슨하게 맨 넥타이였다. 매듭 자체는 너무 반듯했다. 아침에 단단히 맸다가 회의실에 들어오기 직전 손가락 하나만큼 내린 매듭. 하윤은 그런 매듭을 신랑 대기실에서 자주 봤다.

오규식은 고지석 옆이 아니라 탁자 끝, 문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수첩을 펴 놓고 볼펜 뚜껑은 닫은 채였다.

“바쁘실 텐데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지석이 웃었다. “회장님 형사 사건 변호를 맡고 있습니다. 공판이 2년 넘게 정지돼 있다는 건 아시죠?”

“들었어요.”

“최근에 검찰이 공판 재개를 검토한다는 얘기가 들립니다. 회장님 상태가 아직 정지 사유에 해당하는지 다시 보겠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법원은 의사 의견을 다시 듣고, 필요하면 곁에 있는 사람들 이야기도 듣습니다.” 고지석이 서류철을 한 장 넘겼다. “서하윤 씨는 지난 한 달 반 동안 주말마다 회장님과 지내셨죠. 식사, 산책, 잠드시는 것까지. 가족 다음으로 가까이에서 본 분입니다.”

“그래서요.”

“법정에서 그걸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회장님이 어떤 상태인지. 보신 그대로.”

보신 그대로. 하윤의 눈앞에 새벽 2시의 정원이 떠올랐다. 휠체어 없이 서 있던 등. 손가락 사이의 담배. 낮고 분명한 목소리. 본 그대로 말하면 공판은 다음 달에 열린다.

“12월 15일 전에만—”

서류철의 문장을 따라 읽던 사람처럼, 고지석이 말하다 멈췄다. 탁자 끝에서 볼펜 딸깍하는 소리가 났다. 오규식이 뚜껑을 열었을 뿐이었다. 고지석은 웃으며 말을 고쳤다.

“형사 쪽이 먼저입니다. 날짜는 아직 안 잡혔고요.”

12월 15일. 형사 법정에는 그런 날짜가 없었다. 그 날짜는 민혁이 식탁에서 꺼낸 날짜였다. 가정법원 심문기일.

“사례는 1억입니다.” 고지석이 날씨를 말하듯 말했다. “증인 여비와는 별개로, 그동안 회장님을 돌봐 주신 데 대한 감사 표시로요. 계약서는 돌봄 자문으로 쓰겠습니다.”

1억. 회당 80만 원을 백스물다섯 번. 하윤의 머리가 먼저 계산을 했다. 2년 넘는 주말이었다.

“연기 경력에도 좋은 줄이 될 겁니다.” 고지석이 덧붙였다. “법정에 서 본 배우는 흔치 않으니까요.”

하윤은 커피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증언은 대행이 안 돼요. 저희 회사 규칙이에요.”

“압니다. 그래서 대행으로 모시는 게 아닙니다.” 고지석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럼 대행 말고, 서하윤 씨 본인으로.”

본인으로. 하윤은 그 말을 입 안에서 굴렸다. 증인석에서 손을 드는 건 유진이 아니다. 서하윤이다. 선서를 하고 나서, 회장님은 밤에 정원을 걸은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서하윤이다. 선서한 증인이 거짓을 말하면 위증이었다. 하윤은 그 단어를 얼마 전 범인도피죄 기사를 찾아보던 밤, 같은 화면 아래쪽에서 읽었다.

“회장님이 이걸 원하세요?”

“회장님은 지금 의사 표현이 어려우신 분입니다.” 고지석이 말했다. 아무렇지 않게. 그 문장이 이 일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 못한다. 하윤은 고지석이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알아도 상관없거나. “가족분들 뜻입니다.”

“어느 가족이요?”

고지석이 탁자 끝을 봤다. 오규식이 대답했다.

“차민혁 대표님께서 회장님 걱정이 많으십니다, 서하윤 씨.”

하윤은 그제야 이 방의 자리를 이해했다. 고지석은 회장의 변호사였다. 그런데 오늘 볼펜을 쥔 사람은 탁자 끝에 앉아 있었다.

이건 회장이 시킨 일이 아니었다.

회장은 변호사 입을 빌려 값을 부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개천절 오후, 피아노 옆에서 그는 직접 물었다. 얼마 받나. 그리고 직접 불렀다. 열 배. 숫자를 남의 입에 맡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셈도 달랐다. 하윤은 지난 토요일 식탁에서 민혁이 한 말을 떠올렸다. 반대하시면 법원이 물을 겁니다. 아버지가 사무를 처리할 수 있는지. 회장에게 두 법정은 서로 반대 답을 요구했다. 그런데 민혁에게는 두 법정의 답이 같았다. 아버지는 치매다. 형사 법정에서 그렇게 말한 증인의 진술은 가정법원에서도 쓰일 것이다. 공판은 계속 멈춰 있고, 후견은 개시되고, 아버지는 경기도 요양병원으로 가고, 집은 팔리고, 서재 금고는 다른 사람 손에 열린다.

덫에 걸린 사람은 하나였다. 그 덫의 마지막 매듭을 묶어 달라고, 지금 누군가 1억을 내밀고 있었다.

“생각해 볼게요.”

“물론입니다.” 고지석이 명함을 밀었다. “편하실 때 연락 주세요.”

엘리베이터 앞까지 오규식이 배웅했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가 말했다.

“서하윤 씨는 대전 분이시죠.”

하윤은 엘리베이터 버튼의 불빛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대전은 요즘 가을이 늦게 온다더군요.” 오규식이 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이미 불이 들어와 있었다. “어머님께도 안부 전해 주십시오.”

문이 열렸다. 하윤은 탔고 오규식은 타지 않았다. 문이 다 닫힐 때까지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서초동 대로변에서 하윤은 횡단보도 신호를 두 번 보냈다.

한 달 반 사이에 하윤에게 일을 맡긴 사람이 넷이 되었다. 하윤은 신호등 기둥에 노트를 대고 적었다.

고용주. 회장: 유진을 찾아라. (열 배) 유진: 금고를 열어라. (부탁) 차민혁: 증언해라. (1억) 사장님: 역할 밖으로 나가지 마라. (80) 나:

마지막 줄은 비워 두었다. 콜론 뒤에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첫 줄의 일은 이미 반쯤 끝나 있었다. 유진의 글씨가 지갑 속에 있었으니까. 하윤은 그 사실을 회장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다. 왜 없는지는 아직 몰랐다. 신호가 세 번째로 바뀌었다. 하윤은 노트를 덮고 건넜다.


10월 24일 토요일, 성북동

열쇠는 지갑에서 카디건 주머니로 옮겼다. 남색 카디건 오른쪽 주머니. 걸을 때마다 놋쇠가 허벅지에 닿았다. 하윤은 그 무게를 하루 종일 의식했다.

서재는 1층 복도 끝, 회장 침실 바로 옆이었다. 두 문 사이에 벽 하나. 그 앞에 오늘은 접이식 의자가 놓여 있었다.

마영순이 거기 앉아 있었다. 무릎에 일주일 치 약통을 펴 놓고 요일 칸마다 알약을 나눠 담았다. 아침 칸에 하나, 점심 칸에 하나, 저녁 칸에 둘. 다 담고 나서는 수건을 갰다. 수건을 다 개고 나서는 회장의 내의를 다렸다. 다리미판을 서재 문 앞까지 끌고 와서.

하윤이 화장실에 가느라 복도를 지나면 마영순이 고개를 들었다.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가씨?”

“아뇨.”

마영순은 하던 일로 돌아갔다. 손등이 거칠었고 엄지손톱이 반쯤 깨져 있었다. 그 손은 하윤이 지나갈 때마다 하던 일을 멈췄다가, 지나가면 다시 움직였다. 지키는 손인지 그냥 쉬는 손인지 하윤은 가려내지 못했다. 이 집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사람의 손을 읽지 못했다.

정숙은 오후 내내 피아노를 쳤다. 쇼팽, 슈만, 하윤이 모르는 곡들. 「엘리제를 위하여」는 치지 않았다. 열쇠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일요일 밤 이후로 정숙은 그 편지가 세상에 없는 것처럼 굴었다. 그게 정숙식 응원이었다.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것.

회장과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개천절 이후로 둘만 있으면 공기가 굳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연기를 했다. 귤을 깠고, 리야드 이야기를 들었고, 아부지, 하고 불렀다. 둘만 남으면 둘 다 입을 닫았다. 연기를 멈추는 것도 아니고 계속하는 것도 아닌 채로.

저녁 7시쯤, 마영순이 설거지를 하러 부엌에 들어갔다. 하윤은 거실에서 일어나 복도 끝을 봤다.

회장이 거기 있었다.

휠체어가 서재 문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누가 거기 세워 둔 것인지, 회장이 손으로 바퀴를 밀어 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회장은 고개를 가슴께로 떨군 채 졸고 있었다. 무릎 담요가 반쯤 흘러내렸다. 휠체어 발판이 서재 문턱에 거의 닿아 있었다. 문을 열려면 휠체어를 치워야 했다. 휠체어를 치우려면 회장을 깨워야 했다.

하윤은 복도 중간에 섰다. 카디건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이 열쇠 머리의 실을 만졌다.

회장의 입술이 움직였다. 잠꼬대처럼 낮게.

“리야드에선… 자재 창고 열쇠를 반장이 찼다. 허리춤에. 잘 때도 찼어.” 숨을 한 번 쉬었다. “잘 때도.”

눈은 감겨 있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하윤은 알 수 없었다. 경고인지, 자랑인지, 그냥 40년 전 모래 냄새인지. 하윤은 돌아서 거실로 갔다. 손끝에 실의 감촉이 오래 남았다.

그날 밤 2시, 하윤은 계단을 내려갔다. 열 번째 칸쯤에서 회장 침실 문 아래로 새어 나오는 빛이 보였다. 스탠드 불빛. 그 안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아주 천천히, 한 장.

하윤은 다시 올라갔다. 유진의 방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이 집에는 잠들지 않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일요일 저녁 6시, 대문 앞에서 정숙이 하윤의 카디건 깃을 바로잡아 주었다. 그 손이 오른쪽 주머니 위를 한 번 스쳤다. 놋쇠의 모양을 확인하듯이.

“서두르지 말아요.” 정숙이 말했다. “그 애도 3년을 기다렸어요.”


한성대입구역으로 내려가는 길,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하윤은 휴대폰을 꺼냈다.

일주일 동안 그 번호를 일곱 번 눌렀다. 일곱 번 다 통화 버튼 앞에서 지웠다. 여덟 번째에 눌렀다.

신호가 다섯 번 갔다.

”…네.”

여자 목소리였다. 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났다. 트로트, 박수 소리. 누군가 멀리서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불렀다. 늙은 목소리였다.

“유진 씨예요?”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텔레비전 소리가 멀어졌다. 문을 닫고 복도로 나온 듯했다.

“편지 읽었어요?”

하윤은 그 목소리를 알 것 같았다. 사전 인터뷰 때 정숙이 들려준 녹음 속 유진은 노래방에서 소리를 지르고 생일 케이크 앞에서 웃었다. 높고 밝은 목소리. 지금 목소리는 그보다 낮았다. 밤 복도에서 남을 깨우지 않게 말하는 데 익숙해진 목소리였다. 3년이 그 목소리를 반음쯤 내려놓았다.

“다섯 번 읽었어요.”

“그럼 됐어요.” 짧은 숨. “번호, 편지에 안 썼죠.”

“네.”

“성근-기획-2303-017.”

외운 문장이었다. 하윤은 외운 문장을 안다. 그런데 이건 연습해서 외운 게 아니었다. 잊지 못해서 외워진 쪽이었다.

“2023년 3월 8일. 원가 시스템에 번호만 남아 있었어요. 원본은 못 봤어요. 그러니까 금고에 있다는 거예요.”

하윤은 무릎 위에 노트를 펴고 받아 적었다. 볼펜이 한 번 미끄러졌다.

성근-기획-2303-017. 23.3.8. 유진도 원본은 못 봄.

“금고 앞에 못 갔어요.” 하윤이 말했다. “간병인이 서재 앞을 안 떠나요. 회장님도요. 휠체어를 서재 문 앞에 대 놓고 주무셨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한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 유진이 작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에 가까웠다.

“아부지 그러는 거 여전하네요. 지키고 싶은 거 앞에서 자요. 고등학교 때 제가 밤에 몰래 나가려고 하면, 제 방 문 앞에서도 그랬어요.”

“아부지는요.” 유진의 목소리가 조금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밥 잘 드세요?”

하윤은 첫 주말 노트에 적은 한 줄을 떠올렸다. 9월 12일, 점심상을 밀어냄.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네. 귤도 잘 드세요.”

“아부지는 귤 자기 손으로 안 까요. 까 주면 먹어요. 평생 그랬어요.”

뒤에서 다시 “선생님” 하는 소리가 났다. 아까보다 가까웠다. 유진이 수화기를 손으로 막는 소리, 무언가 짧게 대답하는 소리. 그리고 돌아왔다.

“들어가 봐야 돼요.”

“유진 씨, 하나만요.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유진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뭔가 생각났다는 듯, 아까보다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녹음 속 그 목소리가 처음으로 조금 묻어났다.

“근데요.”

“네.”

“강 형사님 말대로 진짜 비슷하네요, 목소리.”

하윤은 벤치에서 등을 뗐다.

“누구요?”

통화가 끊겼다.

버스가 왔다가 갔다. 하윤은 타지 않았다. 휴대폰을 귀에서 떼지 못했다. 끊긴 신호음이 다 지나간 뒤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