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 · 12장 나야
대행 · 도해

12장 나야

서울 성북구 성북동, 2026년 10월 17일 토요일
성년후견 심문기일 D-59
약 11분

금요일 밤 하윤은 도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다섯 번 가고 그가 받았다.

“왜.”

하윤은 장부의 그 칸을 생각했다. 10:40, 오규식. 입을 열면 그 이름부터 나올 듯했다. 그 이름 뒤에 따라 나올 것들도. 회장의 열 배, 서기철 씨 딸, 아버님 일. 하나를 꺼내면 줄줄이 딸려 나올 것들이었다.

“아니에요.”

“뭐가 아닌데.”

“내일 성북동 가요. 그 말 하려고요.”

“매주 가잖아.”

“그러니까요.”

도석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라이터 켜는 소리가 났다. 껐다. 그는 끊는다는 말 없이 끊었다.

그래서 하윤은 묻지 못한 질문을 들고 토요일 오후 두 시에 성북동 대문 앞에 섰다. 남색 카디건, 어깨까지 푼 머리, 왼쪽 눈썹 위에 정숙이 가르쳐 준 대로 두드려 바른 컨실러.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리고 유진의 목소리로 들어갔다.


회장은 거실 창가에 있었다. 휠체어, 무릎 담요, 반쯤 열린 입. 하윤이 들어가자 그는 고개를 돌려 “유진아” 하고 웃었다. 마영순이 그 옆에서 담요를 고쳐 덮었다.

“아부지, 귤 까 줄까?”

“까라. 까.”

개천절 이후 둘은 이런 식이었다. 남이 있을 때는 아버지와 딸이었다. 귤, 리야드, 「엘리제를 위하여」. 남이 없을 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난주 토요일에도 그랬다. 회장은 그날의 협상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 하윤도 답을 내놓지 않았다. 열 배는 거실 공기 어딘가에 떠 있었다. 둘 다 그걸 외면하려고 귤에만 눈을 두었다.

마영순이 약을 챙기러 부엌으로 갔다.

“리야드는 모래가 밀가루 같았다.” 회장이 말했다. “밀가……”

부엌 문이 닫혔다. 회장의 말이 거기서 끊겼다. 문장 중간이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에서 멍한 기운이 빠졌다. 하윤이 왼손으로 귤 꼭지를 누르자 껍질이 한 줄로 이어졌다. 둘 다 말하지 않았다. 벽시계 초침 소리가 피아노 쪽에서 돌아왔다.

마영순이 쟁반을 들고 부엌 문을 열었다.

”……루 같았어.” 회장이 말했다. 끊긴 자리에서 정확히. 입이 다시 반쯤 열렸다. “밀가루. 유진아, 밀가루.”

하윤은 귤 한 쪽을 그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손이 컸다. 손톱 밑이 깨끗했다.

지난주 토요일 오전 열 시 40분에 오규식이 망원동에 왔다. 그날 오후 하윤은 이 거실에서 이 손에 귤을 올려놓았다. 회장은 알았을까. 하윤은 그 질문을 귤껍질과 함께 쥐었다. 껍질이 손바닥 안에서 접혔다.


세 시에 정숙이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이리 와요. 23마디.”

정숙은 의자 왼쪽 끝에 앉고 하윤에게 오른쪽을 내줬다. 의자가 둘에게는 좁았다. 정숙의 어깨가 하윤의 어깨에 닿았다. 라벤더 핸드크림 냄새가 났다.

“지난번엔 진짜로 틀렸죠.” 정숙이 말했다. 개천절 이야기였다. 하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괜찮아요. 근데 그건 그 애 실수가 아니에요. 진짜로 틀리면 손이 멈춰요. 그 애는 손이 안 멈췄어요. 틀리면서 그냥 다음 마디로 갔어요. 틀린 줄도 모르는 사람처럼.”

정숙이 왼손을 건반에 올렸다. 22마디 끝에서 23마디로 넘어가며 엄지 하나가 반음 옆으로 미끄러졌다. 틀린 음이 났다. 손은 멈추지 않았다. 24마디가 이어졌다. 틀린 음이 음악 안으로 녹아 들어갔다. 실수라기보다 버릇에 가까웠다.

“이렇게.”

하윤이 따라 했다. 처음엔 손이 멈췄다. 두 번째는 덜 멈췄다. 세 번째에 엄지가 미끄러지고 손이 계속 갔다.

창가에서 손뼉 소리가 났다. 두 번. 회장이 휠체어에서 손바닥을 마주치고 있었다. 마영순이 웃었다. “회장님 좋으시네.”

“그 애는 거기서 늘 틀렸어요.” 정숙이 건반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작게, 하윤에게만. “아빠가 손뼉 치는 게 좋아서 일부러 틀렸는지도 몰라요. 열 살 때부터 발표회만 하면 거기서 틀렸으니까.”

회장은 다시 손을 담요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손뼉이 연기였는지 아닌지 하윤은 이번에도 알 수 없었다. 첫 주말에도 그는 손뼉을 쳤다. 그때는 치매 노인의 손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무엇의 손뼉인지 몰랐다. 딸이 틀린 자리에 손뼉을 치던 아버지의 버릇을, 가짜 딸 앞에서 연기하는 맨정신의 아버지. 하윤은 그 문장을 끝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발표회 날엔 화장실에서 안 나왔어요.” 정숙이 말했다. “무대 뒤에서 30분씩. 그 애는 겁이 많아요. 그런데 한 번 정하면……”

정숙은 말을 거기서 거두고 악보를 한 장 넘겼다. 넘길 필요가 없는 장이었다.

하윤은 그 문장을 다시 들었다. 머릿속에서 천천히. 그 애는 겁이 많아요. 많았어요, 가 아니었다. 3년 동안 사라진 딸을 말하는 엄마의 시제가 아니었다. 정숙은 그 말을 고치지 않았다. 고치지 않는 쪽이 더 이상했다. 사람은 실수를 하면 고친다. 실수가 아니면 그냥 둔다.

화장실에 간다며 위층으로 올라가, 하윤은 유진의 방 책상에서 노트를 폈다.

한정숙. “그 애는 겁이 많아요.” 현재형. 한 번. 고치지 않음. 9월 20일, 피아노 뚜껑. 기념일처럼.

두 줄을 나란히 놓고 보니 하나의 문장이 되려 했다. 하윤은 그 문장을 쓰지 않았다. 노트를 덮었다.


민혁은 여섯 시 반에 혼자 왔다. 자기 차를 직접 몰고. 회색 정장에 넥타이는 없었다. 그는 대문에서 마영순에게 저녁을 같이 먹겠다고 했고, 마영순은 수저 한 벌을 더 놓았다.

식탁은 늘 같은 자리였다. 상석에 회장의 휠체어. 오른쪽에 정숙, 그 옆에 하윤. 왼쪽 자리가 민혁의 몫이었다. 갈치조림, 된장국, 고사리, 정숙이 낮에 무친 겉절이.

민혁은 하윤에게 “서하윤 씨, 수고 많으십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유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첫날 한 번, 비꼬듯 부른 뒤로는 한 번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국을 두 숟가락쯤 떴을 때 민혁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어머니, 미리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정숙의 젓가락이 갈치 위에서 멈췄다.

“14일에 서울가정법원에 아버지 성년후견 개시 심판을 청구했습니다. 심문기일은 12월 15일로 잡혔고요.” 민혁은 웃었다. 사과하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사과할 생각은 없는 사람의. “아버지는 가평에 있는 전문 요양병원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치매 병동이 따로 있고, 24시간 의료진이 있어요. 여기서 마 여사님 혼자 감당하시기엔 이제 무리입니다.”

마영순이 부엌 입구에서 행주를 쥐었다.

“그리고 이 집은 정리하려고요. 관리가 어렵습니다. 1987년에 지은 집이라 손볼 데가 너무 많아요.”

“내가 반대해요.” 정숙이 말했다.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 피아노를 가르칠 때의 목소리였다. 틀린 음을 지적할 때.

“압니다.” 민혁이 말했다. “그런데 어머니, 반대하시면 법원이 물을 겁니다. 아버지가 사무를 처리하실 수 있는지. 어머니가 증언하시겠어요? 아버지가 멀쩡하다고?”

식탁이 얼었다. 수저 소리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갈치조림 냄비 밑에서 가스불만 작게 탔다.

“자료는 충분합니다.” 민혁이 계속했다. 정중하게. 숫자를 하나씩 내려놓듯이. “이태준 교수님 진단서. 인지검사 점수 2년 치. 공판 정지 결정문.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려 냉장고 옆 게시판 쪽으로 턱을 들었다. 소견서가 압정 네 개에 박혀 있었다. “어머니가 받아 오신 소견서요. 딸을 그리워해서 상태가 나빠진다고, 대리 가족 방문을 권한다고. 아버지가 딸 얼굴을 못 알아보셔서 배우를 불러야 할 정도라는 거죠. 법원에 낼 자료로 그보다 좋은 게 없어요.”

민혁이 하윤을 봤다. 처음으로 똑바로.

“어머니가 저 대신 써 주신 셈이죠. 그리고 서하윤 씨가 매주 증명해 주시고요.”

하윤은 숟가락을 쥔 채 그 말을 들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소리 없이 맞물렸다.

공판에서 회장은 치매여야 했다.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어야 법정이 그를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이 법정에서는 치매가 아니어야 했다.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이 집에 남는다. 한쪽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다른 쪽에서 그를 묻었다. 정숙이 남편을 지키려고 짠 치료는 아들의 손에 들어가 남편을 가두는 서류가 됐다. 그리고 그 서류의 증거가 하윤이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 두 시,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가짜 딸.

회장이 말했다.

“리야드는 모래가 밀가루 같았다.”

모두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밀가루 같았어. 아침에 나가면 신발에 모래가 한 되씩 들어왔다. 한 되씩. 어무이, 거기 물이 귀했다. 물이.”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말했다. 눈은 멍했고, 입꼬리에 국물이 묻어 있었다. 마영순이 행주를 들고 다가가려다 그 자리에 섰다.

회장의 오른손이 숟가락을 쥐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뼈가 하얗게 솟아 있었다. 숟가락 자루가 손바닥 안에서 조금 휘어 보였다. 리야드의 모래 이야기를 하는 노인의 손이 아니었다.

민혁도 그 손을 봤다. 하윤은 민혁이 그 손을 보는 걸 봤다. 민혁은 잠깐 웃었다. 이번엔 진짜로.

“네, 아버지.” 민혁이 말했다. “밀가루 같았죠.”


민혁은 디저트를 거절했다. 현관에서 구두를 신으며 그는 배웅 나온 하윤을 돌아봤다. 정숙은 식탁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서하윤 씨 계약은 12월 15일까지로 해 두죠.” 민혁이 말했다. 구두 주걱을 신발장 위에 반듯하게 올려놓았다. “오늘부터 59일입니다. 그다음엔 연기할 집이 없을 테니까.”

“계약은 사모님이랑 했어요.”

“알죠. 그런데 그 계약금이 어디서 나오는지도 저는 압니다.” 민혁이 현관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들어왔다. “좋은 배우시던데요. 아버지랑 호흡이 잘 맞으세요. 법원도 그렇게 볼 겁니다.”

문이 닫혔다. 대문 밖에서 차 문 닫히는 소리, 시동 소리. 하윤은 현관에 서서 쥐고 있던 손을 폈다. 손톱 자국 네 개가 손바닥에 초승달처럼 남아 있었다.

차민혁. 웃음: 사과하는 얼굴로 숫자를 말한다. “59일.” 아버지의 손을 봤다. 웃었다.


밤 열 시. 마영순이 회장을 1층 침실로 모셔 간 뒤 거실에는 정숙과 하윤만 남았다. 정숙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치지 않았다.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다가, 천천히 뚜껑을 닫았다.

하윤은 그 동작을 알았다. 9월 20일, 정숙은 하루 종일 이 뚜껑을 닫아 두었다. 중요한 날에 정숙은 뚜껑을 닫았다.

“하윤 씨.”

정숙이 처음으로 그 이름을 불렀다. 이 집 안에서. 유진이 아니라.

“부탁이 있어요. 이건 의뢰가 아니에요.”

하윤은 소파 끝에 앉았다.

“이 집이 없어지면,” 정숙이 닫힌 뚜껑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 애가 돌아올 곳이 없어요.”

하윤은 그 애가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물으면 정숙이 대답해야 했다. 대답하면 정숙이 지켜 온 것이 하나 무너질 것 같았다. 하윤은 묻지 않는 쪽을 골랐다. 배역 노트 첫 장에 늘 적던 말이었다. 묻지 말 것.

“네.” 하윤이 말했다. 무엇에 대한 대답인지 둘 다 정하지 않았다.

그날 밤 하윤은 유진의 방에서 잠들지 못했다. 새벽 두 시에 창가로 갔다. 정원은 어두웠다. 화단의 마사토가 달빛에 조금 붉었다. 아무도 없었다. 담뱃불도, 꼿꼿한 그림자도.

1층 회장의 침실 창에 불이 켜져 있었다. 커튼 너머로 그림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하윤은 그 그림자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불은 새벽 네 시가 넘어서 꺼졌다.


10월 18일 일요일 밤, 지하철 4호선

일요일은 조용했다. 회장은 아침에 귤을 먹었고 점심에 리야드 이야기를 했고 오후에 휠체어에서 졸았다. 민혁 이야기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 정숙이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해서 하윤은 계약 시간을 넘겼다. 대문을 나선 건 아홉 시 40분이었다. 정숙은 대문까지 따라 나와 “조심해 가요” 하고 문을 닫았다.

한성대입구역에서 하행 열차를 탔다. 일요일 밤 열차는 비어 있었다. 하윤은 문 옆 자리에 앉아 카디건 단추를 풀었다. 유진의 옷을 벗을 때까지가 배역이었다. 단추 하나를 풀 때마다 유진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혜화역을 지나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문자였다. 010으로 시작하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

나야, 유진. 엄마 피아노 의자 밑.

하윤은 그 문장을 읽었다. 다시 읽었다. 세 번째 읽을 때 열차가 동대문역에 섰다.

나야, 라고 썼다. 처음 연락하는 사람이 쓰는 말이 아니었다. 오래 알던 사람에게 쓰는 말이었다. 하윤은 이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귤을 깠고, 이 사람의 카디건을 입었고, 이 사람의 실수로 피아노를 쳤다. 나야. 어쩌면 이 사람은 하윤을 오래 안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누가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었는지도.

문이 열렸다. 하윤은 일어났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내렸다. 계단을 올라가 반대편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왔던 방향. 2분 뒤 열차가 들어왔다.

열차 안에서 하윤은 답장 칸을 눌렀다. ‘누구세요’까지 썼다가 지웠다. 누구인지는 이미 쓰여 있었다.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이 번호를 누가 줬는지, 왜 지금인지, 왜 나인지. 그 질문들은 문자 한 칸에 들어가지 않았다.


한성대입구역에서 택시를 탔다. 성북동 고갯길을 올라가는 동안 기사가 이 시간에 그 동네는 왜 가냐고 물었다. 하윤은 집에 뭘 두고 왔다고 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밤 열 시 58분. 하윤은 대문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생각했다. 정숙이 잠들었으면. 마영순이 나오면. 무슨 말을 할지 대사가 없었다.

초인종을 눌렀다. 30초 뒤 대문이 열렸다.

정숙이었다. 잠옷 위에 회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머리는 빗은 상태였다. 정숙은 하윤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왜 왔느냐고도 묻지 않았다.

“들어와요.”

거실은 어두웠다. 피아노 위 스탠드 하나만 켜져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집의 불빛이었다.

하윤은 피아노 의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의자 밑 바닥을 손바닥으로 훑었다. 먼지 하나 없었다. 의자 다리 안쪽. 아무것도 없었다. 의자 앉는 판을 들어 올렸다. 경첩이 작게 울었다. 안에 악보가 있었다. 「엘리제를 위하여」, 체르니 30번, 귀퉁이가 닳은 바이엘. 그 아래도 바닥이었다.

정숙이 뒤에서 말했다. “덮개.”

하윤은 앉는 판의 가죽 덮개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가운데 부분이 다른 데보다 조금 딱딱했다. 덮개 가장자리를 따라 손톱을 밀어 넣자 실밥 몇 개가 이미 풀려 있었다. 누가 풀었다가 다시 덮은 자리였다.

덮개 안쪽, 판에 테이프로 붙인 흰 봉투. 테이프는 새것이었다.

하윤은 봉투를 뗐다. 겉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손에 무게가 느껴졌다. 종이의 무게보다 조금 더. 봉투를 기울이자 안에서 무언가가 미끄러져 한쪽 끝으로 몰렸다.

편지 한 장. 그리고 열쇠 하나.

열쇠는 오래된 놋쇠였다. 손때로 반질반질했고, 머리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구멍에 빨간 실이 감겨 있었다. 하윤은 그 열쇠를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이 집에서 잠긴 문은 하나뿐이었다.

하윤은 고개를 들었다. 거실 끝 복도, 1층 회장의 침실 옆. 추석 날 민혁과 오규식이 그 앞에서 말을 멈추던 문. 서재의 문은 닫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 회장의 방 문틈으로, 불빛이 한 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