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빈은 열한 시가 넘어서 왔다.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의상실 행거에서 빌려 간 상복이 아니라 자기 옷이었다. 바지 무릎이 하얗게 닳아 있었다.
화이트보드 수요일 칸에는 파란 글씨가 그대로 있었다. ‘우태호 할아버지(정빈) 2~6시.’ 1년 동안 매주 같은 자리에 같은 글씨였다. 문숙자는 월요일 아침 그 칸 앞에서 지우개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정빈은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고 화이트보드 앞으로 갔다. 지우개를 들었다. ‘우’를 지우고 ‘태’를 지우고, ‘호’에서 손이 멈췄다. 그는 지우개를 쥔 채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울음은 소리가 작았다. 두 주먹을 무릎에 올려놓고 어깨만 들썩였다. 하윤은 정빈이 우는 걸 처음 봤다. 정빈은 장례식 대행을 가면 남의 할아버지를 위해 누구보다 잘 울었다. 그 울음과 지금 울음은 소리가 달랐다. 남의 울음은 크고, 자기 울음은 작았다.
문숙자가 일어나 정빈 옆에 쪼그려 앉았다. 등을 쓸지 않았다. 그냥 옆에 앉아 있었다. 하윤은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정빈의 책상에 놓았다. 그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우태호는 여든셋이었다. 망원동 재개발 구역의 3층짜리 빌라 201호에 혼자 살았다.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스무 해 전에 죽었다. 작년 가을부터 매주 수요일 오후, 정빈이 그 집에 ‘아들’로 갔다. 대행료는 할아버지가 기초연금을 쪼개 냈다. 한 달 네 번, 회당 6만 원.
일요일 아침 자다가 갔다고 했다. 심장이었다. 정빈은 일요일 정오에 전화를 받았다.
“누가 알려 줬어?” 하윤이 물었다.
“봉사자 아주머니.” 정빈이 코를 훔쳤다. “장미경 씨. 할아버지 우리 회사에 소개해 준 분. 주민센터 돌봄 봉사하는.”
“조카분은?”
“빈소에서 처음 봤어. 상주 하더라. 나 들어가니까 도둑 보듯 보더라.” 정빈이 웃으려다 말았다. “오늘 발인 갔는데 버스엔 못 탔어. 가족만 탄대.”
유리문이 열리고 도석이 나왔다. 그는 정빈 어깨에 손을 한 번 올렸다가 내렸다. 그리고 하윤 쪽은 보지 않고 탕비실로 갔다.
“사장님.”
“어.”
대답은 했는데 고개가 돌아오지 않았다. 보지 않으려는 사람의 목은 조금 굳어 있다. 지난주 상견례 뒤로 둘 사이에 무언가 걸려 있다는 건 알았다. 서로 대답하지 않은 질문 두 개. 그런데 그건 하윤 쪽이 피할 일이었지 도석 쪽이 아니었다.
오후 세 시, 정빈의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정빈은 받고 나서 하윤을 보며 스피커를 눌렀다.
“정빈 씨 되시죠? 탁성규 법무사 사무소입니다. 먼저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목소리가 매끄러웠다. 말과 말 사이에 숨 쉬는 자리가 정확했다. 하윤은 그 자리를 셌다. 처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고인께서 생전에 자필 유언장을 저희 쪽에 맡기셨습니다. 망원동 빌라 201호를 정빈 씨께 남기신다는 내용입니다. 재개발 구역이라 시세가 4억 정도 됩니다.”
정빈이 입을 벌렸다. 장부를 넘기던 문숙자의 손이 그대로 섰다.
“상속 등기는 서두르시는 게 좋습니다. 조합원 지위 승계에 기한이 있어서요. 번거로우실 테니 저희가 대신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위임장 한 장, 인감도장, 인감증명서 두 통, 신분증 사본. 그거면 됩니다.”
“저, 저는 그냥 수요일마다.” 정빈이 말했다.
“압니다. 할아버님이 정빈 씨 얘기를 많이 하셨다고 봉사자분이 그러시더라고요. 고인의 뜻이니 부담 갖지 마시고요. 금요일 오후 괜찮으십니까?”
정빈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윤이 메모지에 적어 보여 줬다. ‘생각해 보겠다고.’ 정빈이 그대로 읽었다. 법무사는 서두르지 않는 목소리로 서둘렀다. 기한이 있습니다. 다른 상속인과 분쟁이 생기기 전에 하시는 게 좋습니다. 전화는 4분 12초 만에 끊겼다.
“4억.” 정빈이 말했다. 실감이 나지 않는 목소리였다. “누나, 4억.”
“응.”
“할아버지가 나한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문숙자가 장부를 덮고 안경을 벗었다.
“유언장 그거, 법원에 먼저 가져가는 거 아니었어? 라디오 드라마에서 그러던데.”
10월 14일 수요일
조카 우병철은 아침 아홉 시 반에 왔다. 쉰둘, 등산 점퍼, 손에 둘둘 만 A4 용지. 그는 계단을 두 칸씩 올라와 문을 밀고 들어왔다.
“정빈이 누구야.”
정빈이 일어났다. 우병철은 말아 쥔 종이를 펴서 정빈의 책상에 내리쳤다.
“돈 받고 아들 노릇 하더니 집까지 먹으려고? 법무사라는 놈이 어제 나한테 이걸 보냈어. 삼촌이 이딴 걸 썼다고. 소송하면 시간만 끈다고. 너희 짜고 하는 거지?”
문숙자가 일어났다. 엄마 목소리였다. 반 톤 낮고, 끝이 둥글었다.
“선생님, 앉으세요. 차 한 잔 드릴게요. 정빈이도 어제 처음 들었어요.”
“처음 들었는데 법무사가 연락을 해?”
우병철이 문숙자와 싸우는 동안 하윤은 책상 위 종이를 읽었다. 유언장 사본이었다. A4 한 장, 볼펜 글씨. 줄이 반듯했다. 글씨가 작고 고르고, 줄 끝이 오른쪽으로 처지지 않았다.
‘유언. 나 우태호는 내가 사는 망원동 빌라 201호를 아들 정빈에게 준다. 한 푼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 2026년 8월 3일.’ 그 아래 주소와 이름, 도장.
하윤은 휴대폰으로 사본을 찍었다. 우병철이 돌아봤지만 막지는 않았다.
“찍어 가. 그거 다 가짜야.” 그가 말했다. “삼촌이 무슨 유언장을 써. 은행 가서 자기 이름 쓰는 것도 나한테 시키던 양반이.”
“조카분은 자주 찾아뵈셨어요?” 하윤이 물었다.
우병철의 입이 잠깐 닫혔다. “명절에는 갔어.”
명절. 1년에 두 번. 정빈은 1년에 쉰 번 갔다. 하윤은 그 숫자를 말하지 않았다. 우병철도 그 숫자를 아는 얼굴이었다.
그는 30분 동안 소리를 지르고 갔다. 소송, 경찰, 사기꾼. 문을 나서면서 마지막으로 정빈을 돌아봤다. 소리 지를 때와는 다른 눈이었다.
오후 두 시, 정빈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메다가 멈췄다. 수요일 두 시였다. 1년 동안 이 시간에 그는 망원동 빌라로 걸어갔다. 정빈은 가방을 다시 내려놓고 앉았다. 아무도 그걸 말하지 않았다.
그날 밤 하윤은 정빈에게 두 가지를 부탁했다. 할아버지가 손으로 쓴 것, 그리고 정빈의 대행 일지.
패밀리에는 규칙이 하나 있었다. 장기 대행은 매번 일지를 쓴다. 몇 시에 갔는지, 뭘 했는지, 고객 상태는 어땠는지. 도석이 만든 규칙이었다. 형사 시절 버릇이라고 했다.
정빈은 휴대폰 사진첩에서 생일 카드를 찾아 보여 줬다. 지난 5월. 문구점에서 파는 꽃무늬 카드에 볼펜으로 세 줄.
‘빈아 생일 축하한다. 밥 잘 챙겨 먹어라. 할아버지가.’
글씨가 컸다. 줄은 오른쪽으로 갈수록 내려갔다. 획마다 힘을 줘서 종이가 눌린 자국이 사진에도 보였다.
“할아버지가 나 한 번도 아들이라고 안 불렀어.” 정빈이 카드를 보며 말했다. “첫날에 그러셨어. 아들은 하늘에 있으니까 너는 빈이 해라. 나는 할아버지 할게. 그래서 계약서엔 아들인데, 그 집에선 손자였어.”
하윤은 사본 사진과 카드 사진을 나란히 놓고 오래 봤다. 그리고 노트를 폈다.
우태호(만난 적 없음). 카드 ‘ㅎ’: 첫 획을 세로로 세운다. 꼭지가 모자처럼 선다. 유언장 ‘ㅎ’: 첫 획이 가로로 눕는다. 정빈을 부르는 말: “빈아.” 자기는 “할아버지.” 유언장: “아들 정빈.” 8월 3일?
정빈의 일지는 노트 세 권이었다. 하윤은 8월을 펼쳤다. 3일은 월요일이었다. 수요일이 아니었다. 정빈의 글씨로 적혀 있었다. ‘추가 동행(병원). 07:30~20:10.’
하윤은 그 아래 다섯 줄을 읽고 일지를 덮었다.
“누나, 뭐야?”
“내일 얘기해.”
10월 15일 목요일
문숙자의 장부는 2년 치가 한 권에 들어 있었다. 고객 이름, 대행 배우, 날짜, 금액, 그리고 맨 오른쪽 칸 ‘소개’. 처음 오는 손님이 어디서 듣고 왔는지 문숙자는 꼭 물어서 적었다. 광고비를 어디에 써야 할지 알아야 한다고.
우태호 줄의 ‘소개’ 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망원2동 주민센터 돌봄 봉사자 장미경.’
문숙자가 손가락으로 그 이름을 짚고 앞장으로 넘겼다. 또 넘겼다. 같은 이름이 네 번 더 나왔다. 전부 혼자 사는 노인이었다. 전부 ‘아들’이나 ‘딸’이나 ‘손자’ 역할을 정기로 불렀다.
“노순덕 할머니.” 문숙자가 말했다. “3월에 돌아가셨어. 수진이가 딸로 다녔고. 석만길 할아버지. 7월. 민수가 손자로.”
“수진이랑 민수한테 전화해 봐요.” 하윤이 말했다.
수진은 바로 받았다. 법무사 전화요? 아, 그거. 할머니가 저한테 뭘 남겼다고 해서요. 무서워서 안 갔어요. 사기인 줄 알았어요. 그냥 문자 다 지웠어요.
민수는 두 번 만에 받았다. 목소리가 잠에서 덜 깼다.
“아, 저는 써 줬는데요. 위임장. 인감도 떼 드리고. 할아버지가 저한테 뭘 남기셨다고 해서. 정리되면 연락 준다던데 아직 연락이 없네요. 그거 왜요?”
문숙자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장부 위에 손바닥을 펴서 얹었다. 그 손이 조금 떨렸다.
저녁 일곱 시. 하윤은 화이트보드를 지우고 그 위에 세 개를 적었다. 도석은 유리문에 기대 서 있었다. 팔짱을 꼈다. 하윤이 그쪽을 볼 때마다 그의 눈은 화이트보드에 가 있었다.
“첫째, 글씨.” 하윤이 카드와 사본을 나란히 띄운 휴대폰을 책상에 놓았다. “할아버지는 ‘ㅎ’ 꼭지를 세로로 세워요. 연세 있는 분들이 많이 그렇게 써요. 유언장은 가로로 눕혔어요. 나올 때마다 다. 그리고 할아버지 글씨는 줄이 오른쪽으로 처져요. 유언장은 자로 댄 것 같아요.”
“둘째.” 하윤이 정빈 쪽으로 돌아섰다. “‘아들 정빈.’ 할아버지는 너를 아들이라고 안 불렀어. 손자라고 불렀지. 너를 아들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따로 있어.”
정빈이 천천히 말했다. “계약서.”
“응. 우리 장부. 대행 종류에 ‘아들’이라고 적힌 거. 이 유언장 쓴 사람은 할아버지를 모르고 우리 서비스를 알아. 할아버지가 너를 뭐라고 불렀는지는 모르고, 너를 뭐로 샀는지는 알아.”
“셋째, 8월 3일.” 하윤은 정빈의 일지를 펼쳐 소리 내어 읽었다.
“8월 3일 월요일. 할아버지 안과 동행. 왼쪽 눈 백내장 수술. 수술 후 안대. 오른쪽 눈은 다음 달 수술 예정, 지금은 뿌옇게만 보인다고 하심. 약 봉투 글씨 내가 읽어 드림. 20시 10분 댁에 모셔다 드림. 바로 주무심.”
하윤이 일지를 덮었다.
“한쪽 눈은 가리고 한쪽 눈은 뿌연 날에, 약 봉투도 못 읽는 날에, 자로 잰 것 같은 작은 글씨로 유언장을 썼어요. 할아버지 평소 글씨보다 반듯하게.”
정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지 표지를 엄지로 문질렀다.
“넷째는 숙자 쌤 장부예요. 장미경 씨가 소개한 다섯 명. 둘이 올해 돌아가셨고, 둘 다 대행한테 법무사 전화가 갔어요. 수진이는 무시했고 민수는 위임장을 써 줬어요.”
하윤은 화이트보드에 화살표를 그렸다.
“봉사자가 혼자 사는 노인을 찾아요. 우리 같은 회사에 ‘아들’을 붙여 줘요. 노인이 돌아가시면 그 아들 이름으로 유언장을 써요. 진짜 가족은 멀리 있고, 명절에만 오니까 글씨를 몰라요. 대행은 법을 모르니까 법무사한테 위임장을 써 줘요. 등기가 넘어가고, 집이 팔리고, 돈은 법무사 계좌로 가요. 대행한테 남는 건 이름뿐이에요. 사기에 쓰인 이름.”
“그럼 나는.” 정빈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할아버지 집 훔치는 데 이름 빌려준 거네.”
“아직 안 빌려줬어.”
정빈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안 빌려줬다고.” 하윤이 다시 말했다. “민수는 몰랐어. 너도 몰랐어. 근데 이제 알잖아.”
도석이 유리문에서 몸을 뗐다. 휴대폰을 꺼냈다. 그는 하윤 쪽을 보지 않고 말했다.
“마포서 지능팀에 아는 놈 있다. 금요일 그 약속, 잡아.”
그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통화했다. 유리 너머로 그의 등만 보였다. 도석은 이번 주 내내 하윤에게 등을 보였다. 이유를 물을 자리는 매번 지나갔다.
10월 16일 금요일, 망원역 앞 카페
탁성규는 마흔 중반이었다. 남색 정장에 갈색 구두, 서류 가방. 명함에 ‘법무사 탁성규’라고 금박이 박혀 있었다. 금박이 너무 반짝였다.
하윤은 정빈 옆에 앉았다. 배역은 정빈의 누나. 성이 같아야 하니 오늘은 정하윤이었다. 아침에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손톱에 연분홍을 바르고, 은행 앱을 세 개 깔았다. 정하윤은 동생 일에 끼어드는 누나였다. 돈 냄새를 맡으면 목소리가 반 톤 올라가는 사람.
“근데 세금은 얼마나 나와요? 동생이 이런 걸 몰라서요.”
“걱정 마십시오, 누님. 그것도 저희가 다 처리합니다.” 탁성규가 웃었다. 웃음이 입에서 시작해서 입에서 끝났다. “매수자도 벌써 있습니다. 재개발 프리미엄이 붙어서 금방 나갑니다. 대금은 저희 사무소 계좌로 받아서 세금 정리하고 정빈 씨께 보내 드리지요.”
“한 번에요?”
“서류 정리되는 대로요.”
탁성규가 위임장 양식을 꺼냈다. 이미 반쯤 채워져 있었다. 정빈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앞자리, 주소. 정빈이 알려 준 적 없는 주소였다. 패밀리 장부에 적힌 주소였다.
정빈이 볼펜을 들었다. 그때 정빈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주거래 은행’이 떴다. 정빈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받다가, 손가락이 미끄러진 척 스피커를 눌렀다.
“정빈 고객님 되시죠? 영업부 김선영 대리입니다.”
문숙자였다. 하윤이 아는 어떤 목소리와도 달랐다. 서른 초반, 콧소리가 약간 섞이고 말이 빠른, 하루에 전화를 백 통 거는 사람의 목소리.
“아까 요청하신 탁성규 법무사 사무소 계좌 확인 건이요. 해당 계좌가 다른 고객님 피해 신고로 사기 의심 계좌에 등록돼 있어서요, 입출금이 제한된 상태라 안내 차 연락드렸습니다. 혹시 이 계좌로 거래 예정이시면……”
탁성규의 얼굴에서 웃음이 빠졌다. 순서대로 빠졌다. 입, 볼, 마지막에 눈. 그는 위임장 양식을 서류 가방에 쓸어 넣었다. 일어났다.
옆 테이블에서 노트북을 펴고 있던 남자 둘이 같이 일어났다.
“탁성규 씨.” 한 명이 말했다. “법무사 등록 조회를 해 봤는데 안 나오던데요. 가방 좀 보여 주시겠어요?”
서류 가방 안에는 위임장 양식이 열한 장 있었다. 그중 세 장에 다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맨 위에 민수의 이름이 있었다. 석만길 할아버지의 빌라 주소와 함께.
장미경은 그날 저녁 주민센터에서 퇴근하다가 잡혔다고, 밤에 도석이 말했다. 하윤에게가 아니라 문숙자에게. 하윤은 옆에서 들었다.
정빈은 오후에 우병철을 만나러 빌라에 갔다. 우병철은 법무사 얘기를 경찰에게서 먼저 들은 뒤였다. 그는 정빈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대신 빌라 문을 열어 줬다.
정빈은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받을 것도 없었다. 유언장은 가짜였다. 그래도 정빈은 그 말을 했다. 자기 입으로 한 번은 해야 할 것 같았다고, 나중에 하윤에게 말했다.
돌아올 때 정빈은 화분 하나를 안고 있었다. 군자란. 잎이 길고 두꺼웠다. 베란다에 있던 거라고 했다.
“조카분이 가져가래. 삼촌이 수요일마다 이거 물 줬대. 빈이 오는 날이라고.” 정빈이 사무실 창턱에 화분을 올려놓았다. “그거 나 처음 알았어. 나 올 때마다 할아버지가 물을 주고 계셨거든. 나는 그냥 할아버지가 꽃을 좋아하는 줄 알았어.”
정빈이 화분 흙에 손가락을 한 마디 찔러 넣었다. 젖어 있었다. 할아버지가 마지막 수요일에 준 물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윤은 군자란 잎을 손끝으로 쓸었다. 남의 작전에 이름을 빌려준 사람. 정빈은 몰랐다. 민수도 몰랐다. 모르고 빌려준 이름도 쓰이긴 쓰였다.
그럼 나는.
성북동 냉장고 옆 게시판에 붙은 소견서가 떠올랐다. 이태준 교수의 서명. 정숙이 짠 치료. 회장이 내민 열 배. 의뢰서를 책상 위로 밀던 도석의 손. 하윤은 매주 토요일 그 집 대문 앞에서 자기 이름을 빼고 들어갔다. 그 빈자리에 누가 무엇을 적어 넣었는지는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여덟 시가 넘어 문숙자가 장부를 정리했다. 장미경 일로 2년 치를 뒤집어 놓은 참이었다. 포스트잇을 떼고, 접힌 귀를 펴고, 맨 뒤 방문객 칸까지 넘기다가 손이 멈췄다.
“하윤아.”
“네.”
“이 사람, 너 아는 사람이지?” 문숙자가 장부를 돌려 하윤 쪽으로 밀었다. “사장님이 얘기 안 했어?”
10월 10일 칸이었다. 문숙자의 단정한 글씨.
‘10:40 오규식, 성근건설.’
“토요일에 왔었어. 과일 바구니 들고. 너 안부 전해 달라고.” 문숙자가 말했다. “사장님이랑은 아는 사이 같던데. 분위기가 좀 그렇더라. 명함은 사장님이 가져갔고.”
토요일 오전 열 시 40분. 그 시간에 하윤은 원룸에서 남색 카디건을 다리고 있었다. 오후 두 시에 성북동 대문을 열었다. 오규식은 그날 그 집에 오지 않았다. 대신 여기에 왔다.
그리고 엿새 동안, 아무도 그 말을 하윤에게 하지 않았다.
하윤은 유리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석의 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늘 걸려 있던 회색 점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