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나는 하루 · 19장
늘어나는 하루 · 도해

19장

그라스
2030년 9월
약 10분

클레르는 화면과 똑같았다.

니스 역 앞이었다. 저녁 다섯 시, 지중해의 9월 햇빛이 아직 뜨거웠다. 나는 파리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다섯 시간 반을 왔다. 그 전 사흘 동안은 파리 근교 국제도량형국에서 열린 긴급 회의에 있었다. 10월 말 윤초를 어떻게 넘길 것인가, 그 뒤는 어떻게 할 것인가. 세계의 시간 연구소 대표들이 모여 사흘 내내 같은 질문을 돌렸다. 아무도 답을 몰랐다. 서로의 시스템을 미리 점검하자는 것까지만 정하고 헤어졌다.

역 앞 주차장에 낡은 소형차 한 대가 서 있었고, 그 옆에 클레르가 서 있었다. 곱슬머리를 연필 한 자루로 틀어 올리고, 한 손에 종이컵을 들고. 나를 보자마자 종이컵을 차 지붕에 올려놓고 걸어왔다. 아주 빨리.

그리고 내 양쪽 뺨에 자기 뺨을 댔다. 왼쪽, 오른쪽.

나는 굳었다. 문자 그대로. 몸이 기둥이 됐다.

클레르가 한 걸음 물러서서 나를 봤다. 그리고 웃었다. 화상 통화에서 수없이 들은 웃음인데, 실제로 들으니 조금 더 컸다. 소리에도 크기가 있다. 화면은 그 크기를 줄인다.

“한국에서는 안 해?”

“안 해.”

“알았어. 그럼 이거.” 클레르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거칠었다. 망원경을 만지는 손이었다. “1년 만이네. 아니, 처음이네. 이상하다. 처음 같지가 않아.”

나도 그랬다. 우리는 1년 가까이 거의 매일 얼굴을 봤다. 화면 속에서. 그 화면에서 클레르는 늘 밤이었고 나는 늘 아침이었다. 지금은 둘 다 같은 저녁이었다. 그게 제일 이상했다.

클레르가 차 지붕의 종이컵을 집어 들었다. 비어 있었다. 그대로 마셨다.

“그거 비었어.” 내가 말했다.

“알아. 습관이야.” 클레르가 운전석 문을 열었다. “타. 관측소까지 한 시간. 가는 동안 나 쉬지 않고 말할 거야. 미리 사과할게.”


정말로 쉬지 않았다.

차는 니스를 빠져나가 산으로 올라갔다. 길이 구불구불했다. 클레르는 운전하면서 말했고, 말하면서 손을 움직였고, 손을 움직이면서 운전했다. 나는 조수석 손잡이를 꽉 쥐었다. 손잡이를 쥔다고 차가 덜 흔들리는 건 아니다. 그래도 쥐었다.

클레르는 6월 이후의 일을 다 말했다. 관측소에 기자가 온 것, 시장이 온 것,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 원장이 온 것. 다들 레이저를 보고 싶어 했고, 클레르는 다들 밤 열한 시에 오라고 했다. 그 시간에 온 사람은 원장 하나뿐이었다고.

“그 사람 좋은 사람이야. 커피를 사 왔어. 근데 다 식어 있었어. 차에서 세 시간 기다렸대. 열한 시라고 했더니 저녁 여덟 시에 왔어.” 클레르가 핸들을 꺾었다. “과학자들은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거나, 아예 못 지키거나 둘 중 하나야. 중간이 없어.”

“나는?”

“너는 정확하게 지키는데 남들이 못 따라와.” 클레르가 나를 흘끗 봤다. “그것도 문제야.”

길이 고원으로 올라섰다. 나무가 사라지고 회색 석회암이 드러났다. 햇빛이 비스듬해졌다. 해발 1,270미터. 그 위에 하얀 돔 몇 개가 서 있었다.

“저기야.” 클레르가 말했다. 처음으로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내 집.”


관측소는 생각보다 작았다. 돔 하나, 그 옆에 낮은 건물 하나, 주차장, 그리고 끝없는 석회암. 클레르가 사는 숙소는 건물 뒤쪽이었다. 거기 주방이 있었다. 지난봄 화면 속에서 클레르가 프라이팬을 흔들며 나한테 찌꺼기 이야기를 하던 바로 그 주방.

실제로 보니 작았다. 화면은 공간도 키운다.

클레르는 그 주방에서 오믈렛을 만들었다. 버터를 많이 넣었다. 나는 식탁에 앉아 벽에 붙은 종이들을 봤다. 손으로 그린 그래프 몇 장. 거리 잔차, 날짜, 그리고 휘어 올라가는 곡선. 맨 오른쪽 그래프는 연필로 그린 거였다. 날짜가 작년 10월이었다.

“그거 네 메일 받은 날 밤에 그린 거야.” 클레르가 등을 돌린 채로 말했다. “화상 통화 끝나고. 내 일곱 달을 종이 한 장에. 그날 처음으로 그 곡선이 내 실수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

나는 그 그래프를 오래 봤다. 내 곡선과 같은 모양이었다. 그날 밤 두 대륙에서 두 사람이 같은 곡선을 손으로 그렸다.


밤 열 시에 차 한 대가 주차장에 들어왔다.

독일 번호판이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은 하얀 수염에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다. 키가 컸다. 화면에서는 늘 앉아 있어서 몰랐다. 그는 트렁크에서 종이 상자 하나를 꺼내 들고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하르트무트 브레너 교수였다.

“뮌헨에서 아홉 시간 걸렸습니다.” 그가 말했다. 영어였고, 독일어 억양이 단단했다. “중간에 두 번 쉬었습니다. 정확히는 한 번 반. 두 번째는 주유소에서 커피만 샀습니다.”

클레르가 나를 봤다. 그 사람 너랑 똑같다는 얼굴로.

“오시는 줄 몰랐어요.” 내가 말했다.

“저도 몰랐습니다. 어제 아침까지.” 브레너 교수가 종이 상자를 클레르에게 건넸다. 뮌헨 빵집의 프레첼이 들어 있었다. “마르탱 박사가 오늘 밤 박 박사와 같이 쏜다고 했습니다. 저는 40년 동안 지구 자전을 연구하면서 달 레이저를 직접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자료만 받았습니다. 그게 늘 부끄러웠습니다.”

그는 나를 봤다. 그리고 아주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독일식인지 그냥 그 사람식인지 모르겠다.

“박 박사. 작년 7월, 저는 박 박사의 발표에서 계통 오차를 지적했습니다. 그 지적은 옳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지적으로 박 박사의 질문 전체를 닫으려고 했습니다. 1년쯤 자료를 더 쌓고 오라고. 지구자전을 전공하는 사람과 같이 오라고.” 그가 말을 멈췄다. “그건 옳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직접 하고 싶었습니다. 화면 말고.”

나는 그를 봤다. 화상회의 창 마흔세 개. 그가 켠 카메라 하나. 흥미로운 발표 감사합니다, 박 박사. 정직해서 좋습니다.

그날 밤 그 말이 가장 아팠다. 칭찬이었으니까.

“교수님.” 내가 말했다. “그날 교수님이 짚은 게 없었으면 저는 다른 대기 자료 세 개를 받지 않았을 거예요. 그 세 개가 없었으면 대기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몰랐을 거고요. 그리고 대기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몰랐으면, 그날 새벽에 달을 올려다보지 않았을 거예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직해서 좋았어요.” 내가 말했다. “그때도요.”

브레너 교수가 아주 오래 나를 봤다. 그리고 하얀 수염 아래로 무언가가 움직였다. 웃음이었다. 화면에서는 한 번도 못 본.

“독일 사람들은 정말.” 클레르가 프레첼 상자를 열며 말했다. 작년 겨울 그의 공저자 거절 메일을 읽고 한 말과 똑같은 말이었다. 이번에는 다정했다.


자정에 돔이 열렸다.

망원경은 생각보다 컸다. 지름 1.5미터. 그 옆에 레이저 장치가 붙어 있었다. 클레르가 계기판 앞에 앉았다. 나와 브레너 교수는 그 뒤에 서 있었다. 돔 틈으로 밤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달.

보름을 사흘 지난 달이었다. 오른쪽 가장자리가 아주 조금 이지러지기 시작한. 앞면의 어두운 바다들, 고요의 바다, 비의 바다. 아폴로 15호가 내린 자리는 비의 바다 동쪽 가장자리, 산맥 아래 골짜기다. 거기 서류 가방만 한 반사경이 60년 동안 놓여 있다.

“아폴로 15호 겨냥.” 클레르가 말했다. “15호 반사경이 제일 커. 모서리 반사경 300개. 다른 건 100개.”

망원경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모터 소리. 그리고 클레르가 스위치 하나를 올렸다.

초록색 빛줄기가 돔 틈을 지나 하늘로 뻗었다.

나는 그걸 영상으로 수없이 봤다. 클레르가 작년 가을 휴대폰으로 찍어 보낸 영상, 그 끝에 Merde라는 한 단어가 붙은 영상. 직접 보니 달랐다. 빛줄기는 가늘고 곧았다. 밤공기 속 먼지와 습기에 부딪혀 아주 희미하게 빛났다. 그 빛줄기가 땅에서 시작해 하늘 어딘가에서 사라졌다. 사라진 게 아니라 너무 멀어져서 보이지 않게 된 거였다. 그 빛은 지금 38만 킬로미터를 가고 있었다.

1초에 열 번. 한 번에 광자 10경 개.

“돌아오는 데 2.5초.” 클레르가 말했다. 화면 한구석의 숫자를 가리키며. “봐.”

화면은 검었다. 가로축은 시간, 세로축도 시간. 펄스가 나간 시각과 광자가 돌아온 시각의 차이. 거의 모든 칸이 비어 있었다. 대기에서 흩어지고, 달까지 가는 동안 퍼지고, 반사경을 빗나가고, 돌아오는 동안 다시 퍼지고. 10경 개가 출발해서 거의 다 사라진다.

1초. 2초.

화면 한가운데에 점 하나가 찍혔다.

작고 하얀 점. 광자 하나. 38만 킬로미터를 갔다가, 60년 전 사람이 놓고 온 거울에 맞고, 38만 킬로미터를 돌아와서, 이 망원경에 들어온 빛 알갱이 하나.

나는 숨을 쉬지 않았다. 언제부터 참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나.” 클레르가 작게 말했다.

또 하나. 몇 초 뒤에 또 하나. 점들이 화면 한가운데에 아주 천천히 쌓였다. 한 줄로. 그 줄의 높이가 달까지의 거리였다. 밀리미터까지.

브레너 교수가 내 옆에서 아주 작게 독일어로 뭐라고 했다. 나는 독일어를 모른다. 그런데 그 말이 기도처럼 들렸다.


새벽 두 시, 우리는 돔 바닥에 앉아 프레첼을 먹었다.

관측은 계속되고 있었다. 화면에 점이 쌓였다. 1초에 열 번 빛이 나가고, 2.5초 뒤 운이 좋으면 하나가 돌아왔다. 우리는 그 점들이 그리는 줄을 보면서 말했다. 아니, 클레르가 말하고 브레너 교수가 대답하고 나는 들었다.

이야기는 6월 이후의 세상으로 흘렀다. 보고서가 나가고 나서 쏟아진 말들. 하루가 72시간이 된다는 영상, 달이 떨어진다는 영상, 정부가 숨기고 있다는 영상. 그리고 그 영상들 옆에 늘 붙어 다니는 말이 있었다. 과학자들도 모른다. 숫자는 조작됐다.

“숫자를 의심하는 건 좋아.” 클레르가 말했다. “나도 일곱 달 동안 내 숫자를 의심했어. 근데 의심하려면 숫자를 봐야 하잖아. 사람들은 숫자를 못 봐. 우리가 안 보여 주니까.”

“자료는 공개되어 있습니다.” 브레너 교수가 말했다.

“논문 뒤에. 한 달에 한 번. 정리된 채로.” 클레르가 프레첼 소금을 털었다. “생자료 말이야. 지금 이 화면. 지금 이 점 하나하나. 대전의 시계, 세종의 망원경, 뮌헨의 계산, 여기 이 점들. 실시간으로. 누구든 들어와서 직접 보고 직접 계산할 수 있게.”

브레너 교수가 생각했다. 10초. 노진만 센터장님 같았다.

“그러면 엉터리 해석도 쏟아질 겁니다.”

“쏟아지라고 해. 지금도 쏟아져. 차이는, 그 옆에 진짜 숫자가 있느냐 없느냐야.” 클레르가 나를 봤다. “하람, 너희 시계실 자료 실시간으로 열 수 있어?”

나는 생각했다. UTC(KRIS)는 매달 국제도량형국에 보고된다. 실시간 비교 자료는 연구원 내부용이다. 열려면 센터장님 서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사람은 서명을 아끼는 사람이다. 아니, 아끼던 사람이다.

“물어볼게.” 내가 말했다. “아마 될 거야.”

그날 밤 돔 바닥에서 셋이 목록을 만들었다. 시간 연구소, 레이저 거리 측정소, 전파 관측소. 클레르가 이름을 부르고 브레너 교수가 받아 적고 나는 그 옆에 연락할 사람 이름을 적었다. 새벽 세 시에 마흔한 곳이 됐다.

“이름이 있어야 돼.” 클레르가 말했다.

“필요 없습니다.” 브레너 교수가 말했다.

“있어야 돼. 사람들은 이름이 없으면 안 믿어.” 클레르가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로 뭐라고 하더니 영어로 바꿨다. “시계 사람들. 숫자를 숨기지 않는 시계 사람들.”

브레너 교수는 그 이름이 마음에 안 드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목록 맨 위에 그 이름을 적었다. 그의 글씨는 반듯했다.


새벽 네 시, 브레너 교수는 차에서 잠깐 자겠다며 나갔다. 돔에는 클레르와 나만 남았다.

화면에 점이 계속 쌓였다. 클레르는 빈 종이컵을 손에 쥐고 있었다.

“하나 물어봐도 돼?” 내가 말했다.

“뭐든.”

“그날 왜 40분 만에 답했어?”

클레르가 화면을 봤다. 오래.

“다섯 곳에 보냈다며. 다른 데는 답 안 했고.”

“응.”

“나는 일곱 달 동안 내 시계를 뜯었어.” 클레르가 말했다. “이벤트 타이머, 케이블, 메이저 두 대, 기상 보정 코드. 궤도 예측 팀은 내 장비 문제래. 다른 관측소는 달을 자주 안 쏘니까 확인해 줄 사람도 없어. 그 일곱 달 동안 밤마다 생각했어. 누가 문 좀 두드려 주면 좋겠다고. 너 미친 거 아니라고. 아니면 너 미친 거 맞다고. 둘 중 뭐든.”

클레르가 종이컵을 들었다. 비어 있었다. 이번에는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자정에 메일이 왔어. 대전에서. 모르는 사람이. 내 그래프를 본 적도 없는 사람이, 내 그래프 모양을 물어봤어. 크기가 아니라 모양을.” 클레르가 나를 봤다. “누가 문을 두드리면 열어 줘야지. 그게 다야.”

“40분은.”

“관측 하나 끝내느라.” 클레르가 웃었다. “그 40분이 내 인생에서 제일 길었어. 레이저 쏘면서 계속 메일 다시 읽었어. 혹시 이게 장난이면 어떡하지. 장난이 아니면 어떡하지. 둘 다 무서웠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있었는데, 그건 숫자가 아니었다.

“하람.” 클레르가 말했다. “언젠가 누가 너한테 문을 두드리면, 너도 열어 줘. 나는 40분 걸렸어. 너는 더 빨리 열 수 있을 거야. 너 시계 사람이잖아.”


새벽 여섯 시, 동쪽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클레르가 마지막 관측을 걸었다. 달은 서쪽 하늘로 내려가고 있었다. 망원경이 그 뒤를 따라갔다. 초록 빛줄기가 다시 하늘로 뻗었다. 이번에는 클레르가 나한테 스위치 앞자리를 내줬다.

“네가 쏴.”

나는 스위치 앞에 앉았다. 손이 떨렸다. 커플러 나사를 돌릴 때와는 다른 떨림이었다.

스위치를 올렸다.

초록색 빛이 돔 틈을 지나 밝아지는 하늘로 뻗었다. 1초에 열 번. 38만 킬로미터. 거기 60년 전 누군가 두고 온 거울이 있다. 아무도 닦지 않은 거울. 그 거울은 60년 동안 기다렸다. 누가 빛을 보내오기를. 보내오면 돌려보내려고.

1초. 2초.

화면 한가운데에 점 하나가 찍혔다.

광자 하나. 내가 보낸 빛 10경 개 가운데 돌아온 하나. 2.5초 만에.

응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