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8개월 · 9장
겨울 8개월 · 도해

9장

남극 보스토크 기지, 2032년 6월 10일
연료 잔량 36,620리터 · 첫 비행기까지 137일
약 9분

계산은 닷새 걸렸다. 숫자를 맞추는 데 하루, 그 숫자를 믿는 데 나흘.

6월 10일 아침, 나는 칠판의 내 자리를 넓힌다. 이리나의 숫자 세 개만 남기고 나머지를 지운 뒤 쓴다.

오늘 연료: 36,620리터 발전기 소비: 하루 275리터 (6월, 보조 난로 포함) 미생물 손실: 하루 86리터 (2주마다 두 배였다가, 최근엔 느려짐)

“손실이 느는 속도가 줄고 있어요.” 내가 말한다. “4월에는 2주마다 두 배였어요. 지금은 3주가 넘게 걸려요. 끝없이 늘지는 않아요. 탱크 바닥의 물은 한정돼 있고, 물과 연료가 만나는 면적도 정해져 있으니까요. 아마 하루 120리터 근처에서 멈출 거예요.”

나는 곡선을 그린다. 처음엔 가파르게 오르다가 점점 눕는 곡선. 그 아래에 선을 하나 더 긋는다. 발전기가 먹는 양과 미생물이 먹는 양을 함께 빼 나가는, 남은 연료의 선.

그 선이 바닥에 닿는 자리에 점을 찍는다.

9월 15일 무렵

“첫 비행기는 10월 25일이에요.” 내가 말한다. “40일이 모자라요.”


아무도 바로 입을 열지 않는다.

알료샤가 손가락을 접는다. 40을 세는 것 같다. 손가락이 모자라서 몇 번이고 다시 접는다.

“보조 난로를 끄면요?” 에릭이 묻는다.

“하루 12리터. 7월에 끄면 생활 칸이 영상 5도까지 떨어져요. 그래도 9월 20일이에요.”

“조명을 줄이면요? 눈 녹이는 걸 줄이면요?”

“다 해 봤어요. 다 합쳐서 하루 20리터. 9월 말이에요.”

“바깥 3번 탱크는요?”

“이미 넣었어요. 36,620에. 미샤 드럼 400리터도요.”

에릭이 입을 다문다.

“공중 투하.” 이리나가 말한다. “2월에 계획은 세운다고 했어요.”

“오늘 그거 물어봐 주세요.” 내가 말한다. “그리고 하나 더. 기체가 나오는 관을 오늘 바깥으로 뺄게요.”

다들 나를 본다.

“탱크에서 나오는 기체요. 지금은 숨구멍으로 이 건물 안에 그냥 나와요. 하루 100세제곱미터가 넘어요. 뭔지 모르는 기체가요. 이산화탄소가 섞였다는 것만 알아요. 이 건물이 숨을 잘 쉬어서 지금까지 괜찮았던 거예요.” 나는 숨구멍 쪽을 본다. “모르는 기체는 사람 사는 데로 내보내지 않아요. 그건 규정이 없어도 해요.”

그날 오후 미샤와 나는 A와 B의 숨구멍에 호스를 잇는다. 지름 2센티미터짜리 고무호스를 벽에 뚫은 구멍으로 빼서 바깥 눈 위로 늘어뜨린다. 탁, 쉬이이, 탁. 이제 그 소리는 벽 너머에서 난다. 시추동 안이 조금 더 조용해진다.

호스를 다 감고 사다리를 내려오는데, 미샤가 이송 펌프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아침에 압력 몇으로 돌려?”

연료 업무에서 빠진 뒤로 미샤가 연료 쪽 일을 묻는 건 처음이다.

“2.3이요. 2.4 넘기지 말라면서요.”

미샤가 나를 본다. “기억하네.”

“적어 뒀어요. 괄호 치고.”

미샤가 펌프 축 둘레를 손가락으로 훑어 본다. 장갑 끝이 말라 있다. 한 달 반 동안 그 패킹은 한 방울도 새지 않았다. 미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발전기실로 들어간다.


이리나의 통화는 오후 4시에 연결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그리고 처음으로 미국 쪽도.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미 남극 프로그램의 항공 운영 담당자다.

공중 투하는 가능하다. 7월 둘째 주. 달도 없는 그믐이지만 수송기 조종사들은 야간투시경을 쓴다. 필요한 건 달이 아니라 맑은 하늘이다. C-17 수송기가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맥머도를 거쳐 보스토크까지 와서, 어둠 속에서 낙하산에 매단 드럼을 떨어뜨린다. 200리터 드럼 40개. 8,000리터.

“투하 고도는 낮게 잡겠지만, 영하 70도 아래에서는 드럼이 터질 수 있습니다.” 미국 쪽 목소리가 담담하게 말한다. “차가운 철판은 충격에 약합니다. 1999년 남극점 투하 때도 일부를 잃었습니다. 회수율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절반이라도요.” 이리나가 말한다.

“절반이라도요.”

나는 칠판에 숫자를 더한다. 8,000리터가 다 오면 40일 가운데 30일쯤 메운다. 절반이 오면 15일.

“필터도 넣어 달라고 해 주세요.” 내가 말하자 이리나가 그대로 옮기고, 미샤가 모델 번호를 불러 주고, 미국 쪽이 받아 적는다.

통화가 끝나 갈 무렵 이리나가 마지막으로 묻는다. 첫 비행기를 당길 수는 없느냐고.

“트윈 오터가 내릴 수 있는 한계가 영하 55도 근처입니다. 보스토크는 10월 중순까지 그보다 춥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10월 15일까지 당겨 볼 수는 있지만, 계획으로 잡을 수는 없습니다.”

이리나가 전화를 끊고 칠판의 ‘251’에 친 동그라미를 본다. 이 숫자는 안 바뀐다고 했었다. 분필을 들어 그 옆에 무언가 적으려다 내려놓는다.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바뀐 건 그 숫자까지 가는 길이다.


그날 저녁 회의에서 미샤가 하나를 꺼낸다.

“죽이면 돼.”

발전기실 선반에서 가져온 플라스틱 통을 탁자 위에 놓는다. 노란 라벨. 연료용 살균제. 디젤 버그를 죽이는 약이다.

“쇄빙선에서도 이걸 썼어. 연료 1만 리터에 이거 1리터. 사흘이면 점액이 다 죽어. 20리터 있어.”

모두가 노란 통을 보고, 쥘리에트를 본다.

쥘리에트는 통이 아니라 미샤를 본다.

“다른 방법도 있어요.” 쥘리에트가 말한다. “얼리면 돼요.”

“얼려?”

“이 녀석들은 물속에서 살아요. 탱크 바닥의 물이요. 물이 얼면 아무것도 못 해요. 죽는 게 아니라 멈춰요. 1,500만 년 동안 영하에서 버틴 녀석들이에요. 얼음 속에서 기다릴 수 있어요.” 쥘리에트가 나를 본다. “연료 구역 온도를 영상 3도에서 영하로 낮추면 돼요.”

그 계산은 나도 이미 해 두었다. 쥘리에트가 물어볼 줄 알았다.

탱크 하나: 연료 약 15톤, 단열재 15cm 연료 구역을 영하 15도까지 떨어뜨리면 (생활 칸과 붙어 있어 그 아래로는 못 내림) 탱크가 잃는 열: 약 135와트 영상 3도에서 영하 5도까지 식히는 데: 약 4주 바닥 물이 다 얼 때까지: 5주 안팎

“단열재가 너무 좋아요.” 내가 말한다. “뜨거운 물이 식지 않게 만든 탱크예요. 이번엔 그게 차가워지지 않게 막아요. 5주 동안 미생물은 조금씩 느려지겠지만 그동안에도 먹어요. 내 계산으로는 2,500리터 넘게 더 잃어요.”

“살균제는요?” 이리나가 묻는다.

“미샤 말대로면 사흘이요.”

“사흘 대 5주.” 이리나가 칠판에 쓴다.

쥘리에트가 일어선다.

“사흘 대 5주가 아니에요. 죽이느냐 살리느냐예요.” 쥘리에트의 목소리가 떨린다. “이건 지구에 하나밖에 없는 표본일 수도 있어요. 호수에서 다시 꺼내려면 몇 년이 걸려요. 6G는 다시 얼었어요. 다음 시추가 언제일지, 그때 같은 걸 찾을 수 있을지 아무도 몰라요. 베르나르는 그걸 꺼내다가…….”

쥘리에트가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이 높이에서는 울면서 말할 수가 없다. 숨이 모자란다.

“5주면 2,500리터예요.” 에릭이 조용히 말한다. “열흘치요. 우리는 이미 40일이 모자라요.”

“투하가 오잖아요.”

“절반만 올 수도 있대요.”

쥘리에트가 대답하지 못한다. 이리나가 손을 든다.

“오늘은 결정 안 해요.” 이리나가 말한다. “미샤, 살균제를 병에 넣어 봐요. 정말 사흘인지. 소이, 냉각 계산 다시 해요. 더 빨리 할 방법이 있는지. 2주 뒤에 정해요.”

2주. 나는 머릿속으로 곱한다. 하루 90리터 남짓씩 2주면 1,200리터가 넘는다. 결정을 미루는 값이다. 나는 그 숫자를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이리나도 알 거다.


2주 동안 우리는 둘 다 한다. 그리고 매일 아침 칠판의 손실 숫자를 고쳐 쓴다.

미샤는 점액 병 여섯 개에 살균제를 정해진 비율로 넣는다. 쥘리에트가 이틀마다 세포를 센다. 이틀째, 움직이는 세포가 절반으로 준다. 나흘째,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엿새째, 형광 장치를 켜도 아무것도 빛나지 않는다.

쥘리에트는 그 병들을 셀 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숫자만 불러 준다. 나는 받아 적는다.

6월 14일, 손실 하루 90리터. 발전기 필터는 이제 하루에 하나씩 막힌다. 미샤는 예비 필터 상자를 열 때마다 남은 개수를 소리 내어 센다.

나는 냉각을 다시 계산한다. 단열재를 벗기면 빨라진다. 하지만 단열재는 탱크에 접착돼 있어서, 벗기려면 영하 15도 공기 속에서 며칠 동안 칼질을 해야 한다. 벗겨도 3주. 게다가 연료 구역을 영하 15도로 만들려면 생활 칸과의 사이에 벽을 세워야 하는데, 그 벽을 세울 자재가 없다. 계산할 때마다 숫자가 쥘리에트에게서 멀어진다.

그 숫자를 쥘리에트에게 그대로 보여 준다. 쥘리에트가 단열재 계산을 오래 보더니 말한다.

“제가 벗길게요. 칼로. 영하 15도에서 며칠이든.”

“벗겨도 3주예요.”

“3주면 2주 빨라진 거잖아요.”

“그동안 1,500리터를 더 잃어요. 그리고 쥘리에트 손이 남아나지 않아요. 미샤 손바닥 봤잖아요. 영하 40도에서 필터를 빨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나는 노트를 덮는다. “다니엘이 허락 안 할 거예요.”

쥘리에트가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든다.

“그럼 숫자가 바뀌면요? 손실이 생각보다 빨리 멈추면요? 곡선이 더 일찍 누우면요?”

“그럼 다시 계산할게요.” 내가 말한다. “어차피 매일 해요.”

쥘리에트가 웃는다. 지친 웃음이다. “소이는 매일 계산하죠. 그게 위로가 돼요. 이상하게.”

그러고는 자기 선반으로 돌아간다. 탱크 A 옆, 영상 3도의 선반. 쪼그려 앉아 물병을 하나씩 들어 불빛에 비춰 본다.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처럼.


6월 15일, 이리나가 출력한 종이 한 묶음을 칠판 옆에 붙인다.

동지 카드다. 해마다 밤이 가장 긴 6월 21일을 앞두고 남극의 기지들은 그림과 짧은 인사를 주고받는다. 올해 보스토크에는 서른한 장이 왔다.

맥머도는 펭귄 그림 아래 ‘보스토크, 우리가 여기 있다’라고 썼다. 장보고 기지가 보낸 김치찌개 사진 앞에는 알료샤가 한참 서 있다. 콩코르디아의 카드는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와 영어로 쓴 짧은 인사다. 쥘리에트가 그걸 떼어 자기 자리로 가져간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우리도 카드를 보낸다. 여덟 명이 헤드램프를 켜고 시추동 앞 눈밭에 나란히 선다. 셔터가 열린 15초 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사진에는 여덟 개의 불빛과 그 위로 피어오르는 여덟 줄기 하얀 김만 찍힌다.

이리나가 사진 아래에 한 줄을 쓴다.

‘보스토크, 여덟. 아직 셈하는 중.’


6월 20일 밤, 쥘리에트가 내 침낭 옆에 앉는다.

생활 칸은 어둡다. 다들 자고 있다. 발전기가 웅웅거린다. 바깥은 영하 74도. 보조 난로를 끈 지 사흘째라 생활 칸도 밤이면 영상 8도까지 떨어진다. 쥘리에트의 숨이 하얗다. 오늘 아침 칠판의 숫자는 96이었다. 내 곡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숫자다. 그게 더 무섭다.

“소이는 어디에 손 들 거예요?” 쥘리에트가 묻는다.

대답은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바로 말한다.

“규정 14조 6항. 오염원이 확인되면 제거한다.”

쥘리에트가 나를 본다. 어둠 속이라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 규정.” 쥘리에트가 말한다. “왜 만들었어요?”

“호수를 오염시키지 않으려고요. 지표의 미생물이 호수에 들어가지 않게.”

“그렇죠. 호수를 지키려고요.” 쥘리에트가 아주 천천히 말한다. “그 규정은 호수를 지키려고 만든 거잖아요. 호수에서 온 걸 죽이려고 만든 게 아니라.”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머릿속에서 47쪽을 넘긴다. 14조 6항. ‘오염원이 확인되면 제거한다.’ 이 조항을 쓰던 회의실이 떠오른다. 2029년, 인천. 창밖에 비가 왔다. 오염원이라는 말을 쓰면서 우리는 무엇을 떠올렸나. 시추액 속의 세균, 장비에 묻은 흙, 사람 피부의 미생물. 지표의 것들. 호수 밖에서 호수로 들어가려는 것들.

호수에서 나온 것이 우리 쪽으로 들어올 때 무엇이 오염원인지, 그 회의실에서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규정이 틀렸다는 게 아니에요.” 쥘리에트가 말한다. “규정이 이걸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규정이 대답해 주길 기다리지 말라는 거예요.”

쥘리에트가 일어나 자기 침낭으로 돌아간다. 나는 어둠 속에 누워 천장을 본다. 철골 사이 어딘가에서 추위에 오그라든 금속이 딱 하고 운다.

그날 밤 노트에는 아무것도 적지 않는다. 적을 숫자가 없다.

대신 쥘리에트의 말을 머릿속으로 여러 번 다시 듣는다. 규정이 대답해 주길 기다리지 말라는 말. 18년 동안 나는 규정이 대답하지 않는 일을 만난 적이 없다. 아니면 만났는데도 규정이 대답하는 척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투표까지 나흘 남았다. 그동안 탱크는 400리터 가까이를 벽 너머로 내뱉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