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8개월 · 7장
겨울 8개월 · 도해

7장

남극 보스토크 기지, 2032년 5월 24일
연료 잔량 42,500리터 · 첫 비행기까지 154일
약 9분

“디젤 버그.” 미샤가 말한다.

미샤가 검은 필터를 탁자 위 쟁반에 내려놓는다. 나흘 전 새벽에 뽑아낸 그 필터다. 버리지 않고 비닐봉지에 싸서 발전기실 구석에 두었다. 그사이 필터가 하나 더 막혔다. 사흘 만이다.

“무르만스크에서 배 탈 때 봤어. 북극 항로 쇄빙선. 연료 탱크 바닥에 물이 고이면 생겨. 물이랑 기름이 만나는 데. 거기서 뭐가 자라. 곰팡이, 세균. 점액을 만들어. 이렇게.” 미샤가 필터 주름을 손톱으로 긁는다. 검은 점액이 실처럼 늘어진다. “필터 막히고, 인젝터 막히고, 탱크 바닥 녹슬어. 선원들이 디젤 버그라고 불렀어. 벌레.”

“그게 연료를 먹어요?” 내가 묻는다.

“먹지. 물이랑 기름 사이에 살면서 기름을 조금씩 갉아 먹어. 그러면서 산 같은 걸 만들어. 그게 철을 녹이고.”

“얼마나요?”

미샤가 나를 본다. 무슨 뜻으로 묻는지 안다는 얼굴이다.

“몇 리터는 아니야. 몇 숟갈이지. 연료를 망치는 거지, 없애는 게 아니야. 쇄빙선 탱크가 300톤이었는데 연료가 사라졌다는 얘기는 못 들었어.”

미샤가 필터를 쟁반에 내려놓고 손을 닦는다.

“대신 그 녀석 때문에 배가 선 적은 있어. 카라해에서. 1월. 밤에 주 엔진 필터가 한꺼번에 막혔어. 넷 다. 예비 엔진으로 넘기려는데 그쪽도 같은 탱크에서 먹고 있었어. 얼음 한가운데서 배가 멈췄어. 열한 시간.” 미샤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는다. “영하 40도. 바람. 배가 얼음에 끼면 철판이 운다. 소리 지르는 것처럼. 그 소리를 열한 시간 들었어.”

“어떻게 했어요?”

“필터를 빨았어. 깨끗한 기름에 담가서 솔로. 하나 빨면 한 시간 돌고, 또 막히고, 또 빨고. 기관사 넷이 손이 다 터졌어.” 미샤가 자기 손바닥을 본다. 오래된 흉터가 얇게 남아 있다. “그다음부터 배를 탈 때마다 필터부터 셌어. 여기 와서도. 나는 필터를 세는 사람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말이 맞다면 이건 다른 문제다. 필터 문제. 연료가 사라지는 문제와는 별개다.

그런데 별개라고 하기엔 걸리는 게 있다.


우리는 탱크 바닥에서 시료를 뽑는다.

A와 B 맨 아래에는 시추할 때 침전물을 빼던 배수 밸브가 하나씩 있다. 체인을 풀고, 이리나가 지켜보는 앞에서 A의 밸브를 아주 조금 열어 유리병을 댄다.

처음 나오는 건 물이다. 탱크 바닥에 깔린 물, 3월에 30리터쯤 남아 있던 그 물. 그런데 맑지 않다. 회색이고 탁하다. 그다음에 덩어리가 나온다. 검고 끈적한 것이 물과 함께 병 속으로 굴러떨어진다. 마지막으로 맑은 호박색 등유. 병 속에서 셋이 층을 이룬다. 맨 아래 검은 덩어리, 그 위 회색 물, 맨 위 등유. 그리고 물과 등유 사이에 솜처럼 엉킨 회색 막.

섬프 얼음에서 봤던 그 띠와 같다. 쥘리에트의 물병 속 덩어리와도 같다.

B의 밸브도 연다. B에서도 회색 물이 나오지만 덩어리는 훨씬 적다. 막도 얇다.

나는 두 병을 나란히 놓는다. A, B. 사라지는 양이 세 배 많은 A. 점액도 몇 배 많은 A. 3월 8일, 섬프 연료 1,900리터를 부은 A.

“보스.” 에릭이 내 옆에서 두 병을 본다. “그거 우연이에요?”

“모르겠어요.”

정말로 모른다. 그래서 쥘리에트를 부른다.


쥘리에트의 현미경은 도시락만 한 상자에 든 현장용이다. 배터리로 돌아가고, 위상차 렌즈가 달려 있고, 파란 빛을 쏘는 작은 형광 장치도 붙어 있다. 원래는 세포를 염색해서 세는 데 쓴다고 한다. 실험동이 탈 때 이 상자는 쥘리에트의 침낭 옆에 있었다. 그래서 살아남았다.

쥘리에트가 A 병의 회색 막을 피펫으로 한 방울 떠서 유리판에 올리고 덮개 유리를 덮는다. 렌즈 아래에 놓고 초점을 맞춘다. 화면이 없어서 휴대폰을 접안렌즈에 대고 찍는다. 우리는 그 휴대폰 화면을 같이 본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 회색 바탕에 흐릿한 얼룩들. 쥘리에트가 초점 나사를 돌린다.

그리고 보인다.

세포. 수천 개. 작은 막대들이 사슬처럼 이어져 있다. 막대마다 살짝 휘어서, 사슬 전체가 쉼표를 이어 붙인 문장처럼 보인다. 그 사이사이에 작고 동그란 세포들이 포도송이처럼 뭉쳐 있다. 가는 실 같은 것이 그 모두를 얽어맨다. 점액이다. 세포들이 스스로 지은 집.

몇몇 막대가 움직인다. 꿈틀거리며 시야를 가로지른다.

“살아 있어요.” 쥘리에트가 말한다.

“디젤 버그네.” 미샤가 말한다. 휴대폰 화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쇄빙선에서도 이랬어.”

쥘리에트는 대답하지 않고 형광 장치를 켠다. 파란 빛. 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진다. 그 어둠 속에 점들이 떠오른다.

몇몇 세포가 빛난다. 염색하지 않았는데. 청록색으로, 희미하게. 전부가 아니라 동그란 세포 중 일부만. 반딧불처럼.

“이게 뭐예요?” 내가 묻는다.

쥘리에트가 잠시 화면을 보다가 고개를 젓는다.

“등유예요. 등유에도 형광을 내는 성분이 있어요. 방향족 화합물이요. 세포에 기름이 묻어서 그래요. 연료 시료에서는 흔해요.” 쥘리에트가 스위치를 끈다. “이건 의미 없어요.”

나는 그 청록색 점들을 기억해 둔다. 전문가가 의미 없다고 하면 의미 없는 거다.


그날 밤 쥘리에트가 나를 깨운다.

태블릿 화면 불빛에 얼굴이 하얗다. 침낭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태블릿을 내민다.

“이거 보세요. 제발.”

메시지 앱이다. 보낸 사람 베르나르. 2월 17일 01시 31분. 화재 70분 전이다.

Regarde! 살아 있어. 용기 2번. 압력 빼는 동안 움직이기 시작했어. 내일 아침에 보자. 잘 자, 쥘리에트.

메시지 아래에 사진 세 장이 붙어 있다. 베르나르가 실험동의 큰 현미경으로 찍은 위상차 사진이다. 쥘리에트의 휴대폰 사진보다 훨씬 선명하다.

휘어진 막대들이 사슬처럼 이어져 있다. 쉼표를 이어 붙인 문장처럼.

쥘리에트가 그 옆에 자기 휴대폰을 놓는다. 오늘 오후에 찍은 A 탱크 시료 사진. 두 화면이 나란히 놓인다.

같은 모양이다.

나는 두 화면을 오래 본다. 막대가 휘어진 각도, 사슬의 길이, 사슬이 끝나는 모양. 같아 보인다. 정말로.

“이건 호수 거예요.” 쥘리에트가 다른 사람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속삭인다. 그런데 목소리가 떨려서 속삭임이 잘 안 된다. “6번 용기에서 섬프로, 섬프에서 연료로, 연료에서 A 탱크로. 3월 8일부터 저기 살았어요. 두 달 반 동안. 베르나르가 본 걸 저도 보고 있어요.”


우리는 한참 그 두 화면을 본다. 쥘리에트가 먼저 태블릿을 내리고, 내 침낭 옆 바닥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는다.

“그날 베르나르가 웃었잖아요.” 쥘리에트가 말한다. “소이가 1,500만 년 된 물이 아니라고 했을 때. 숫자는 소이가, 경이는 우리가.”

“기억해요.”

“저는 그때 화가 났어요.” 쥘리에트가 솔직하게 말한다. “소이한테요. 그 순간을 망쳤다고 생각했어요. 3년을 기다린 순간이었는데.” 쥘리에트가 무릎에 턱을 괸다. “그런데 그날 밤 베르나르가 저한테 그랬어요. 소이 같은 사람이 있어서 우리가 경이를 말할 수 있는 거라고. 그 사람이 숫자를 지키니까 우리가 꿈을 꿔도 된다고. 2012년에 다들 너무 빨리 꿈을 꿔서 망했다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베르나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걸 몰랐다.

“그래서 지금 소이가 모른다고 하면.” 쥘리에트가 일어선다. 태블릿을 품에 안는다. “저는 화가 날 거예요. 그래도 그게 맞다는 건 알아요. 내일 회의에서 소이는 모른다고 하세요. 저는 안다고 할게요. 둘 다 해야 돼요. 베르나르가 그랬어요.”

쥘리에트가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나는 다시 눕는다. 잠이 오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회의에서 쥘리에트가 사진 두 장을 칠판 옆에 붙인다.

반응은 둘로 나뉜다.

“디젤 버그예요.” 에릭이 말한다. “흔한 거예요. 미샤도 봤다잖아요. 탱크 바닥에 물이 있으면 생긴다면서요. 우리 탱크엔 물이 있었고요.”

“모양이 같잖아요.” 쥘리에트가 말한다.

“세균은 다 막대기처럼 생겼잖아요.”

“다 이렇게 휘지 않아요. 다 이렇게 사슬을 만들지 않아요.”

이리나는 표정 없이 사진을 본다. 이리나가 원하는 건 숫자다. 사진은 숫자가 아니다.

“그게 뭐든.” 이리나가 말한다. “필터를 막아요. 필터 몇 개 남았어요?”

미샤가 대답한다.

“예비 60개. 원래 120개 있었는데 반은 발전동 창고에 있었어. 지금 사흘에 하나. 이대로면 다섯 달은 가.”

“이대로면요.” 내가 말한다.

모두가 나를 본다. 나는 칠판 앞으로 나간다. 사라지는 리터의 그래프. 위로 휘는 곡선. 그 옆에 필터가 막힌 날을 적는다. 5월 20일 첫 번째, 5월 23일 두 번째. 저 곡선이 맞다면 필터가 막히는 간격도 곡선을 따라 줄어들 거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두 그래프를 겹쳐 본다. 사라지는 연료와 늘어나는 점액. A에서 더 많이 사라지고, A에 점액이 더 많다. 섬프 연료를 부은 날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둘 다 2주마다 두 배씩 늘었다.

천위가 손을 든다. 회의에서 손을 드는 사람은 천위뿐이다.

“모양이 같다고 같은 생물은 아니에요.” 천위가 쥘리에트에게 부드럽게 말한다. “유전자를 봐야 해요.”

“유전자 분석기는 실험동에 있었어요.” 쥘리에트가 말한다. “알잖아요.”

“알아요. 그러니까 아직 몰라요.”

맞는 말이다. 나는 그 말에 기댄다. 그게 내 방식이니까.

“모양은 증거가 아니에요.” 내가 말한다. “같아 보인다는 건 같다는 게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아는 건 세 가지예요. 탱크에 뭔가 살고 있다. 그게 필터를 막는다. 그리고 A에 더 많다. 그게 호수 건지 아닌지는 몰라요. 그게 연료가 사라지는 것과 관계가 있는지도 몰라요. 미샤 말대로라면 디젤 버그는 연료를 몇 숟갈밖에 안 먹어요. 우리는 하루에 60리터를 잃고 있어요.”

쥘리에트가 나를 본다. 그 눈에 무언가가 있다. 실망인지 분노인지.

“소이.” 쥘리에트가 말한다. “증거가 없다고 하죠. 47쪽짜리 규정까지 만들어서 지키려던 그 호수가 지금 저 탱크 안에 살아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모른다는 말만 해요.”

“모르니까요.”

“그럼 알아내요.” 쥘리에트가 일어선다. 사진 두 장을 칠판에서 떼어 손에 쥔다. “이건 오염이 아니에요. 증거예요.”


회의는 거기서 끝난다. 이리나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내릴 결론이 없다. 칠판의 6번은 그대로다. ‘누가 가져간다.’ 그 옆에 쥘리에트가 사진을 붙였던 테이프 자국만 두 줄 남는다.

그날 밤 나는 A 탱크 앞에 혼자 선다. 당번 시간이 아니지만 이리나가 허락했다. 체인은 풀지 않는다. 그냥 본다.

은빛 단열재를 두른 둥근 탱크. 그 안에 연료가 1만 6천 리터쯤 있다. 바닥에는 회색 물이, 그 물과 연료 사이에는 세포 수천억 개가 엉긴 막이 있다. 쉼표 모양의 사슬들. 점액의 집. 영상 3도의 어둠.

호수 바닥의 물은 영하 3도였다. 이 탱크는 영상 3도다. 호수 위에는 4킬로미터의 얼음이 있었다. 이 탱크 위에는 15센티미터의 단열재가 있다. 호수에는 빛이 없었다. 이 탱크에도 없다.

만약 쥘리에트가 맞다면. 이 세포들이 1,500만 년 동안 갇혀 있던 혈통의 후손이라면. 그것들이 지금 우리 연료 속에서 살고 있다면.

그리고 그 연료를 먹고 있다면.

A 탱크 위의 숨구멍을 본다. 손가락 굵기의 관. 거기서 다시 그 소리가 난다. 아주 작게. 쉬이이.

송풍구 쪽을 올려다본다. 송풍구는 멈춰 있다. 발전기가 선 다음 날부터 밤 11시에서 새벽 5시까지는 꺼 두기로 했다. 연료 한 숟갈, 필터 하루라도 아끼려고. 내가 짠 일정이다.

소리가 또 난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오래 숨구멍을 본다. 그리고 노트를 꺼내 5월 13일에 적어 둔 ‘02:40 A 위쪽 쉬익 소리 — 송풍구?’ 옆에 한 줄을 더 적는다.

‘5월 24일 23:50 송풍구 꺼짐. 소리 있음.’

물음표를 지우지 않는다. 대신 하나 더 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