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는 두 개다. 하나는 이리나의 목에, 하나는 내 목에.
아침 회의에서 이리나가 그 사실을 칠판에 쓴다. 숨기지 않는 게 이리나의 방식이다. 6번 아래에 작은 글씨로.
열쇠: 이리나, 소이
“그럼 보스예요?” 에릭이 말한다. 웃자고 한 말이지만 아무도 웃지 않는다. 에릭의 눈썹 위에는 꿰맨 자국이 아직 검다.
“아니면 열쇠가 하나 더 있거나.” 이리나가 말한다.
“아니면 열쇠가 필요 없거나요.” 내가 말한다.
모두가 나를 본다. 나는 A 탱크 위를 가리킨다. 손가락 굵기의 관, 숨구멍.
어젯밤 그걸 시험해 봤다. 창고에서 지름 6밀리미터짜리 가는 호스를 찾아 숨구멍에 밀어 넣었다. 들어갔다. 관이 탱크 안으로 곧게 이어져 있어서 2미터쯤 밀어 넣으면 호스 끝이 연료에 닿는다. 반대쪽 끝을 입으로 빨아 사이펀을 만들면 연료가 나온다. 느리게, 한 시간에 10리터쯤. 자물쇠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니까 누구든 할 수 있어요.” 나는 결론을 말한다. “이 방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말하고 나서야 깨닫는다. 이 방법을 지금 모두가 안다. 내가 방금 가르쳤다.
의심이 번지는 데는 사흘이면 충분하다.
처음에는 아무도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를 보는 방식이 바뀐다. 누가 탱크 구역 쪽으로 걸어가면 다른 누가 고개를 든다. 누가 밤에 화장실에 가면 침낭 속에서 누군가 숨을 죽인다. 대화가 짧아진다. 식탁 자리가 바뀐다. 다섯, 둘, 그리고 혼자 발전기실 앞에 앉는 미샤.
5월 10일, 에릭이 처음으로 다른 이름을 말한다.
“쥘리에트는 맨날 탱크 옆에 있잖아요.”
맞는 말이다. 쥘리에트는 섬프에서 받은 물병 스무 개를 탱크 A 옆 선반에 두었다. 시추동에서 호수와 가장 가까운 온도, 영상 3도라서다. 쥘리에트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선반 앞에 쪼그려 앉아 병을 들여다본다.
쥘리에트가 에릭을 본다. 얼굴이 붉어진다.
“제가 연료를 왜 가져가요? 마시려고요?”
“그걸 모르니까 물어보는 거죠.”
“저는…….” 쥘리에트가 말을 고르다가 포기하고 프랑스어로 무언가를 내뱉는다. 그러고는 일어나 나가 버린다.
천위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인데, 이제는 그 침묵이 다르게 들린다. 알료샤는 요리를 하다가 울었다고 다니엘이 알려 준다. 미샤 아저씨를 고자질한 게 자기라서. 아무도 알료샤를 탓하지 않았는데도.
이리나가 감시 당번을 짠다. 밤 10시부터 아침 6시까지, 두 시간씩 두 사람이 탱크 구역에 의자 두 개를 놓고 앉아 있는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감시하고, 그 둘이 탱크를 감시한다. 짝은 날마다 바뀐다. 같은 사람과 두 번 연달아 앉지 않는다.
당번표를 보며 생각한다. 우리는 이제 서로를 지키는 게 아니라 서로를 지켜본다.
5월 13일,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내 당번이다. 짝은 다니엘이다.
탱크 구역은 시추동에서 가장 어둡고 춥다. 조명은 아끼느라 하나만 켜 둔다. 그 불빛이 A와 B의 둥근 옆구리를 희미하게 비춘다. 단열재를 감싼 은빛 덮개가 녹슨 달 같다.
다니엘은 담요를 두르고 앉아 헤드램프 불빛 하나로 영국 소설을 읽는다. 나는 노트를 펴고 오늘 숫자를 다시 계산한다. 그리고 소리를 듣는다.
밤의 시추동은 소리로 가득하다. 발전기가 웅웅거리고, 히터 송풍구가 덜컹거리고, 철골이 추위에 오그라들며 이따금 딱 하고 운다. 바깥 기온이 영하 70도로 떨어지면 건물 전체가 몸을 웅크린다. 다 익숙한 소리다.
그런데 그 사이에 익숙하지 않은 소리가 하나 있다.
아주 작다. 쉬이이. 숨을 내쉬는 것 같은 소리. 끊어졌다가 몇 초 뒤에 다시.
고개를 든다. A 쪽, 탱크 위쪽에서 나는 것 같다.
“들려요?” 내가 다니엘에게 묻는다.
다니엘이 책에서 고개를 들고 몇 초 귀를 기울인다.
“히터예요.” 다니엘이 말한다. “송풍구 하나가 저 위에 있잖아요. 저것도 밤에는 숨을 쉬어요.”
맞다. 탱크 구역 천장 쪽에 송풍구가 하나 있다. 나는 다시 노트를 본다. 소리가 또 난다. 쉬이이. 송풍구 소리라고 생각하면 송풍구 소리로 들린다.
노트 귀퉁이에 적는다. ‘02:40 A 위쪽 쉬익 소리 — 송풍구?’ 물음표를 붙이고 다음 줄로 넘어간다.
5월 16일 새벽, 미샤가 온다.
그날 내 짝은 이리나다. 새벽 4시, 미샤가 발전기실에서 나와 탱크 구역으로 걸어오다가 우리 둘을 보고 걸음을 멈춘다. 이리나가 의자에서 일어난다.
“앉아.” 미샤가 말한다. “말할 게 있어. 둘한테.”
미샤가 바닥의 공구 상자 위에 앉는다. 무릎이 우리 의자보다 낮다. 그 높이에서 우리를 올려다본다. 이렇게 낮은 데 있는 미샤는 처음 본다.
“새벽에 나간 거.” 미샤가 말한다. “표트르한테 간 거야.”
이리나가 움직이지 않는다.
“눈 창고. 표트르 자리 앞에 등유 등잔을 하나 켜 놨어. 1998년에 표트르랑 처음 여기 왔을 때 그 사람이 가르쳐 준 거야. 러시아 사람은 죽은 사람 앞에 불을 켜 둔다고. 사흘에 한 번 기름을 채웠어. 그 작은 통으로.” 미샤가 손으로 크기를 보여 준다. 우유 팩만 하다. “일주일에 2리터도 안 돼. 일일 탱크에서 받았어. 장부에도 적었어. ‘등잔’이라고. 아무도 내 장부를 안 봤지만.”
알료샤가 본 ‘작은 통’을 떠올린다. 새벽 3시, A 탱크 앞. A 탱크 옆에는 뒷문이 있다. 눈 창고로 가는 문.
“왜 말 안 했어요?” 이리나가 묻는다.
미샤가 웃는다. 웃음이라기엔 너무 짧게.
“우는 거 들킬까 봐.”
조용하다. 발전기가 웅웅거린다.
“그리고 하나 더.” 미샤가 말한다. “이건 진짜로 가져간 거야.”
옛 5G 시추동은 200미터 떨어져 있다. 우리는 헤드램프를 켜고 걸어간다. 5월 중순의 보스토크는 정오에도 어둡다. 지평선 아래 숨은 해가 북쪽 하늘을 아주 잠깐 남색으로 물들일 뿐이다. 지금은 새벽 4시 반, 하늘에는 별이 너무 많다. 영하 71도. 숨을 쉴 때마다 콧속 털이 얼어 바늘처럼 찌른다.
5G 시추동은 우리 시추동보다 작고 낡았다. 문을 열자 안이 바깥보다 더 차갑게 느껴진다. 공기가 갇혀 움직이지 않는다. 헤드램프 빛 속에 2012년의 녹슨 윈치와 시추 장비가 그대로 서 있다. 바닥 한가운데에 5G 시추공이 있다. 깊이 3,769미터. 예전에는 얼음이 다시 오므라들지 못하게 등유와 프레온을 섞은 시추액을 가득 채워 두었다. 지금은 없다. 국제 공동 시추를 시작하면서 시추액 60톤을 모두 퍼내 배로 실어 갔다. 호수를 더럽히지 않겠다는 약속이었고, 그 약속의 나머지 절반이 6G였다. 시추액이 빠진 구멍은 깊은 곳부터 얼음이 오므라들어 닫혔다. 이제 남은 건 뚜껑 덮인 쇠 테두리뿐이다.
미샤가 구석의 방수포를 걷는다. 성에가 하얗게 덮인 드럼 두 개. 미샤가 장갑으로 한쪽 드럼의 성에를 문지르자 페인트로 쓴 글씨가 나온다.
“2월 18일.” 미샤가 말한다. “불 난 다음 날 밤. 소이가 계량하기 전에. 일일 탱크에서 받았어. 200리터씩, 400리터.”
“왜요?” 내가 묻는다.
“아버지 규칙.” 미샤가 드럼을 손바닥으로 두드린다. 둔한 소리가 난다. 꽉 차 있다. “1982년에 아버지는 다 셌어. 연료를 몇 번이고 셌어. 그런데 그 겨울 중간에 계산이 틀렸어. 난로가 생각보다 많이 먹었대. 그때 그 사람들을 살린 게 누가 숨겨 놨던 드럼 세 개였어. 아무도 몰랐던 거. 장부에 없던 거. 그 뒤로 아버지는 어디서 겨울을 나든 장부에 없는 연료를 꼭 남겨 뒀어. 보이지 않는 연료. 그래야 계산이 틀려도 산다고.”
미샤가 나를 본다.
“넌 계산이 안 틀린다고 하겠지. 나도 알아. 넌 계산 잘해. 그래도 난 아버지 말을 믿어.”
나는 드럼을 본다. 400리터. 그리고 머릿속에서 다른 숫자를 꺼낸다. 3월 8일부터 오늘까지 사라진 양. 온도를 보정하고 유량계 오차를 빼고 남은 것.
1,300리터가 넘는다.
400리터는 2월에 빠졌다. 내 계량이 시작되기 전이다. 일일 탱크의 6,800리터는 내가 잰 숫자가 아니라 미샤가 불러 준 숫자였다. 그러니 내 그래프에는 들어 있지도 않다. 그리고 미샤는 그 뒤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등잔 기름 2리터씩을 장부에 꼬박꼬박 적어 가며.
“이건 설명이 안 돼요.” 내가 말한다.
“뭐가.”
“미샤가 가져간 걸로는. 숫자가 안 맞아요.” 나는 숨을 쉰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긁는다. “미샤가 아니에요.”
미샤가 나를 한참 본다. 헤드램프 불빛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는다.
“그걸 숫자로 알아야 돼?” 그가 말한다.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그날 아침 회의에서 미샤가 모두에게 말한다. 등잔, 드럼, 1982년. 이리나가 칠판에 숫자를 쓴다. 400리터, 2월 18일. 그리고 내 그래프 옆에 적는다. ‘미샤 드럼과 무관.’
에릭이 먼저 일어선다.
에릭이 미샤 앞으로 걸어간다. 미샤가 의자에 앉은 채 올려다본다. 에릭의 눈썹 위 꿰맨 자국. 미샤의 붕대 감은 주먹.
“미안해요.” 에릭이 말한다. 농담 없이. “진짜로.”
미샤가 에릭을 보더니 붕대 감은 손을 내민다. 에릭이 그 손을 잡는다. 미샤가 아프다고 러시아어로 욕을 한다. 에릭이 웃는다. 몇 주 만에 진짜로.
이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칠판 앞에서 6번 옆에 무언가를 쓰려다가 분필을 내려놓는다. 미샤를 보지 않는다. 연료 업무를 돌려주겠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미샤도 묻지 않는다. 그날 밤에도 그는 발전기실에서 잔다.
6번은 줄이 그어지지 않은 채 칠판에 남는다. 미샤가 아니라면 누구지? 그 질문이 이제 더 크게 남는다. 사람들은 다시 서로를 본다.
쥘리에트가 내게 물병 하나를 들고 온다. 5월 18일 밤이다.
“이거 보세요.”
섬프에서 받은 물병 가운데 하나다. 3월 7일 라벨. 처음 받았을 때는 소화 분말이 섞인 우윳빛 물이었다. 지금은 회색이다. 병 바닥에 검은 침전물이 깔려 있고, 물과 그 위의 얇은 등유 막 사이에 솜 같은 회색 덩어리가 떠 있다.
“스무 개 다 이래요.” 쥘리에트가 말한다. “뭔가 자라요. 섬프 물이니까 오염됐겠죠. 흙, 사람 손, 연료에 원래 사는 것들. 아마 그거예요. 그런데…….”
“그런데요?”
“6번 용기가 섬프에 있었잖아요.” 쥘리에트가 병을 조명에 비춘다. 회색 덩어리가 천천히 흔들린다. “만약에, 만약에 그게 호수 거라면요.”
나는 병을 보고, 탱크를 보고, 다시 병을 본다.
“그건 병 속 일이에요.” 내가 말한다. “지금 우리 문제는 탱크예요.”
쥘리에트가 나를 보며 무언가 말하려다 만다. 병을 들고 선반으로 돌아간다. 탱크 A 바로 옆, 영상 3도의 선반으로.
5월 20일, 새벽 3시 10분.
발전기가 멈춘다.
먼저 소리가 사라진다. 그 순간 나는 깬다. 석 달 동안 한 번도 끊긴 적 없는 웅웅거림이 사라지자 시추동의 고요가 귀를 찌른다. 그다음에 조명이 꺼지고, 비상등 두 개만 붉게 켜진다. 송풍구가 멈춘다.
누군가 소리를 지른다. 침낭 지퍼 내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난다.
시계를 본다. 03시 10분. 바깥 기온은 영하 72도다. 영상 15도인 생활 칸이 영하로 떨어지는 데는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다음엔 물 배관이 얼고, 눈 녹이는 장치가 얼고, 발전기 냉각수가…….
발전기실에서 미샤의 러시아어 욕이 줄줄이 들린다. 그는 이미 거기 있다. 거기서 자고 있었으니까.
내가 발전기실에 닿았을 때 미샤는 헤드램프를 이마에 걸고 엔진 옆에 무릎을 꿇은 채 연료 필터 하우징을 열고 있다.
“연료가 안 와.” 미샤가 말한다. “필터.”
미샤가 필터를 뽑아낸다. 원통형 종이 필터. 원래는 하얀데, 헤드램프 불빛 속에서 그건 검다. 미샤가 장갑 낀 손으로 쥐자 주름진 표면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린다. 끈적하고 검은 점액. 콧물 같은.
미샤가 새 필터를 끼운다. 30년 동안 해 온 손이라 빠르다. 연료 라인의 공기를 빼고 시동 버튼을 누른다. 엔진이 한 번 기침하고, 두 번 기침하고, 돈다.
조명이 켜진다. 송풍구가 덜컹거리며 다시 숨을 쉰다.
시계를 본다. 03시 21분. 11분.
생활 칸 온도계는 영상 11도를 가리킨다. 11분에 4도가 떨어졌다.
미샤가 검은 필터를 든 채 일어선다. 헤드램프 불빛이 점액을 비춘다. 미샤가 코를 대고 냄새를 맡더니 얼굴을 찡그린다.
“이거.” 미샤가 말한다. “본 적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