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8개월 · 5장
겨울 8개월 · 도해

5장

남극 보스토크 기지, 2032년 4월 22일
연료 잔량 52,240리터 · 첫 비행기까지 186일
약 8분

일주일 더 쟀다. 숫자는 같지 않았다. 더 커졌다.

4월 8일 14리터 4월 12일 16리터 4월 16일 19리터 4월 21일 23리터

이 숫자들을 그래프로 그려 본다. 가로축은 날짜, 세로축은 사라진 리터. 점들이 위로 휘어 올라간다.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날마다 같은 양을 가져가는 게 아니라, 가져가는 양이 늘고 있다. 2주마다 두 배쯤.

누가 이렇게 가져가지?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조금씩. 그러다 들키지 않으니 점점 대담하게.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다. 그 그래프가 한 사람의 마음이 변해 가는 모양으로 보인다는 게 싫다.

그 주에 나는 한 가지를 더 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뒷문에 테이프를 붙였다. 문틀과 문짝에 걸쳐 가느다란 종이테이프 한 줄. 그 위에 볼펜으로 서명했다. 시료 상자를 봉인할 때 쓰는 방법이다. 누가 문을 열면 테이프가 끊어진다. 다시 붙여도 서명이 어긋난다.

일주일 동안 테이프는 세 번 끊어졌다. 4월 15일, 18일, 20일. 셋 다 새벽이다.

4월 20일 아침, 알료샤가 부엌 칸에서 나를 부른다. 냄비를 젓는 손이 불안하다.

“박사님. 이상한 거 물어봐도 돼요?”

“뭔데요?”

“어젯밤에 화장실 가다가 봤어요. 3시쯤. 미샤 아저씨가 A 탱크 앞에 있었어요. 손에 통을 들고요. 작은 통이요.” 알료샤가 국자를 내려놓는다. “그냥, 그냥 말하는 거예요.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저한테 설상차 시동 거는 법도 가르쳐 줬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고맙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을 노트에 적지 않는다. 적으면 증거가 된다. 증거가 되면 되돌릴 수 없다.

그날 저녁, 결국 이리나에게 말한다.


4월 24일, 해가 마지막으로 진다.

요즘 보스토크의 해는 하루 몇 시간만 북쪽 지평선 위로 고개를 내민다. 오늘이 그 마지막이다. 내일부터 해는 지평선 아래에 머문다. 8월 중순까지 116일 동안.

정오에 우리는 모두 밖으로 나간다. 아무도 그러자고 하지 않았는데 다들 옷을 입고 있다. 영하 66도. 바람은 없다. 일곱 겹을 껴입고 시추동 북쪽 눈 둔덕 위에 나란히 선다. 여덟 명이 숨을 쉴 때마다 하얀 김이 피어올라 머리 위에서 얼어붙고, 얼음 결정이 반짝이며 떨어진다. 다이아몬드 먼지라고 부른다.

해는 지평선 위로 반쯤만 올라온다. 붉다. 아니, 붉다는 말로는 모자라다. 공기가 너무 차고 깨끗해서 색이 층층이 나뉜다. 지평선 바로 위는 핏빛, 그 위는 주황, 그 위는 이상한 초록, 그리고 하늘 꼭대기는 거의 검은 남색이다. 하얀 눈밭 전체가 분홍빛으로 물든다. 그림자가 수백 미터씩 늘어난다. 내 그림자가 불탄 발전동까지 닿는다.

이리나가 장갑 낀 손에 든 기록판을 소리 내어 읽는다.

“4월 24일. 기온 영하 66.2도. 기압 618헥토파스칼. 풍속 0. 일몰 13시 41분.”

아무도 대꾸하지 않는다. 이리나는 기록판을 내린다.

해가 천천히 지평선 아래로 내려간다. 마지막 붉은 점이 사라진다. 하늘의 색은 남는다. 몇십 분은 남아 있을 거다.

내 옆에 선 미샤가 러시아어로 무어라 중얼거린다. 해에게 하는 말 같다. 표트르가 기지를 ‘그녀’라고 불렀듯이 미샤는 기계에게 말을 건다. 해에게도 건다.

나는 미샤의 옆얼굴을 본다. 수염에 성에가 하얗게 엉켜 있다. 이 사람이 새벽 3시에 A 탱크 앞에서 통을 들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지평선을 본다. 해가 사라진 자리를.


4월 26일 저녁, 이리나가 회의를 연다.

이리나는 자기 방식대로 한다. 숫자부터. 칠판에 내 그래프를 옮겨 그린다. 위로 휘는 곡선. 그리고 그 아래에 6번을 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처음부터 써 놓아야 한다던 그대로.

  1. 누가 가져간다

“5번까지는 소이가 지웠어요.” 이리나가 말한다. “6번은 아직이에요. 그래서 말해요. 머릿속에 따로 쓰지 말라고.”

조용하다. 발전기 소리만 들린다.

그 조용함을 에릭이 깬다.

“뒷문 테이프.” 에릭이 말한다. 나를 보면서. “보스가 붙인 거 알아요. 끊어진 것도 봤어요. 새벽에. 세 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에릭은 내 팀이다. 내가 하는 일을 늘 본다. 그래서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도 안다.

“미샤.” 에릭이 미샤를 본다. “새벽에 뭐 해요?”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던 미샤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내 일이야.”

“우리 연료예요.”

“내 일이라고.”

“알료샤가 봤대요. 3시에. A 탱크 앞에서. 통 들고.”

알료샤의 얼굴이 하얘진다. 미샤가 알료샤를 오래 본다. 알료샤가 고개를 숙인다.

“그래.” 미샤가 말한다. “봤겠지. 갔으니까.”

“뭘 하러요?”

“말 안 해.”

에릭이 일어선다. 의자가 뒤로 넘어간다.

“30년 동안 연료를 관리했다면서요. 계량하자고 했을 때 제일 싫어한 사람이 누구예요? 계량 오차라고 한 사람이 누구예요? 보스가 유량계 잰다고 했을 때 얼굴 굳은 사람이 누구예요?” 에릭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하루 23리터예요, 미샤. 23리터! 우리 다 죽어요, 이러다가!”

미샤가 일어선다.

그다음은 빠르다. 미샤가 손바닥으로 에릭의 가슴을 세게 민다. 뒤로 비틀거린 에릭이 주먹을 휘두른다. 미샤의 광대뼈에 맞는다. 고개가 한 번 돌아갔던 미샤가 에릭의 이마를 친다. 둔한 소리가 난다. 에릭이 쓰러진다. 다니엘과 천위가 미샤를 붙잡는다. 이리나가 둘 사이에 선다.

고지대에서는 싸움도 오래가지 않는다. 10초 만에 둘 다 숨이 차서 허리를 접는다. 에릭의 눈썹 위가 찢어져 피가 흐른다. 미샤의 주먹 관절이 벗겨졌다.

이리나가 말한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앉아요. 둘 다.”


다니엘이 에릭의 눈썹을 네 바늘 꿰맨다. 진료 칸 조명 아래서 다니엘의 손은 조용하다. 꿰매는 내내 에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농담이 사라졌다. 화가 나면 그렇다.

미샤는 발전기실 앞 의자에 혼자 앉아 있다. 다니엘이 소독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는 동안 미샤는 손을 맡긴 채 발전기만 본다.

그 사이에 이리나가 결정을 내린다. 칠판 앞에서, 모두에게.

“오늘부터 탱크 구역을 잠가요. 이송 밸브, 탱크 맨홀, 뒷문. 열쇠는 둘. 나랑 소이.” 이리나가 미샤 쪽을 보지 않고 말한다. “연료 이송과 계량은 소이가 맡아요. 미샤는 발전기만.”

미샤가 고개를 든다. 이리나를 본다. 그리고 나를 본다.

나는 그 눈을 피하지 않으려 한다. 실패한다.

“좋아.” 미샤가 말한다. 그 한마디뿐이다.


그날 밤 미샤는 침낭을 들고 발전기실로 간다. 시끄럽고 덥고 기름 냄새가 나서 아무도 자지 않는 곳이다. 미샤는 거기서 잔다.

나는 잠자는 칸에 눈을 뜨고 누워 있다. 방수포 너머로 엔진 소리가 들리고, 그 사이로 가끔 미샤가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면 그렇게 들린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한 일을 생각한다.

나는 숫자를 쟀다. 숫자가 이상했다. 그래서 하나씩 지웠다. 옳은 방법이다. 내가 아는 가장 옳은 방법이다. 그 방법이 끝에 가서 한 사람을 가리켰고, 지금 그 사람은 발전기실 바닥에서 자고 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유도 말하지 않는다. 미샤가 새벽 3시에 왜 A 탱크 앞에 있었는지 숫자는 모른다. 나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를 발전기실로 보냈다.

규정에는 이런 조항이 없다. 의심을 어떻게 다룰지. 47쪽 어디에도.


새벽 2시쯤, 누군가 내 침낭 옆에 쪼그려 앉는다. 알료샤다. 헤드램프를 손으로 가려 빛이 새지 않게 하고 있다. 손가락 사이로 붉은빛이 번지고, 그 빛에 비친 얼굴이 젖어 있다.

“박사님.” 알료샤가 속삭인다. “제가 말해서 그런 거예요.”

“뭐가요?”

“미샤 아저씨가 저기서 자는 거요. 제가 봤다고 해서. 3시에, 통 들고.” 알료샤가 코를 훌쩍인다. “말하지 말걸 그랬어요. 아저씨가 저한테 설상차 시동 거는 법 가르쳐 줬는데. 엔진 밑에 버너 대는 거, 손 안 데게 하는 거. 다 가르쳐 줬는데.”

나는 침낭에서 팔을 꺼낸다. 알료샤의 손목을 잡는다. 차갑다.

“알료샤는 본 걸 말했어요.” 내가 말한다. “본 걸 말하는 건 잘못이 아니에요. 그걸로 무엇을 정하느냐는 다른 사람들 몫이에요. 알료샤 몫이 아니에요.”

알료샤가 나를 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자기 침낭으로 돌아간다.

나는 다시 천장을 본다. 방금 한 말을 다시 듣는다. 본 걸 말하는 건 잘못이 아니다. 그걸로 무엇을 정하느냐는 다른 사람 몫이다.

나도 숫자를 본 대로 말했다. 이리나가 정했다. 그러니 내 잘못이 아니다.

그 논리는 알료샤에게는 맞다. 스물여섯 살, 첫 월동, 새벽 3시에 화장실 가다가 본 걸 말한 사람에게는. 서른아홉 살, 오차를 하나씩 지워 끝에 한 사람만 남긴 사람에게도 맞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 숫자를 그냥 본 게 아니다. 그 숫자가 그 사람을 가리키도록 줄을 그었다. 한 줄씩. 정확하게.

발전기실 쪽에서 엔진 소리가 일정하게 들린다. 미샤가 뒤척이는 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는다. 자는 건지, 깨어서 가만히 있는 건지 모르겠다.


자물쇠는 다음 날 아침에 채운다.

체인 세 줄. 이송 밸브 두 개를 묶는 체인, 탱크 A와 B 맨홀 손잡이를 묶는 체인, 뒷문 손잡이와 벽 고리를 묶는 체인. 자물쇠는 창고에서 꺼낸, 열쇠가 두 개씩 딸린 놋쇠 자물쇠다. 열쇠 하나는 이리나 목에, 하나는 내 목에 건다.

연료 이송은 이제 내 일이다. 매일 아침 8시, 계량 막대로 세 번 재고, 온도계 세 개를 읽고, 체인을 풀고, 이송 펌프를 돌리고, 일일 탱크를 채우고, 체인을 채운다. 이리나가 옆에서 지켜본다. 이것도 규칙이다. 열쇠를 가진 사람도 혼자 열지 않는다.

첫날 아침, 내가 이송 펌프 스위치를 올리자 발전기실 문이 반쯤 열린다. 미샤가 문틀에 기대 서서 말없이 이쪽을 본다. 계량 막대를 넣는 내 손을 보고, 온도계를 읽는 눈을 보고, 펌프 압력계를 본다. 30년 동안 자기 손이 하던 일을 남의 손이 하는 걸 본다.

펌프가 일일 탱크를 다 채울 즈음 미샤가 한마디 한다.

“압력 2.4 넘기지 마. 저 녀석 패킹이 약해.”

그러고는 문을 닫는다.

압력계를 본다. 2.6이다. 밸브를 조금 잠근다. 2.3. 이리나는 그걸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노트에 적는다. ‘이송 압력 2.4 이하 (미샤).’ 괄호 안의 이름을 지우지 않는다.

이제 숫자가 답을 줄 거다. 자물쇠를 채운 뒤에 사라지는 양이 줄면 6번이 맞은 거다. 그다음은 이리나가 정할 일이다.

나는 그 답이 맞기를 바라는지, 틀리기를 바라는지 모르겠다.


5월 1일, 31리터.

5월 3일, 35리터.

5월 5일, 38리터.

5월 7일, 41리터.

매일 아침 체인을 확인한다. 자물쇠는 내가 걸어 둔 각도 그대로다. 뒷문 체인에 붙인 새 테이프도, 그 위의 서명도 그대로다. 그 일주일 동안 뒷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미샤는 발전기실에서 나오지 않는다. 밥 먹을 때만 나와서 말없이 먹고 다시 들어간다.

그 일주일 동안 기지는 이상하게 조용하다. 에릭은 눈썹의 실밥을 매만지며 말이 없고, 쥘리에트는 물병 선반 앞에 쪼그려 앉아 있고, 천위는 노트북만 본다. 이리나는 매일 저녁 내 노트를 받아 숫자를 확인하고 말없이 돌려준다. 다들 기다린다. 자물쇠가 답을 주기를.

5월 7일 밤, 그래프에 마지막 점을 찍는다. 곡선은 꺾이지 않았다. 계속 위로 휜다. 자물쇠를 채운 날짜에 세로줄을 하나 긋는다. 곡선은 그 줄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다.

나는 이리나를 깨운다. 이리나는 침낭 속에서 눈을 뜨고, 내 얼굴을 보고, 노트를 오래 본다.

“자물쇠를 채운 뒤에도.” 내가 말한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갈라진다. “연료가 줄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