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8개월 · 4장
겨울 8개월 · 도해

4장

남극 보스토크 기지, 2032년 4월 1일
연료 잔량 58,070리터 · 첫 비행기까지 207일
약 9분

나는 칠판 한쪽을 빌린다.

이리나의 숫자 세 개 옆, 손바닥 두 개만 한 자리에 이렇게 쓴다.

탱크에서 빠진 양 − 엔진이 먹은 양 = ?

  1. 재는 방법이 틀렸다
  2. 유량계가 틀렸다
  3. 샌다
  4. 날아간다
  5. 다른 데로 간다

그리고 그 아래에 줄을 하나 긋는다. 지울 때 쓸 줄이다.

“만우절이에요.” 에릭이 칠판을 보고 말한다. “보스, 그거 농담이죠?”

“하루 10리터예요. 오늘 아침 기준.”

에릭이 입을 다문다. 3주 전에는 3리터였다. 지난주에는 9리터.

이리나는 칠판을 한참 보더니 내게 일주일을 준다. 하루 네 시간, 그 시간에는 다른 당번을 빼 준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결론이 나면 나한테 먼저.” 이리나가 말한다. “다른 사람 말고.”

무슨 뜻인지 안다. 5번까지 다 지우고 나면 무엇이 남을지 이리나도 이미 계산했다는 뜻이다.


1번. 재는 방법.

온수 탱크는 연료 탱크로 만든 게 아니라서 높이를 부피로 바꾸는 환산표가 없다. 3월에 나는 시추 장치 설계 도면에서 탱크 치수를 가져와 직접 표를 만들었다. 높이 1센티미터가 몇 리터인지. 원통형이니 계산은 간단하다. A와 B는 1센티미터에 약 80리터.

계량 막대는 1밀리미터까지 읽힌다. 1밀리미터면 8리터. 읽는 사람이 눈높이를 조금만 달리해도 그만큼 틀린다. 미샤가 말한 ‘계량 오차’는 여기서 나온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세 번씩 재서 평균을 냈다. 그래도 하루 몇 리터의 오차는 남는다. 하지만 그런 오차는 오르락내리락해야 한다. 3월의 숫자는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았다.

그다음은 온도다.

등유는 데우면 늘고 식히면 준다. 1도에 약 0.1퍼센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3번 탱크에서 영하 55도로 나온 연료가 시추동 안에서 영상 3도까지 데워지면 58도 차이다. 부피가 5.5퍼센트 는다. 1만 리터를 옮기면 550리터가 거저 생긴다. 물론 진짜로 생기는 건 아니다. 같은 연료가 부풀었을 뿐이다. 3월 내내 그 ‘가짜 연료’가 날마다 조금씩 생겼다 줄었다 했다.

나는 탱크마다 온도계를 단다. 위, 가운데, 바닥. 그리고 3월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계산한다. 모든 부피를 15도 기준으로 바꾼다. 연료를 사고팔 때 쓰는 기준이다.

이틀이 걸린다.

하루 차이가 조금 준다. 일부는 온도 때문이었다는 얘기다. 벽에 붙은 A 탱크가 조금씩 식고 있었고, 식은 만큼 연료가 오그라들었다. 하루 1~2리터.

하지만 나머지는 그대로다. 온도를 보정해도 탱크에서는 하루 10리터 넘게, 날마다, 한쪽으로만 빠진다.

나는 1번에 줄을 반만 긋는다.


2번. 유량계.

미샤의 장부는 발전기 유량계에서 나온다. 유량계가 실제보다 적게 읽는다면 엔진은 장부보다 많이 먹은 거고, 그렇다면 탱크 숫자가 맞다.

확인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엔진에 연료를 직접 부어 보면 된다.

미샤가 연료 공급 밸브를 잠그고, 엔진 입구 쪽 호스를 빼서 20리터짜리 계량 통에 꽂는다. 엔진이 통에서 연료를 바로 빨아 먹는다. 나는 시계를 보고, 미샤는 유량계를 본다. 한 시간.

“10.3리터.” 미샤가 유량계를 읽는다.

나는 계량 통 눈금을 읽는다. 통에서 줄어든 양은 10.4리터.

1퍼센트 차이다. 하루로 치면 2~3리터. 유량계가 조금 덜 읽는 건 맞다. 하지만 하루 10리터는 아니다.

미샤가 호스를 다시 꽂으며 나를 보지 않고 말한다.

“그 녀석은 30년 동안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

“알아요. 그래서 재 본 거예요.”

미샤는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2번에도 줄을 반만 긋는다. 반이 두 개면 하나다. 아직 하루 8~9리터가 남는다.


3번. 샌다.

제일 무서운 경우다. 연료가 새면 냄새가 나고, 바닥에 고이고, 불이 붙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한 번 불을 겪었다.

나는 하얀 종이를 한 묶음 들고 연료가 지나가는 모든 곳을 닦는다. 탱크의 이음매, 밸브, 플랜지, 일일 탱크로 연료를 옮기는 이송 펌프, 발전기까지 가는 배관. 등유가 묻으면 종이에 투명한 얼룩이 남는다. 종이 서른 장을 쓴다. 얼룩은 두 군데. 이송 펌프의 축 둘레, 그리고 발전기 앞 필터 하우징. 둘 다 아주 조금 배어 나온다. 미샤가 확인하고 패킹을 조인다. 하루 몇 밀리리터라고 한다. 리터가 아니라 밀리리터.

탱크 밑도 본다. 탱크가 철제 받침대 위에 올라앉아 있어서 손전등으로 바닥면을 볼 수 있다. 바닥에 누워 30분 동안 본다. 이슬 한 방울 없다.

바깥도 본다. 3월에 연료를 들이던 호스 구멍. 벽 밑 눈. 영하 64도에서 눈을 파고 코를 들이댄다. 등유 냄새는 나지 않는다. 아니, 나는데 그건 내 장갑에서 나는 냄새다.

내가 바닥을 기어 다니는 걸 보던 천위가 다가온다. 손에 이산화탄소 측정기를 들고 있다.

“공기도 재요?” 천위가 묻는다.

“등유 냄새를요. 측정기로 돼요?”

“이건 이산화탄소만 재요.” 천위가 측정기 화면을 내게 보여 준다. “그런데 이상한 거 있어요. 탱크 쪽이 조금 높아요. 생활 칸보다.”

화면에 1,900ppm이 떠 있다. 생활 칸은 1,500 안팎, 바깥 공기는 400쯤이다. 여덟 명이 사는 닫힌 건물이라면 이상할 것 없는 숫자다.

“사람이 지나가잖아요.” 내가 말한다. “나도 지금 여기서 30분째 숨 쉬고 있고요.”

“사람 없을 때도 높아요. 새벽에도.” 천위가 말하고는 어깨를 으쓱한다. “조금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탱크 밑을 본다. 천위는 측정기를 들고 생활 칸으로 돌아간다.

나는 3번에 줄을 긋는다. 이번엔 끝까지.

그날 밤 에릭이 차 두 잔을 들고 탱크 구역으로 온다. 나는 아직 탱크 밑에 누워 30분째 같은 이음매를 보고 있다.

“보스, 거기서 자요?”

기어 나오자 에릭이 차 한 잔을 내민다. 우리는 A 탱크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는다. 단열재 덮개가 차갑다.

“그 수첩.” 에릭이 말한다. “민재 마지막 메모요. 비밀이라고 쓴 게 있다고 다니엘이 그러던데요.”

품에서 수첩을 꺼내 마지막 장을 보여 준다. 에릭이 헤드램프로 비춰 읽는다. ‘선배 수첩 커피 쏟을 뻔. 비밀.’ 에릭이 소리 내어 웃다가, 웃음이 이상하게 끊긴다.

“새벽 2시에 커피 마시면서 보스 수첩을 정리하고 있었던 거예요.” 에릭이 말한다. “점검하러 가서. 시킨 것보다 더 하고 있었어요. 걔는 늘 그랬어요.”

“내가 그 시간에 보냈어요.”

“규정이 보냈죠.”

“규정은 내가 썼어요.”

에릭이 차를 한 모금 마신다. 한참 있다가 말한다.

“보스. 그 규정 없었으면 민재는 그날 밤 거기 없었을 수도 있어요. 맞아요. 그런데 그 규정 없었으면 우리는 2012년 러시아 팀처럼 호수를 더럽혔을 거예요. 그런 시추였으면 민재는 애초에 여기 안 왔어요.”

나는 수첩을 덮는다. 면접 날이 떠오른다. 민재가 가방에서 꺼낸 6G 설계안 사본은 쪽마다 밑줄이 그어져 있었고, 여백에는 질문이 빼곡했다. 나는 그 질문에 답하다가 면접 시간을 넘겼다.

차가 식어 간다. 영상 3도에서 차는 금방 식는다.

“그러니까.” 에릭이 일어서며 말한다. “9리터 찾아요. 그게 지금 보스 일이에요.”

에릭이 빈 잔 두 개를 들고 생활 칸으로 돌아간다. 나는 다시 탱크 밑으로 기어 들어가 헤드램프를 켠다. 이음매 하나, 또 하나.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일은 무언가를 찾는 일보다 오래 걸린다. 무언가는 한 번 보면 끝이지만, 아무것도 없다는 건 끝까지 다 봐야 말할 수 있다.


4번. 날아간다.

등유도 증발한다. 휘발유만큼은 아니어도 조금씩. 탱크 위에는 손가락 굵기의 관이 하나씩 달려 있다. 숨구멍이다. 원래는 물을 데울 때 생기는 김을 빼려고 단 관인데, 지금은 탱크 안 공기가 드나드는 길이다. 연료가 빠지면 그 빈자리로 공기가 들어가고, 연료가 들어오면 공기가 나간다.

증발한 등유는 그 숨구멍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얼마나?

계산해 본다. 영상 3도에서 등유의 증기압은 아주 낮다. 0.1킬로파스칼 안팎. 공기 분자 1,000개에 등유 분자가 하나쯤 섞이는 정도다. 탱크 위 빈 공간이 그 정도로 채워진다. 그런데 그 공기는 거의 드나들지 않는다. 탱크 온도가 하루 내내 같으니 숨을 쉴 일이 없다. 연료가 빠지는 만큼 공기가 들어갈 뿐이다. 하루 수백 리터의 공기가 들어가기만 한다. 나가는 공기는 없어야 한다.

나는 숫자를 적는다.

증발 손실: 하루 0.1리터 미만.

혹시 몰라서 장갑을 벗고 A 탱크 숨구멍 끝에 손등을 대 본다. 아주 희미하게 차가운 기운이 스친다. 냄새는 없다. 시추동 안은 히터 송풍구 때문에 늘 공기가 돈다. 손등을 어디에 대도 그 정도 바람은 느껴진다. 나는 장갑을 다시 낀다.

4번에 줄을 긋는다.


5번. 다른 데로 간다.

연료가 엔진으로 가는 길은 하나다. 탱크 A나 B에서 이송 펌프로 일일 탱크에 옮기고, 일일 탱크에서 발전기로 간다. 일일 탱크가 넘치면 넘친 연료는 관을 타고 A로 돌아간다. 다른 길은 없다.

이송 기록을 본다. 일일 탱크에 들어간 양과 A, B에서 빠진 양. 거기서 처음으로 숫자 하나가 눈에 걸린다.

A와 B가 다르게 준다.

이송은 미샤가 정한 대로 하루는 A, 하루는 B에서 번갈아 한다. 그런데 이송한 양을 빼고 남는 ‘사라진 양’을 탱크별로 나눠 보면 A가 B보다 세 배 많다. B는 하루 3리터쯤, A는 9리터쯤. 그리고 A의 숫자는 주마다 커진다.

나는 A 탱크 앞에 선다.

A는 시추동 북쪽 벽에 붙어 있다. 그 벽에 문이 하나 있다. 뒷문. 그 문을 열면 눈 창고로 가는 길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옛 5G 시추동이다. 10년도 더 전에 러시아 팀이 등유 시추를 하던 건물. 지금은 난방도 전기도 없는 창고다.

뒷문은 생활 칸에서 보이지 않는다. 탱크 A의 뒤에 가려 있다.

나는 그 문을 오래 본다.


4월 7일 밤, 나는 이리나와 단둘이 발전기실 옆에 앉는다. 엔진 소리에 묻혀 다른 사람에게는 우리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를 골랐다.

노트를 펴서 보여 준다. 다섯 줄. 모두 줄이 그어진 다섯 줄.

“재는 방법은 일부 맞았어요. 온도 때문에 하루 12리터, 유량계가 23리터. 그건 고쳤어요. 새는 데는 없어요. 증발은 없다시피 해요. 다른 데로 가는 길도 없어요.” 나는 숨을 고른다. “그런데도 하루 10리터 넘게 사라져요. 지금은 13리터예요. 대부분 A에서요.”

이리나는 노트를 보지 않는다. 내 얼굴을 본다.

“하나 빼먹었어요.” 이리나가 말한다.

“뭘요?”

“6번.”

이리나가 내 손에서 펜을 가져가 다섯 줄 아래에 쓴다.

  1. 누가 가져간다

“내가 처음 월동한 해에.” 이리나가 말한다. 이리나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 듣는다. “다른 기지였어요. 보드카가 줄었어요. 매주 조금씩. 다들 서로를 봤어요. 넉 달 동안. 범인을 찾았을 때 그 사람은 우리가 의심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넉 달 동안 우리는 서로를 미워했어요. 그 겨울 끝까지.”

“그래서요?”

“그래서 처음부터 6번을 써 놔야 해요. 안 쓰면 다들 머릿속에 따로 써요. 그게 더 나빠요.”

나는 6번을 본다. 이리나의 글씨는 작고 각져 있다.

5번까지는 숫자로 지웠다. 온도계, 계량 통, 종이, 계산. 6번은 무엇으로 지우지?

“누가 A에 갈 수 있어요?” 이리나가 묻는다.

나는 대답한다. 그게 내 일이니까. 탱크 구역은 잠겨 있지 않다. 우리 모두 하루에 몇 번씩 그 옆을 지나간다. 하지만 밤에 A 앞에 서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 뒷문을 열어도 아무도 묻지 않는 사람, 연료를 옮길 통과 펌프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이리나도 말하지 않는다.

이리나가 펜을 돌려주며 일어선다.

“일주일 더 재요. 숫자가 같으면 그때 얘기해요.”

나는 혼자 남는다. 발전기가 웅웅거린다. 하루 262리터. 거기에 13리터. 다음 주에는 몇 리터일까.

노트를 덮기 전, 다섯 줄 아래 이리나의 6번 옆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 줄도 긋지 않는다.

남은 건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