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8개월 · 3장
겨울 8개월 · 도해

3장

남극 보스토크 기지, 2032년 3월 1일
연료 잔량 64,830리터 · 첫 비행기까지 238일
약 9분

연료를 옮겨야 한다.

3번 탱크는 불탄 펌프동 옆, 시추동에서 300미터 떨어진 눈 속에 있다. 그 안의 등유는 영하 55도다. TS-1은 영하 60도 아래에서야 굳기 시작하니 아직은 흐른다. 꿀처럼 느리게. 지금 시추동 발전기는 자기 일일 탱크로 돈다. 원래 6,800리터였는데 2주 동안 쓰고 나니 3,000리터 남짓이다. 열흘 남짓이면 바닥난다. 그다음부터는 3번 탱크에서 끌어와야 한다.

예전에는 펌프동이 그 일을 했다. 데운 배관으로 탱크에서 발전동까지 연료를 밀어 보냈다. 지금은 300미터를 이을 배관도, 그 배관을 데울 열도 없다. 7월에 영하 80도가 되면 바깥에 늘어놓은 호스 속 등유는 젤리가 된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다. 아직 덜 추울 때, 쓸 수 있는 만큼 전부 안으로 들여놓는다.

문제는 들여놓을 그릇이다. 일일 탱크는 작다. 그때 내 장비가 눈에 들어온다. 온수 시추 장치의 단열 탱크 두 개, A와 B. 각각 2만 5천 리터. 얼음을 녹일 뜨거운 물을 담아 두던 탱크다. 15센티미터 두께의 단열재를 둘렀고, 시추동 안에 있다. 시추는 끝났다. 탱크는 비었다.

“온수 탱크에 연료를 넣자고요?” 에릭이 묻는다. “보스 탱크에?”

“이제 우리 탱크예요.”


3월 2일부터 우리는 연료를 나른다.

기지에 남은 설상차는 한 대다. 무한궤도를 단 붉은 차로, 여름이면 짐 썰매를 끌고 활주로를 다지던 녀석이다. 뒤에 5,000리터짜리 연료 썰매를 매단다. 3번 탱크에서 썰매로 퍼 담고, 300미터를 기어 와서, 시추동 벽에 뚫은 구멍으로 호스를 넣어 탱크에 붓는다. 한 번 왕복하는 데 네 시간. 대부분은 펌프가 차가운 등유를 빨아올리는 시간이다.

설상차는 미샤가 맡는다. 매일 아침 엔진 밑에 버너를 피워 한 시간 동안 데운다. 영하 50도에서는 엔진 오일이 타르처럼 굳기 때문이다. 시동이 걸리면 미샤는 운전석에서 엔진에게 러시아어로 무어라 중얼거린다. 무슨 말이냐고 에릭이 묻자 미샤가 대답한다.

“착하다고. 조금만 더 하자고.”

“그게 통해요?”

“아직은 통해.”

통하지 않는 날도 있다. 3월 7일, 네 번째 왕복에서 호스가 언다. 썰매 탱크에서 시추동 벽 구멍까지 15미터. 그 15미터가 영하 58도의 공기에 드러나 있는 동안 호스 속 등유가 바깥쪽부터 굳어 간다. 펌프가 헛돈다. 소리가 높아진다.

에릭과 나는 호스를 따라 무릎을 꿇고, 열풍기로 1미터씩 녹이며 나아간다. 열풍기는 전깃줄 하나로 시추동에 이어져 있어서 그 줄이 닿는 데까지만 갈 수 있다. 줄이 팽팽해지면 미샤가 썰매를 몇 미터 당긴다. 그렇게 한 시간.

“민재는 이런 거 좋아했어요.” 에릭이 열풍기를 호스 위로 천천히 옮기며 말한다. 마스크 너머로 목소리가 웅얼거린다. “고장 난 거 고치는 거. 12월에 윈치 브레이크 나갔을 때 기억나요? 밤새 혼자 붙어 있었잖아요. 아침에 가 보니까 다 고쳐 놓고 그 옆에서 자고 있었어요.”

“기억나요.”

“보스가 깨워서 혼냈잖아요. 혼자 작업하지 말라고. 규정 몇 조라고.”

“7조 2항.”

에릭이 짧게 웃는다. “그거요. 민재가 벌떡 일어나서 경례했잖아요. 눈도 못 뜨고.”

기억난다. 기름 묻은 손날을 이마에 붙이던 얼굴. 네, 선배. 7조 2항. 다음엔 둘이 할게요. 그리고 정말로 다음 고장 때는 새벽 3시에 에릭을 깨웠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호스 안에서 무언가가 풀리는 소리가 난다. 굳었던 등유가 녹아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펌프 소리가 낮아진다.

“됐다.” 에릭이 말한다.

나는 탱크 쪽을 맡는다. 연료를 받기 전에 탱크부터 비워야 한다. 온수 탱크 바닥에는 늘 물이 조금 남는다. 배출구가 바닥보다 몇 센티미터 위에 달려 있어서다. 물을 조금 남겨야 바닥의 침전물이 배출구로 딸려 나가지 않는다. 시추할 때는 그게 장점이었다. 나는 탱크 맨홀로 머리를 넣어 손전등으로 바닥을 본다. A 탱크 바닥에 남은 물은 30리터쯤, B 탱크는 20리터쯤이다. 펌프로는 더 못 뺀다. 걸레로 훔쳐 낼 수도 없다. 깊이가 3미터다.

“괜찮아.” 미샤가 말한다. “연료 탱크는 원래 바닥에 물이 있어. 결로가 생기니까. 물은 무거워서 밑에 깔려. 연료는 위에서 뽑으면 돼.”

그 말도 맞다. 나는 노트에 적는다. A 바닥 물 약 30리터, B 약 20리터. 제거 불가. 그리고 다음 줄로 넘어간다.


3월 4일, 장례를 치른다.

넷의 시신은 화재 다음 날부터 시추동 뒤 눈 창고에 있었다. 눈을 파서 만든 도랑에 판자 지붕을 덮은 곳으로, 안은 늘 영하 50도 아래다. 봄, 그러니까 남극의 봄인 11월에 비행기가 오면 넷은 집으로 간다. 그때까지는 여기서 우리와 겨울을 난다.

이리나가 짧게 말한다. 표트르가 처음 이 기지에 온 해, 그가 고친 발전기의 수, 그가 기지를 ‘그녀’라고 불렀다는 것. 니콜라이가 배선도를 머릿속에 다 넣고 다녔다는 것. 쥘리에트가 프랑스어로 무언가를 읽는다. 시인지 기도인지 모르겠다. 읽다가 멈추고, 한참 있다가 다시 읽는다.

내 차례가 오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대신 민재의 이름을 한 번 부른다. 영하 57도의 공기 속에서 내 목소리는 이상하게 작다. 화재 때처럼.

알료샤가 빵을 구워 왔다. 하나씩 나눠 들고 반은 먹고, 반은 도랑 앞 눈 위에 놓는다. 러시아 풍습이라고 한다. 빵은 1분 만에 돌처럼 언다.

장례가 끝나고 다니엘이 내게 무언가를 건넨다. 탄 자국이 있는 작은 수첩이다. 내 시추 기록 수첩.

“민재 씨 파카 안주머니에 있었어요.” 다니엘이 말한다. “소이 씨 거라고 들었어요.”

수첩을 받는다. 표지가 반쯤 녹았지만 속은 멀쩡하다. 마지막 장을 편다. 민재의 글씨다. 내 글씨보다 반듯하다.

02:05 보관 장치 −3.0℃, 원통 압력 0(분주 중). 베르나르 박사님 용기 4번 작업 중. 용기 2번에 작은 기포. 압력 뺄 때 녹아 있던 기체가 나오는 듯. 천위 씨한테 물어볼 것. 선배 수첩 커피 쏟을 뻔. 비밀.

나는 그 마지막 줄을 오래 본다. 그리고 수첩을 덮는다.


그날 저녁, 나는 천위에게 민재의 메모를 보여 준다. 천위는 한 번 읽고 고개를 끄덕인다.

“호수 물에는 기체가 많이 녹아 있을 거라고 했어요.” 천위에게는 긴 말이다. “얼음이 녹아 호수로 들어올 때, 얼음 속 공기도 같이 들어와요. 1,500만 년 동안. 빠져나갈 데가 없어요. 압력을 빼면 나와요. 탄산수처럼.”

“무슨 기체요?”

“재 보려고 했어요.” 천위가 벽 쪽에 놓인 회색 상자를 본다. 가스 크로마토그래프. “운반 기체가 없어요. 헬륨 실린더가 실험동에 있었어요.”

가스 크로마토그래프는 섞인 기체를 가는 관에 흘려 보내 종류별로 나눈다. 그 기체를 밀어 주는 게 운반 기체다. 운반 기체가 없으면 이 기계는 비싼 상자일 뿐이다.

“이제 잴 것도 없잖아요.” 천위가 무덤덤하게 말하고 다시 노트북을 본다.


장례 다음 날, 3월 5일부터 섬프를 깬다.

섬프 얼음을 깨서 드럼에 담는 데 하루 반이 걸린다. 미샤와 에릭이 곡괭이를 든다. 얼음 덩어리는 층이 진 그대로 깨진다. 투명한 얼음, 하얀 분말이 섞인 얼음, 그리고 호박색의 끈적한 등유. 드럼 스물네 개를 채워 썰매로 시추동에 들이고, 발전기실 옆 엔진 열기가 가장 많이 새어 나오는 자리에 늘어놓는다.

엔진 옆에서 하룻밤이 지나자 드럼 속이 녹는다. 층이 나뉜다. 맨 위는 맑은 호박색 등유. 그 아래 탁한 회색 띠. 맨 아래는 분말이 가라앉은 우윳빛 물.

쥘리에트가 무균 장갑을 끼고 드럼마다 아래쪽 꼭지로 물을 받는다. 멸균한 유리병 스무 개에 나눠 담고 라벨을 붙인다. 날짜, 드럼 번호, 층. 손이 아주 차분하다. 베르나르가 가르친 손일 거다.

일곱 번째 드럼을 비우던 쥘리에트가 손을 멈춘다.

드럼 바닥 침전물 속에 작은 플라스틱 용기가 있다. 뚜껑이 반쯤 깨졌다. 비어 있다. 옆면에 매직으로 쓴 숫자가 보인다.

쥘리에트가 그걸 집어 든다. 오래 보다가 멸균 봉투에 넣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노트를 펴서 첫 장 아래에 적는다.

3월 7일. 6번 용기 발견. 펌프동 섬프 침전물(7번 드럼). 뚜껑 파손, 내용물 없음. 섬프 물과 섞인 것으로 판단.

규정 14조 1항. 이걸로 손실 조사는 끝이다. 시료 여섯 개, 전부 손실. 기록 완료.

연료는 위에서 떠낸다. 드럼 스물네 개에서 1,900리터가 나온다. 나머지는 물과 분말과 얼음 조각이다. 미샤가 천을 세 겹 댄 깔때기로 거른다. 거른 연료는 아주 조금 뿌옇다. 그 정도면 괜찮다고 미샤는 말한다. 나머지는 발전기 필터가 걸러 줄 거라고.

3월 8일, 나는 노트의 넷째 줄대로 한다. 회수한 연료 1,900리터를 A 탱크에 붓는다. 3번 탱크에서 옮겨 온 연료가 이미 1만 리터 넘게 들어 있다. 섬프 연료는 그 위로 섞여 든다.

나는 호스를 감고, 탱크 맨홀을 잠그고, 노트에 ‘+1,900L (A)‘라고 적고, 저녁을 먹으러 간다.


3월 13일, 설상차가 죽는다.

그날 아침 기온은 영하 61도다. 미샤가 한 시간 반 동안 엔진을 데운다. 시동이 걸린다. 설상차가 3번 탱크 쪽으로 백 미터쯤 기어가다가 멈춘다. 미샤가 내려서 차체 밑을 보고, 돌아와서 고개를 젓는다.

“유압 호스. 터졌어. 고무가 유리가 됐어.”

예비 호스는 있다. 하지만 갈려면 장갑을 벗어야 하고, 영하 61도에서 맨손으로 금속을 만지면 피부가 들러붙는다. 미샤는 그래도 하겠다고 하고, 이리나는 안 된다고 한다. 둘이 러시아어로 짧게 다툰다. 이리나가 이긴다.

“남은 거.” 이리나가 말한다.

미샤가 3번 탱크를 잰다. 11,000리터. 나머지는 실내 탱크 A와 B, 일일 탱크에 다 들어왔다.

“11,000리터는 바깥에 둬요.” 이리나가 칠판에 적는다. “필요하면 손펌프랑 통으로 퍼 와요. 걸어서.”

그 숫자를 노트에 옮기며 생각한다. 바깥에 남은 1만 1천 리터는 영하 55도에서 겨울을 난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연료. 나쁘지 않다. 예비는 손이 안 닿는 데 있어야 예비다.


3월은 그렇게 지나간다.

우리는 겨울 살림을 꾸린다. 눈 녹이는 장치를 발전기 냉각수 배관에 이어 하루 200리터씩 물을 만든다. 마시고, 씻고, 요리한다. 샤워는 일주일에 한 번, 3분. 다니엘은 매일 아침 모두의 산소포화도와 체중을 잰다. 해발 3,488미터에서는 숨만 쉬어도 살이 빠진다. 알료샤는 식단표를 짜고, 날마다 누구 생일인 것처럼 디저트를 하나씩 만든다. 천위는 살아남은 이산화탄소 측정기 하나로 시추동 공기를 잰다. 이리나는 하루 세 번 바깥에 나가 기온과 기압과 풍속을 잰다. 관측 풍선은 띄우지 않는다. 그럴 여유가 없다. 그래도 기록은 남긴다. 70년 넘게 거의 끊긴 적이 없는 기록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와 미샤는 연료를 잰다.

재는 방식이 다르다. 미샤는 발전기 유량계를 본다. 엔진이 하루에 먹은 양을 계기판에서 읽어 장부에 적는다. 30년 동안 그렇게 해 왔다. 나는 탱크를 잰다. 매일 아침 8시, 탱크 A와 B와 일일 탱크에 계량 막대를 넣고 높이를 읽어 부피로 바꾼다.

두 숫자는 같아야 한다. 탱크에서 빠진 양 = 엔진이 먹은 양.

3월 31일 밤, 나는 3주치 숫자를 나란히 놓는다.

같지 않다.

탱크에서 빠진 양이 엔진이 먹은 양보다 많다. 하루 몇 리터씩. 처음엔 3리터, 그다음엔 5리터, 이번 주에는 9리터. 3주를 합치면 120리터 남짓.

나는 미샤에게 노트를 보여 준다. 발전기 옆 의자에 앉아 손난로를 쥐고 있던 미샤가 숫자를 훑어본다.

“계량 오차.” 미샤가 말한다. “막대로 재면 원래 그래. 몇 밀리미터만 틀려도 탱크가 크니까 몇 리터씩 틀려.”

“오차는 제멋대로예요.” 내가 말한다. “많게 나오는 날도 있고 적게 나오는 날도 있어야 해요. 이건 한쪽으로만 가요. 매일. 그리고 커지고 있어요.”

미샤가 나를 본다. 무슨 뜻인지 모를 눈빛이다. 피곤해서 그렇겠거니 한다.

“그래서, 뭐.”

“그래서 찾아야 해요.”

“뭘?”

나는 노트를 덮는다.

“9리터가 어디로 가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