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나는 칠판 앞에서 분필을 쥐고 있다.
시추동 한쪽 벽에 걸린 이 칠판은 원래 내 것이다. 시추 깊이, 케이블 장력, 온수 온도를 적던 칠판. 어젯밤까지 거기에는 ‘3,769m — 인양 완료’라고 쓰여 있었다. 이리나가 그걸 지우고 숫자 세 개를 적었다.
8 68,400 251
“오늘 할 일.” 이리나가 말한다. “이 숫자 셋이 서로 맞는지 봐요. 끝.”
시추동은 원래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다. 길이 40미터, 폭 15미터, 높이 10미터의 철골 건물이고, 한가운데에 6G 시추공의 머리가 있다. 한쪽 끝에는 발전기실, 다른 쪽 끝에는 온수 시추 장치가 있다. 얼음을 녹여 뚫는 데 쓰던 보일러와, 데운 물을 담아 두던 커다란 단열 탱크 두 개. 우리는 그 사이에 산다. 아침부터 거주동에서 침낭과 매트리스, 식량 상자를 썰매로 날라 왔고, 시추 장비 사이에 방수포를 쳐서 칸을 나눴다. 잠자는 칸, 부엌 칸, 다니엘의 진료 칸.
거주동은 버렸다. 거주동은 발전동에서 데운 부동액을 배관으로 돌려 난방했다. 발전동이 없으니 오늘 밤부터 바깥과 같은 온도가 된다. 미샤와 에릭이 오전 내내 배관의 부동액을 빼냈다. 안 그러면 배관이 얼어 터진다. 봄에 누가 다시 쓸지는 모르지만, 터진 배관은 아무도 못 쓴다.
“전기부터.” 이리나가 말한다. “미샤.”
미샤가 일어난다. 어제보다 얼굴이 낫다. 그을음은 씻었다. 눈만 아직 붉다.
“이 녀석.” 미샤가 발전기실 쪽으로 턱을 든다. “60킬로와트. 시추할 때는 윈치랑 보일러 때문에 거의 끝까지 돌렸어. 지금은 그럴 일 없지.”
시추동 발전기는 원래 시추에만 쓰려고 들여놓은 기계다. 이제 이 기계 하나가 여덟 사람의 전기와 난방을 모두 맡는다. 엔진의 폐열을 냉각수 배관으로 돌려 건물을 데운다. 연료가 전기로 바뀌는 건 3분의 1뿐이고 나머지 3분의 2는 열이 된다. 평소라면 버리는 열이지만, 여기서는 그게 우리 난로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발전기 계기판 옆에 붙어 있었다. 시추가 없는 시추 책임자에게 남은 일은 계산뿐이다.
“평균 전기 부하 32킬로와트.” 내가 말한다. “조명, 환기, 눈 녹이는 장치, 통신, 부엌, 진료 장비를 다 켰을 때요. 발전기 효율이 32퍼센트쯤이니까 연료로는 100킬로와트를 태우는 셈이에요.”
칠판 옆에 계산을 쓴다.
100kW × 24시간 = 2,400kWh = 8,640MJ TS-1 1리터 = 34.5MJ 8,640 ÷ 34.5 = 250리터/일
“한겨울에 바깥이 영하 80도가 되면 폐열만으로는 모자라요. 보조 난로를 돌려야 해요. 평균 하루 12리터로 잡았어요.”
250 + 12 = 262리터/일 262 × 251일 = 65,762리터 68,400 − 65,762 = 2,638리터
“남는 건 2,638리터예요. 열흘치요.”
아무도 말이 없다. 알료샤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센다. 열흘을 세는 것 같다.
“아슬아슬하네.” 에릭이 말한다.
“아슬아슬하지만 돼요.” 내가 말한다. “계산이 맞으면요.”
“맞아?” 미샤가 묻는다.
“전기 부하는 오늘 하루 잰 값이에요. 추워지면 늘어요. 그건 보조 난로 항목에 넣었어요. 한 달 뒤에 다시 재서 고칠게요.”
미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천장을 보면서 말한다.
“1982년에는 2만 리터로 버텼대.”
“그때는 발전기도 작았고 사람도 스무 명이었고, 거주동 하나만 데웠어요. 양초로 불을 켰고요.”
“그러니까 우리도 양초 만들면 되잖아.”
몇 사람이 웃는다. 어제 이후 처음 듣는 웃음이다. 미샤는 웃지 않는다. 농담이 아니었나 보다.
오후에 이리나가 위성 전화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남극 탐사대 본부와 통화한다. 스피커로 돌려 놓아서 우리 모두 듣는다. 통화는 두 시간 걸리고, 그사이 위성 신호가 세 번 끊긴다.
선택지는 셋이다.
첫째, 비행기. 남극의 겨울에도 비행기가 내린 적은 있다. 2001년 4월, 남극점 기지에서 대원 한 명이 위독해지자 캐나다에서 작은 프로펠러기 두 대가 내려왔다. 트윈 오터. 영하 69도에서 착륙한, 역사에 남은 비행이다. 준비하고 날아오는 데 2주가 넘게 걸렸고, 조종사들은 목숨을 걸었다.
“부상자가 있습니까?” 본부의 목소리가 묻는다. 지지직거리는 러시아어다. 이리나가 우리를 위해 영어로 옮긴다.
다니엘이 대답한다. 화상 둘, 둘 다 가볍다. 미샤의 손등, 에릭의 귀. 연기를 마신 사람이 셋 있지만 산소포화도는 회복됐다.
“그렇다면 의료 후송 기준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이리나가 묻는다. 의료 후송이 아니라 인원을 줄이는 비행이라면?
이리나가 나를 본다. 미리 계산해 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칠판에 숫자 하나를 쓴다.
8명 → 4명: 연료 약 5% 절약
“건물을 데우는 연료는 사람 수와 상관없어요.” 내가 말한다. “여덟 명이 살든 넷이 살든 이 건물은 영상 15도여야 하고, 발전기는 돌아야 해요. 사람 몫은 부엌이랑 온수 정도예요. 넷을 내보내면 열사흘쯤 더 버티지만, 그러려면 비행기 두 대와 조종사 네 명이 영하 50도에서 목숨을 걸어야 해요.”
본부의 목소리가 잠시 끊긴다. 신호 때문이 아니다.
둘째, 공중 투하. 1999년 7월, 미 공군 수송기가 한겨울 어둠 속에서 남극점에 의약품을 떨어뜨린 적이 있다. 연료도 드럼에 담아 낙하산에 매달면 떨어뜨릴 수 있다. 하지만 수송기를 띄우려면 나라 사이에 협의를 해야 하고,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날아오는 비행을 계획하는 데만 몇 달이 걸린다.
“계획은 세우겠습니다. 비상용으로.” 본부가 말한다. “확약은 못 합니다.”
셋째, 육로. 가장 가까운 겨울 상주 기지는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함께 운영하는 콩코르디아로, 56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여름이면 설상차로 열흘 걸리는 길이다. 겨울에는 영하 60도 아래에서 설상차가 움직이지 않는다. 콩코르디아라는 말에 쥘리에트가 고개를 든다. 베르나르가 거기서 두 번 겨울을 났다고 한다.
결론은 통화 마지막 5분에 나온다. 월동한다. 연료가 계산대로 버티는 한, 누구도 비행기를 부르지 않는다. 첫 비행기는 10월 25일. 보스토크 기온이 영하 55도 위로 올라오는 무렵이다. 트윈 오터 두 대가 맥머도에서 출발해 콩코르디아에서 연료를 넣고 온다. 보스토크의 연료는 한 방울도 필요 없다.
이리나가 전화를 끊고 칠판 앞에 선다. ‘251’에 동그라미를 친다.
“정해졌어요.” 이리나가 말한다. “이제 이 숫자는 안 바뀌어요.”
해가 낮게 기운 오후, 미샤와 나는 탱크장에 간다.
펌프동은 검은 뼈대만 남았다. 지붕은 내려앉았고, 철골은 열에 휘어 이상한 각도로 서 있다. 눈 속에 반쯤 묻힌 탱크 세 개는 멀쩡해 보인다. 1번과 2번이 비었다는 걸 모르는 눈에는.
미샤가 3번 탱크 위로 올라가 계량 막대를 넣는다. 꺼낸 막대에 묻은 등유 위로 금세 하얀 성에가 낀다. 미샤가 눈금을 읽는다.
“61,600. 어제랑 같아.”
그럼 됐다. 나는 장갑 낀 손으로 3번 탱크의 차가운 철판을 두드린다. 표트르가 잠근 밸브가 이 안쪽에 있다.
우리는 쏟아진 연료를 보러 간다.
어젯밤 투광등 아래 검은 줄기가 흐르던 곳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하얀 눈뿐이다. 하지만 등유 냄새가 영하 48도에서도 코를 찌른다. 미샤가 삽으로 눈을 파 내려간다. 30센티미터. 눈이 누렇다. 60센티미터. 더 누렇다. 1미터를 파도 끝이 없다.
“눈 속으로 내려갔어.” 미샤가 숨을 몰아쉬며 말한다.
보스토크의 눈은 표면만 단단하고, 그 아래로 수십 미터까지는 구멍이 숭숭 뚫린 스펀지 같다. 눈이 얼음이 되기 전 단계로, 피른이라고 부른다. 등유 14만 리터가 그 스펀지 속으로 스며들었다. 위에서는 흔적도 없지만 밑에서는 넓고 깊게, 옅게 퍼져 있을 거다. 한겨울이 되면 그 등유는 젤리처럼 굳어 눈 속에 박힌다.
“꺼낼 수 있을까요?” 내가 묻는다.
“여름이면.” 미샤가 삽을 눈에 꽂는다. “굴착기로 파서 녹여서 물이랑 나누면. 몇천 리터는 건지겠지. 지금은 안 돼. 굴착기도 없고, 녹일 데도 없어. 그리고 금방 추워져.”
나는 파낸 구덩이를 내려다본다. 누런 눈. 우리의 겨울이 녹아 있는 눈.
그날 저녁 미샤가 다른 연료 이야기를 꺼낸다.
“섬프에 있는 거.” 미샤가 칠판 앞에 선다. “펌프동 바닥 집수조. 거기 연료가 얼어 있어. 대충 쟀는데 연료만 2,000리터 가까이 돼. 물이랑 얼음이랑 소화 분말이랑 섞여서.”
칠판의 ‘2,638’을 다들 본다. 2,000리터면 그 숫자가 거의 두 배가 된다.
“녹여서 위에 뜬 연료만 떠내면 돼.” 미샤가 말한다. “물보다 가벼우니까. 거르고. 그러면 끝.”
“그 안에 시료가 있을지도 몰라요.” 내가 말한다.
모두가 나를 본다. 나는 어제 쓴 노트를 펴서 읽는다.
“시료 용기 여섯 개 중 다섯 개가 실험동 바닥에서 깨진 채 나왔어요. 여섯 번째는 못 찾았어요. 실험동 바닥은 배수구 쪽으로 기울어 있고, 그 배수관은 펌프동 섬프로 가요. 시료가 섬프에 들어갔을 수 있어요.”
“그래서?” 미샤가 묻는다. “물 몇 숟갈이잖아.”
맞는 말이다. 2리터를 여섯으로 나눴으니 용기 하나에 300밀리리터 남짓. 그게 섬프 바닥의 물 수백 리터에 섞였다면 거의 남지도 않았을 거다.
그런데 나는 손을 내리지 못한다.
“오염 통제 규정에는 호수 시료가 다른 것과 섞였을 때 어떻게 다룰지가 나와 있어요.” 내가 말한다. “격리하고, 기록하고, 승인 없이 옮기지 않는다. 그런데 섞인 게 연료일 때는…….”
말이 끊긴다. 나는 47쪽짜리 규정을 머릿속으로 넘겨 본다. 시추액. 시추용 물. 장비 표면. 사람의 피부와 숨. 연료는 없다. 6G는 등유를 쓰지 않는 시추공이니까. 연료는 발전동 일이었고, 발전동은 시추 구역 밖이었다. 규정을 쓴 사람들은 호수의 물이 우리 연료 속으로 들어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나도 그중 하나다.
“규정에는 연료에 관한 조항이 없어요.” 내가 말한다.
“그럼 문제없네.” 에릭이 농담처럼 말한다. 눈은 웃지 않는다.
쥘리에트가 손을 든다. 어젯밤부터 거의 말이 없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다.
“그 물, 저한테 주세요. 연료 말고 물이요. 섬프 바닥의 물이랑 얼음. 제가 따로 담아서 보관할게요.” 쥘리에트가 잠시 숨을 고른다. “베르나르가 그걸 꺼내다가……. 그러니까,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요.”
이리나가 나를 본다. 그리고 미샤를 본다. 그리고 칠판을 본다.
“녹이세요.” 이리나가 말한다. “연료는 떠내서 거르고, 물은 쥘리에트에게. 소이가 절차를 정하세요. 규정이 없으면 만들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날 밤 노트에 세 줄짜리 절차를 쓴다. 녹일 것. 층이 나뉠 때까지 기다릴 것. 연료는 위에서, 물은 아래에서 따로 뽑을 것. 넷째 줄은 쓰려다 만다. 그 연료를 어디에 넣을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사흘이 지난다.
2월 20일 밤, 처음으로 해가 진다. 석 달 만에 보는 어둠이다. 해는 남쪽 지평선 아래로 한 시간도 안 되게 잠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다. 그래도 그동안 하늘에 별이 뜬다. 나는 시추동 문 앞에 서서 그걸 본다. 영하 52도. 숨을 쉴 때마다 콧속이 언다.
에릭이 옆에 와서 선다.
“민재 생각해요?” 그가 묻는다.
“규정 생각해요.”
“그게 그거죠, 보스.”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새벽 2시 점검. 규정 11조 2항. 내가 정한 순번. 규정은 피로 쓴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규정이 피를 흘리게 했다.
에릭이 별을 보다가 말한다.
“표트르가 그랬잖아요. 여기서 적은 불 하나뿐이라고. 불은 끝났어요. 이제 남은 건 산수예요. 보스 전공이잖아.”
나는 웃으려고 한다. 잘 안 된다.
시추동 안에서 발전기가 일정하게 웅웅거린다. 그 소리가 벽을 타고 발바닥으로 올라온다. 하루 262리터. 1분에 182밀리리터. 엔진이 한 번 돌 때마다 우리의 겨울이 한 숟갈씩 줄어든다. 저 소리가 멈추면 우리는 사흘 안에 죽는다.
나는 그 소리를 심장 소리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일정하면 살아 있는 거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노트를 펴서 넷째 줄을 쓴다.
- 회수한 연료는 시추동 온수 탱크에 넣는다. (다른 용기 없음.)
괄호 안의 말은 변명이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지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