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8개월 · 1장
겨울 8개월 · 도해

1장

남극 보스토크 기지, 2032년 2월 16일
연료 잔량 211,200리터 · 첫 비행기까지 252일
약 15분

윈치 계기판의 숫자가 줄어든다.

3,412미터. 3,411미터. 3,410미터.

케이블은 초당 0.8미터로 올라온다. 머릿속으로 나눗셈을 한다. 남은 시간 71분. 아까도 했고 그 전에도 했다. 답은 그대로다. 달라질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2분마다 다시 나눈다. 시추를 18년 했어도 이 버릇은 고쳐지지 않는다.

“선배, 또 계산하죠.” 강민재가 윈치 콘솔에서 고개도 안 돌리고 말한다. “71분이에요. 아까도 71분이었고요.”

“71분 2초야.”

“그건 반올림하면 71분이에요.”

“그러니까 반올림을 하지 말라고.”

시추동 안은 영상 12도다. 바깥은 영하 46도. 남극의 여름이 끝나 가는 2월 중순치고는 따뜻한 편이다. 앞으로 다섯 달 동안 기온은 내려가기만 하고, 7월이면 영하 80도 아래로 떨어지는 밤이 온다. 그래도 지금 이 건물 안에서 추위를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다들 계기판의 숫자만 본다.

케이블 끝에는 길이 1미터, 지름 12센티미터의 티타늄 원통이 매달려 있다. 2리터짜리 압력 용기다. 그 안에 든 건 물이다. 그냥 물이 아니다. 우리 발밑 3,769미터 아래, 얼음 천장 밑에 숨어 있는 호수의 물이다.

보스토크 호수. 길이 250킬로미터, 가장 깊은 곳은 800미터쯤 된다. 온타리오호만 한 물이 남극 대륙 한가운데, 4킬로미터 가까운 얼음 밑에 갇혀 있다. 얼음이 내리누르는 압력 때문에 영하 3도에서도 얼지 않는다. 지표와 마지막으로 이어졌던 게 1,500만 년 전이다.

나는 그 물에 닿는 구멍을 뚫으러 여기 왔다.


내 이름은 한소이다. 한국 극지연구소의 빙하 시추 엔지니어이고, 국제 공동 보스토크 시추팀의 시추 책임자다. 우리는 이 시추공을 ‘6G’라고 부른다. 보스토크에서 뚫은 여섯 번째 깊은 구멍이고, 나는 그 설계도의 4분의 1을 그렸다.

2012년, 러시아 팀이 처음으로 이 호수에 닿았다. 그들은 얼음을 깎는 동안 구멍이 다시 얼어붙지 않게 등유를 채워 넣었다. 그런데 구멍이 호수에 닿는 순간 호수 물이 시추공을 타고 솟구쳐 올라와 위에서 기다리던 등유와 섞인 채 얼어 버렸다. 과학자들은 그 얼음을 다시 뚫어 시료를 얻었다. 문제는 거기서 나온 미생물이 호수 것인지, 등유에 묻어 지표에서 들어간 것인지 끝내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는 거다.

그래서 6G는 등유를 쓰지 않는다. 뜨거운 물로 얼음을 녹여 내려가는 열수 시추다. 시추에 쓰는 물은 두 번 거르고, 자외선을 쬐고, 끓인다. 기압이 낮은 이곳에서 물은 87도쯤에서 끓는다. 시료 채취기는 출발하기 전에 과산화수소 증기로 소독한다. 오염 통제 규정은 47쪽짜리 문서다. 나는 조항 번호까지 외운다.

다들 그걸 좀 피곤해한다. 나도 안다.


“3,000미터 통과.” 민재가 말한다.

시추동 문이 열리고 냉기가 하얀 김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김 속에서 기지 대장 표트르 바실리예프가 나타난다. 예순한 살이고, 이번이 열한 번째 겨울이다. 수염에 붙은 성에를 장갑 낀 손으로 털어 내며 말한다.

“그녀가 오늘은 기분이 좋습니다. 바람이 없습니다.”

표트르는 기지를 ‘그녀’라고 부른다. 러시아어로 기지가 여성 명사라서 그런 건지, 30년 가까이 같이 산 사이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아마 둘 다일 거다.

그 뒤를 따라 미하일 오를로프가 들어온다. 다들 미샤라고 부른다. 발전 정비사이고 기지의 연료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덩치는 곰만 하고 목소리는 그보다 크다.

“윈치가 전기를 너무 먹어.” 미샤가 내게 말한다. 인사 대신이다. “이 녀석이 돌면 발전동 2호기가 땀을 흘려.”

“오늘만이에요, 미샤.”

“작년에도 오늘만이라고 했어.”

“작년에는 호수에 안 닿았잖아요.”

미샤가 어깨를 으쓱한다. 그러고는 윈치 옆 의자에 털썩 앉아 계기판을 같이 본다. 불평은 불평이고, 그도 보고 싶은 거다.

실험 구역 쪽 비닐 가림막 너머에는 하얀 무균복을 입은 두 사람이 서 있다. 베르나르 코스트와 쥘리에트 바로. 프랑스에서 온 미생물학자들이다. 베르나르는 쉰여섯이고, 쥘리에트는 그의 박사후연구원이다. 쥘리에트는 오늘 아침부터 한자리에 30초 이상 서 있지 못했다. 지금도 가림막 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그림자가 보인다.

벽 쪽 탁자에는 중국에서 온 빙하 기체 화학자 천위가 노트북을 펴 놓고 앉아 있다. 발치에는 여행 가방만 한 회색 상자가 놓여 있다. 휴대용 가스 크로마토그래프다. 호수 물에 녹아 있는 기체를 재려고 베이징에서부터 무릎에 안고 왔다고 한다. 천위는 하루에 열 문장 정도 말한다. 오늘은 아직 한 문장도 쓰지 않았다.

케이블 장력계 앞에는 에릭 손더스가 있다. 미국인이고 내 팀의 시추 기술자다. 장력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그가 말한다.

“장력 정상. 보스, 이거 올라오면 우리 뭐 해요? 파티해요?”

“규정 9조 1항. 시료 인양 후 실험동 이송까지 6G 구역 인원은 위치를 유지한다.”

“파티는 그다음이네요.” 에릭이 웃는다.


케이블이 마지막 100미터를 남기자 시추동 안에서 입을 여는 사람이 없다. 윈치 모터가 웅웅거리는 소리, 히터 송풍구가 덜컹거리는 소리,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만 들린다.

그리고 구멍 위로 원통이 올라온다.

티타늄 표면은 순식간에 서리로 하얗게 덮인다. 영하 3도의 물을 안고 3.7킬로미터를 올라온 금속이 영상 12도의 습한 공기를 만나 숨을 내쉬는 것 같다. 민재가 윈치를 멈추고, 에릭과 내가 원통을 거치대로 옮긴다. 장갑 너머로도 무겁다. 18킬로그램.

나는 원통 윗부분의 압력계부터 본다.

338기압.

호수 바닥 근처에서 잠근 압력이 그대로 살아 있다. 밸브 하나 새지 않았다는 뜻이다. 안에 든 물은 지금도 자기가 3,769미터 아래 있다고 믿고 있다.

나는 숨을 내쉰다. 그제야 내가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안다.

“압력 유지 확인. 338기압. 봉인 정상.” 내가 말한다. 민재가 기록지에 받아 적는다. 시각, 압력, 온도, 서명. 규정 9조 4항.

가림막이 열리고 쥘리에트가 뛰어나온다. 무균복 마스크 위로 눈만 보이는데, 젖어 있다.

“1,500만 년이에요.” 쥘리에트가 원통에 손을 대지도 못하고 말한다. “1,500만 년 된 물이 지금 여기 있어요.”

“1,500만 년 된 물이 아니라 1,500만 년 갇힌 호수예요.”

내 입이 먼저 나간다. 쥘리에트가 나를 본다.

“호수가 지표와 끊긴 게 1,500만 년 전이에요.” 나는 그냥 끝까지 말한다. 이미 시작했으니까. “물은 계속 바뀌어요. 얼음 천장이 한쪽에서 녹고 다른 쪽에서 얼면서요. 지금 이 물이 호수에 들어온 건 길어야 몇만 년 전이에요.”

잠깐 조용하다. 에릭이 천장을 본다. 민재가 기록지에 고개를 박는다. 나는 내가 또 그랬다는 걸 안다.

베르나르가 웃음을 터뜨린다. 무균복 마스크 너머에서 들리는 웃음이 축축하다.

“좋아요, 좋아. 숫자는 소이가, 경이는 우리가.” 그가 쥘리에트의 어깨를 두드린다. “몇만 년이어도 충분히 경이롭지 않니?”

쥘리에트가 젖은 눈으로 웃는다. “Mon Dieu. 충분하고말고요.”

나도 웃는다. 조금 늦게.


시료는 실험동으로 옮긴다. 발전동에 붙은 건물로, 발전기 폐열로 데우기 때문에 기지에서 온도가 가장 안정된 곳이다. 거기에 영하 3도로 맞춘 보관 장치가 있다.

300미터를 썰매로 끈다. 원통은 보온 상자에 넣고 끈으로 세 번 묶었다. 바깥 공기는 영하 46도. 해발 3,488미터. 극지방은 기압이 낮아서 몸으로 느끼는 높이는 4,000미터 가까이 된다. 숨을 들이마시면 공기가 반쯤만 들어오는 것 같다. 열 걸음만 걸어도 심장이 귀에서 뛴다. 여기 온 지 석 달이 지났는데도 그렇다.

해는 지평선 위에 낮게 걸려 있다. 2월 중순의 보스토크에서는 아직 해가 지지 않는다. 한밤에도 지평선을 따라 낮게 굴러갈 뿐이다. 며칠 뒤면 처음으로 해가 지고, 밤은 하루하루 길어져서 4월 말이면 해가 아예 뜨지 않는다. 그다음 해를 보는 건 8월 중순이다.

나흘 전, 마지막 여름 비행기가 떠났다. 활주로 위를 낮게 한 바퀴 돈 비행기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이제 10월까지 아무도 오지 않는다. 너무 추워서다. 영하 50도 아래에서는 비행기의 유압유가 굳고, 고무 패킹이 유리처럼 깨지고, 연료가 젤리가 된다. 남극의 겨울에 이 대륙 한가운데 내릴 수 있는 비행기는 세상에 몇 대 없고, 그런 비행기를 부르려면 누군가 죽어 가고 있어야 한다.

열두 명. 252일. 남극 대륙 한가운데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 기지까지 수백 킬로미터.

나는 그 숫자들이 무섭지 않다. 숫자로 셀 수 있는 건 준비할 수 있다. 연료, 식량, 예비 부품. 다 세어 두었다. 내가 이 일을 좋아하는 이유다.


저녁 식탁에 열두 명이 다 모인다.

요리사 알료샤가 오늘을 위해 아껴 둔 냉동 연어를 구웠다. 스물여섯 살, 첫 월동이다. 다들 접시를 비우는 동안 알료샤는 냄비 옆에 서서 사람들 얼굴만 본다. 누가 한 숟갈 더 뜨면 그게 그의 저녁이다.

표트르가 일어나 잔을 든다. 보드카가 손가락 한 마디만큼 들어 있다. 규칙이 있다. 기념일에만, 한 잔만. 고지대에서 술은 두 배로 돈다.

“그녀가 우리에게 물을 한 잔 줬습니다.” 표트르가 말한다. “1,500만 년…….” 그가 나를 본다. 다들 웃는다. “죄송합니다. 몇만 년 된 물을.”

나는 물잔을 든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고지대에서는 더욱.

잔이 비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리나 소콜로바가 다음 주 날씨를 말한다. 기지 부대장으로 기상과 통신을 맡고 있다. 마흔일곱 살, 다섯 번째 겨울이다. 이리나의 예보는 늘 숫자뿐이다. “다음 주 평균 영하 51도. 풍속 초속 4미터. 끝.” 천위가 내일 아침 시료에서 기체를 뽑겠다고 말한다. 오늘 처음 하는 말이다. 기지 의사 다니엘 오코로는 다들 산소포화도를 재고 자라고 한다. 영국 사람답게 아주 정중하게, 그리고 두 번.

누가 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미샤가 1982년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 아버지가 그해 여기 있었어.” 미샤가 빈 잔을 손가락으로 돌린다. “4월이었지. 발전동에 불이 났어. 한 명이 죽었고. 발전기가 다 탔어.”

식탁이 조용해진다. 여기 있는 사람이면 다 아는 이야기다. 그래도 아무도 끊지 않는다.

“남은 사람들은 예비 발전기 하나로 버텼어. 전기는 무전기랑 최소한만. 난방은 등유 난로. 불은 양초. 등유랑 실로 양초를 만들었대. 그걸로 8개월.” 미샤가 잔을 내려놓는다. “아버지는 그 얘기를 하면 꼭 마지막에 이랬어. 추운 건 견딜 수 있다. 연료가 떨어지는 건 못 견딘다.”

표트르가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서 적은 불 하나뿐입니다.” 그가 말한다. 천천히, 한 단어씩. “추위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외로움도 아닙니다. 불입니다. 그녀는 불만 조심하면 우리를 다 데리고 봄까지 갑니다.”


자기 전에 나는 민재를 부른다.

“새벽 2시 점검, 네가 해.”

규정 11조 2항. 인양한 시료는 처음 72시간 동안 4시간마다 보관 장치의 온도와 압력을 확인해 기록한다. 밤 10시 점검은 내가 했다. 2시는 민재 차례다.

“네, 선배. 규정 11조 2항. 저도 외웠어요.”

민재가 경례 흉내를 낸다. 스물아홉 살, 내가 극지연구소에서 직접 뽑은 후배다. 손도 빠르고 눈치도 빠르다. 그리고 내 잔소리를 웃으면서 듣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시추 기록 수첩도 너한테 둘게. 내일 아침에 오늘 기록 정리해 줘.”

“선배 수첩을요? 이거 가보 아니에요?”

“가보야. 잃어버리면 죽는다.”

민재가 웃으며 수첩을 품에 넣는다.


경보가 울린다.

시계를 본다. 02시 41분. 귀에 익지 않은 소리다. 훈련 때 들은 것보다 높고 길다. 화재 경보.

몸이 먼저 움직인다. 보스토크에서 밖에 나가려면 옷을 일곱 겹 입어야 한다. 훈련 목표는 4분이었다. 나는 3분 20초에 입는다. 손이 떨려서 장갑 하나를 두 번 떨어뜨린다.

거주동 문을 열자 영하 55도의 공기가 얼굴을 친다. 해는 남쪽 지평선에 걸려 있다. 새벽 3시에도 지지 않는 해다. 그 낮고 창백한 빛 아래로, 하늘 한쪽이 붉다.

발전동이 타고 있다.

불길은 영화에서 보던 것과 다르다. 느리다. 붉고 탁하다. 산소가 모자라서다. 이 높이에서 공기 속 산소는 해수면의 60퍼센트밖에 안 된다. 불은 숨이 찬 짐승처럼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고 벽을 핥아 올라간다. 시커먼 연기가 기둥처럼 솟았다가 바람도 없는 하늘에 그대로 고인다.

사람들이 뛰어온다. 다들 나처럼 제대로 뛰지 못한다. 열 걸음을 뛰면 다리보다 폐가 먼저 멈춘다. 눈 위에서 몸을 접고 숨을 몰아쉬는 그림자들이 불빛에 붉게 물든다.

표트르의 목소리가 무전기에서 들린다.

“불이 펌프동으로 번졌습니다. 니콜라이와 내가 탱크 밸브로 갑니다. 이리나, 인원 확인.”

이리나가 무전기를 든 채 사람들을 센다. 손가락으로, 한 명씩.

“표트르, 니콜라이 펌프동. 소이, 에릭, 천위, 다니엘, 알료샤, 미샤, 쥘리에트, 나.” 이리나의 손가락이 멈춘다. “베르나르. 민재.”

나는 시계를 본다. 02시 44분.

새벽 2시 점검. 내가 시킨 일이다.


실험동은 발전동 북쪽 벽에 붙어 있다. 불은 아직 실험동 지붕까지 오지 않았지만 문틈으로 연기가 새어 나온다. 연기가 낀 창 안쪽에서 흰 불빛 하나가 흔들린다. 헤드램프다.

쥘리에트가 소리친다. “베르나르도 안에 있어요! 민재랑 같이 시료를 나누고 있었어요! 밤새 한다고 했어요!”

나는 문을 향해 뛴다. 아니, 뛰려 한다. 다섯 걸음 만에 시야가 좁아진다. 가장자리부터 까맣게 닫힌다. 누군가 내 팔을 잡는다. 다니엘이다.

“안 돼요.” 그가 말한다. 숨이 차서 한 단어씩 끊어진다. “산소. 없어요. 저 안. 연기.”

“민재가 안에 있어요.”

“알아요.”

에릭이 내 다른 팔을 잡는다. 나는 둘을 뿌리치려고 한다. 그러다 실험동 지붕이 내려앉는다.

소리가 이상하게 작다. 불은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고, 지붕이 무너질 때도 둔한 한숨 같은 소리뿐이다. 공기가 얇으면 소리도 얇다. 불꽃이 무너진 자리에서 위로 솟구치고, 연기가 한 번 크게 부풀었다가 다시 고인다.

나는 눈 위에 무릎을 꿇는다. 꿇은 건지 다리가 풀린 건지 모르겠다.


탱크장 쪽에서 미샤가 소리를 지른다. 러시아어라서 다 알아듣지는 못한다. 알아들은 단어 하나는 ‘연료’다.

투광등 아래, 펌프동 옆 눈밭 위로 검은 줄기가 흘러간다. 처음에는 그림자인 줄 안다. 그런데 그림자가 움직인다. 눈을 적시며 낮은 쪽으로, 눈 둔덕 너머로 번져 나간다.

등유다.

펌프동은 탱크장의 심장이다. 눈 속에 반쯤 묻힌 탱크 세 개에서 나온 배관이 그 안에서 하나로 모여 발전동으로 연료를 보낸다. 불길이 펌프동 안의 배관 연결부를 녹였고, 거기 이어진 탱크들이 열린 수도꼭지처럼 쏟아지고 있다.

이상하게도 등유에는 불이 붙지 않는다. 불이 붙으려면 기름이 증기를 내야 하는데, 영하 55도의 등유는 증기를 거의 내지 않는다. 연료는 타지 않고 그냥 흘러간다. 우리의 겨울이, 리터 단위로, 눈 속으로 스며든다.

“밸브!” 미샤가 펌프동을 향해 소리친다. “표트르! 3번! 3번이라도!”

무전기에서 표트르의 목소리가 들린다. 숨소리가 섞여 있다.

“1번, 2번 연결부가 녹았습니다. 잠글 수 없습니다. 3번으로 갑니다.”

그리고 한참 뒤에.

“3번 잠갔습니다.”

미샤가 눈 위에 주저앉는다.

“나와요, 표트르.” 이리나가 무전기에 대고 말한다. “지금 나와요.”

대답이 없다.

펌프동 지붕이 불빛 속에서 천천히 기울어진다.


해가 지평선을 따라 천천히 동쪽으로 돈다. 불은 아침이 되어도 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물은 쓸 수 없다. 눈을 녹여 물을 만드는 설비가 발전동 안에 있었다. 소화기는 진작 다 썼다. 우리는 다른 건물로 불이 옮겨붙지 않게 사이의 눈을 파헤치고, 그저 바라본다.

10시쯤 불이 사그라든다. 다니엘과 미샤와 에릭이 들어간다. 나는 따라가겠다고 한다. 다니엘이 내 얼굴을 한참 보더니 고개를 젓는다.

그들은 넷을 데리고 나온다.


정오. 이리나가 남은 사람들을 시추동에 모은다. 시추동은 발전동에서 300미터 떨어져 있어서 무사하다. 자체 발전기도 있다. 이제 이 기지에서 전기가 들어오는 건물은 여기뿐이다.

이리나는 표트르의 자리에 서지 않는다. 그 옆에 선다.

“인원.” 이리나가 말한다. “여덟.”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연료. 미샤.”

미샤가 일어난다. 얼굴에 그을음이 그대로다. 손에 든 종이를 내려다보는데, 손이 떨려서 종이가 흔들린다.

“1번, 2번은 비었어. 다 눈으로 들어갔어. 3번은 표트르가…….” 미샤가 말을 멈춘다. 한 번 숨을 쉬고 다시 한다. “3번은 남았어. 61,600. 여기 시추동 일일 탱크 6,800. 합쳐서 68,400.”

어젯밤 저녁 식탁에서 우리에게는 211,200리터가 있었다.


오후에 나는 쥘리에트와 함께 실험동 터에 들어간다. 이리나가 허락했다. 규정 14조 1항. 시료를 잃으면 시추 책임자가 손실 현황을 조사하고 기록한다. 이런 날에도 규정은 규정이다. 아니, 이런 날이라서 규정이 필요하다. 규정은 피로 쓴다. 누가 그렇게 말했는지는 잊었지만 나는 그 말을 믿는다.

실험동은 반쯤 무너졌다. 검게 탄 들보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바닥에는 얼음이 깔려 있다. 불에 터진 실험동 물탱크에서 쏟아진 물이 바닥을 덮었다가, 불이 꺼지자마자 얼어 버렸다. 얼음 속에 유리 조각, 플라스틱, 서류가 박혀 있다.

보관 장치는 옆으로 쓰러져 있다. 문이 열려 있다. 티타늄 원통은 그 옆에 굴러 있고, 밸브가 열려 있다. 베르나르와 민재가 시료를 나누던 자리다. 쥘리에트가 다시 말해 준다. 2리터를 작은 용기 여섯 개에 나누기로 했었다고. 압력을 천천히 빼면서. 밤새.

쥘리에트가 얼음 위에 무릎을 꿇고 용기를 찾는다. 장갑 낀 손으로 얼음을 쓸어 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모두 깨진 채 얼음에 박혀 있다. 안에 들었던 물은 바닥의 얼음과 하나가 되었다.

여섯 번째는 없다.

우리는 한 시간 동안 찾는다. 없다.

나는 바닥이 기운 방향을 본다. 실험동 바닥은 발전동 쪽으로 기울어 있고, 그 끝에 배수구가 있다. 실험동과 발전동과 펌프동의 배수관은 하나로 이어져 펌프동 지하의 섬프로 간다. 섬프는 새거나 넘친 것을 모아 두는 콘크리트 집수조다.

얼음은 그쪽으로 흘러가다 멈춘 모양 그대로 굳어 있다.


저녁에 미샤가 펌프동 섬프 뚜껑을 연다. 나도 같이 본다.

섬프 안은 꽝꽝 얼었다. 층이 져 있다. 맨 아래는 투명한 얼음. 그 위에 하얀 소화 분말이 섞인 탁한 얼음. 그리고 맨 위에는 호박색으로 굳은 등유. 등유는 영하 55도에서도 다 얼지는 않는다. 끈적한 꿀처럼 엉겨 있다.

물이 흘러들고, 배관이 터지며 쏟아진 연료가 그 위를 덮었고, 한밤의 추위가 그 모든 걸 한꺼번에 붙잡았다.

손전등 빛이 얼음 속을 지나갈 때 나는 본다. 투명한 얼음과 등유 사이, 경계층에 흐린 구름 같은 게 떠 있다. 연기 같은, 먼지 같은, 아주 옅은 회색 띠.

소화 분말일 거다. 아니면 그을음.

“저것도 연료야.” 미샤가 말한다. 그의 손전등이 호박색 층에 머문다. “녹이면 못해도 천몇백 리터는 나와.”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같은 계산을 하고 있었다.


밤에 시추동 구석에서 나는 노트를 편다. 내 시추 기록 수첩은 민재가 품에 넣고 갔다. 그래서 새 노트다. 첫 장에 쓴다.

2032년 2월 17일. 시료 용기 6개 중 5개 파손 확인(실험동 바닥 얼음 속). 1개 미발견. 미발견 용기 추정 위치: 실험동 배수구 → 펌프동 섬프. 사망 4명. 표트르 바실리예프, 니콜라이 페트로프, 베르나르 코스트, 강민재.

마지막 이름을 쓰다가 펜이 멈춘다. 손이 아니라 펜이다. 잉크가 얼었다. 시추동 구석, 문 옆 바닥은 영하 4도다. 나는 입김으로 펜을 녹여 끝까지 쓴다.

그 아래에 이리나가 오후에 칠판에 적은 숫자를 옮긴다.

연료 68,400리터. 첫 비행기까지 251일.

숫자로 셀 수 있는 건 준비할 수 있다. 나는 아직 그걸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