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8개월 · 17장
겨울 8개월 · 도해

17장

남극 보스토크 기지, 2032년 10월 10일
연료 잔량 4,720리터 (메탄 환산 포함) · 첫 비행기까지 15일
약 12분

나흘은 아직 나흘이다.

9월 20일 이후 숫자는 대체로 내 계산을 따랐다. 대체로. 9월 28일 새벽, 시추탑 꼭대기의 풍선 하나가 터졌다. 해치 틈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에 고무가 굳어 있었다. 터지는 소리가 총소리 같아서 다들 침낭에서 튀어 나왔다. 천위가 바로 천장 공기를 쟀다. 메탄 0.9퍼센트. 해치를 열었다. 20분 뒤 0.3퍼센트. 풍선 하나, 6세제곱미터, 등유 4리터. 그 뒤로 이리나는 풍선을 탑 꼭대기에서 2미터 아래로 내려 매달았다.

10월 3일부터는 A 탱크의 메탄이 줄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일이다. 오염 연료가 바닥을 보이고 있다. 쉼표 사슬들이 먹을 게 줄어든다. 대신 B 탱크가 늘었다. 우리는 하루 세 번 눈을 판다. 해는 이제 열여섯 시간 떠 있다. 기온은 영하 58도에서 61도 사이를 오간다.

이리나는 매일 아침 기록부를 들고 나가서 숫자를 읽고 들어온다. 그리고 칠판 귀퉁이의 ‘영하 55도’ 옆에 그날의 기온을 적는다. 영하 59. 영하 61. 영하 57. 모두가 그 숫자를 본다. 아무도 그 숫자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10월 10일 저녁 회의에서 이리나가 새 질문을 칠판에 쓴다.

우리가 떠난 뒤, 저것들은?

다들 탱크를 본다.

“10월 25일에 우리가 떠나면 이 기지는 비어요.” 이리나가 말한다. “여름 팀이 11월 중순에 와요. 그 사이 3주. 발전기는 끄고 가요. 시추동은 얼어요. 탱크도 얼어요.”

“얼면 멈춰요.” 쥘리에트가 말한다. “죽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묻는 거예요.”

이리나가 사흘 동안 나눈 통화 내용을 전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 인천. 러시아 남극 탐사대, 프랑스 극지연구소, 한국 극지연구소. 세 곳이 같은 걸 물었다고 한다. 표본을 가져올 수 있느냐. 가져와도 되느냐. 남은 건 어떻게 하느냐.

대답은 셋이 다 다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탱크째 처리하고 아무것도 들고 나오지 말라고 한다. 러시아 기지에서 나온 것은 러시아가 정한다고. 파리는 표본을 되도록 많이 가져오라고 한다. 베르나르가 시작한 일이라고. 인천은 현장 판단을 존중한다고 한다. 정할 사람이 없다는 말을 가장 점잖게 한 것이다.

“셋이 다 달라요.” 이리나가 말한다. “그러니까 규정이 없는 거예요.”

쥘리에트가 이리나를 본다.

“이리나는요?”

“나는 러시아 기지 대장대행이에요.” 이리나가 말한다. 그게 끝이다.

쥘리에트가 입을 다문다. 생활 칸이 조용해진다. 발전기 소리만 남는다.

나는 그 뒤를 안다. 남극조약 환경 의정서는 남극에 없던 생물을 들여오지 말라고 한다. 이건 남극에 원래 있던 거다. 얼음 밑 호수에서 얼음 위로 나온 생물을 어떻게 다룰지는 어디에도 없다. 지표에 퍼져도 되는지, 호수로 돌려보내야 하는지. 2029년 인천의 회의실에서 우리도 그걸 묻지 않았다.

에릭이 웃는다. 분위기를 풀려는 웃음이다. “보스 전공이네요.”

모두가 나를 본다. 쥘리에트까지.

나는 잠시 생각한다. 그리고 쥘리에트를 본다.

“같이 써요.” 내가 말한다. 그러고는 이리나를 본다. “다 쓰면 읽어 주세요. 정하는 건 그다음에 해요.”

이리나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인다.


규정은 사흘 동안 쓴다. 쥘리에트와 내가, 탱크 구역 구석의 접이식 탁자에서. 그 상자 옆에서. ‘6G 장비 — 손대지 말 것 — 시추팀’.

첫날은 한 줄도 못 쓴다.

나는 습관대로 시작한다. 47쪽짜리 규정처럼. 목적, 적용 범위, 정의, 책임. 정의부터 막힌다. ‘오염원’을 어떻게 정의하지. 2029년 인천의 회의실에서 우리는 오염원을 ‘호수 밖에서 호수로 들어가려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건 반대 방향으로 나온 것이다. 그럼 이게 오염원인가. 무엇을 오염시키는가. 우리를? 지표를? 아니면 우리가 이걸 오염시켰나. 우리의 연료와 소화기 분말과 소변으로.

쥘리에트가 내 노트를 보다가 말한다.

“소이. 그 규정은 뭘 지키려고 만든 거였어요?”

6월 20일 밤에 쥘리에트가 했던 질문과 같다. 그때 나는 대답은 했지만, 그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이번에는 대답한다.

“호수요.”

“그럼 이번 규정은요?”

나는 펜을 든다. 그리고 1조를 쓴다. 정의도, 범위도 아닌 것을.

1조. 이 규정이 무엇을 지키려는지 먼저 적는다.

쥘리에트가 그걸 본다. 웃는다.

“그건 규정이 아니잖아요.”

“규정이에요. 이게 없어서 우리가 6월에 틀렸어요.”


1조 아래에 우리가 지키려는 것을 적는다. 셋이다.

  1. 사람. 이 생물과 이 생물이 만드는 기체로부터.
  2. 호수. 이 생물이 우리 연료와 소화 분말과 지표의 미생물과 섞인 채로 호수에 돌아가지 않도록.
  3. 이 혈통. 1,500만 년 동안 갇혀 있다가 우리를 만난 생명이, 우리 때문에 끊기지 않도록.

세 번째 줄을 쓰고 나서 쥘리에트가 한참 말이 없다. 나도 없다.

그다음은 쉽다. 무엇을 지킬지 정하면 어떻게 할지는 따라 나온다.

탱크의 배양체는 가져가지 않는다. 그건 이미 섞였다. 우리 연료, 소화 분말, 소변, 눈 속의 흙과 그을음, 그리고 아마 우리 손에서 묻어 들어간 지표의 미생물들. 호수의 혈통이 아니라 이 겨울의 혈통이다. 떠나는 날 발전기를 끄면 탱크는 얼어서 멈춘다. 여름 팀이 오면 탱크 내용물을 80도로 데워 한 시간 유지한 뒤 처리한다. 점액 안쪽까지 닿는 건 살균제가 아니라 열이다. 시추 장치의 보일러를 쓰면 된다. 내가 설계한 보일러다.

가져갈 건 셋이다. 먼저 쥘리에트의 티타늄 원통. 살균제를 넣기 전, 먹이를 주기 전에 A 탱크 바닥에서 받은 것. 이 겨울에 가장 덜 섞인 것. 그리고 B 탱크 바닥에서 하나, 쥘리에트의 섬프 물병 중 가장 먼저 받은 것 하나. 셋 모두에 3월 8일부터 무엇을 먹였고 무엇을 넣었는지 적은 기록을 붙인다. 내 노트에서 옮겨 적는다.

“운반 온도는요?” 내가 묻는다.

“영상 1도.” 쥘리에트가 말한다. “호수는 압력 때문에 영하 3도에서도 물이지만, 여기서는 0도 밑으로 가면 얼어요. 얼면 세포가 깨져요. 얼지 않는 데서 제일 차가운 데. 그게 여기서 만들 수 있는 제일 호수 같은 온도예요.”

“비행기 안에서 영상 1도를 사흘 동안 어떻게 지켜요?”

쥘리에트가 웃는다. “소이가 계산해요.”

나는 계산한다. 비행기 안에서는 히터를 못 쓴다. 대신 얼음물. 얼음이 녹는 동안 물은 0도에 머문다. 비닐 팩에 민물을 담아 반쯤만 얼리고, 표본과 팩 사이에 스펀지를 한 겹 둔다. 표본은 1도에서 천천히 내려가다 0도 가까이에서 멈춘다. 얼음물보다 차가워질 수는 없으니까. 1도를 지키지는 못해도 얼지는 않는다. 단열 상자에 표본 셋과 팩 열두 개를 넣으면 나흘은 간다.

“얼음이야 밖에 얼마든지 있잖아요.” 에릭이 말한다.

“밖의 얼음은 영하 60도예요.” 알료샤가 말한다. 진지하게. “그걸 넣으면 다 얼어요. 0도짜리 얼음이어야 해요.” 알료샤가 부엌에서 얼음 틀을 전부 꺼내 온다. 열두 개. “제 얼음으로 하세요.”


규정은 일곱 쪽이 된다. 47쪽이 아니라 일곱 쪽. 쥘리에트와 내가 둘 다 서명한다. 그리고 쥘리에트가 하나를 더 하자고 한다.

“베르나르 이름도요.”

“서명은 산 사람이…….”

말하다가 멈춘다. 그리고 1조를 본다. 이 규정이 무엇을 지키려는지 먼저 적는다.

나는 서명란 맨 위에 빈 줄을 하나 만든다. 쥘리에트가 거기 쓴다. 베르나르 코스트. 그리고 그 아래에, 내가 쓴다. 강민재.

이 규정은 그 둘이 2월 17일 새벽 실험동에서 지키려던 것을 지키려고 만든 규정이다. 그러니 그 둘의 이름이 맨 위에 있어야 한다.

그날 밤 이리나가 일곱 쪽을 읽는다. 생활 칸 식탁에서, 헤드램프를 켜고. 두 번 읽는다. 탱크를 80도로 한 시간 데우는 대목에서 오래 멈춘다. 그러고는 서명란 맨 아래에 이름을 쓴다. 이리나 소콜로바, 보스토크 기지 대장대행.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내가 보내요.” 이리나가 말한다. “탱크는 여기 적힌 대로 처리돼요. 그쪽 말의 반은 들어준 거예요.”

“나머지 반은요?”

“그건 비행기에서 내린 다음에 들을게요.”


10월 17일, 쥘리에트가 티타늄 원통에 라벨을 붙인다.

원통은 6월 29일 밤 이후로 한 번도 열지 않았다. 그 상자 안에서 넉 달 가까이 영상 1도를 지켰다. 한 번만 빼고. 7월 14일 새벽 발전기가 멈춘 38분 동안 상자의 히터도 꺼졌다. 그날 쥘리에트와 나는 둘 다 그 상자를 봤고,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그 상자는 기록에 없는 상자였으니까.

“영하 0.6도까지 내려갔었어요.” 쥘리에트가 말한다. 석 달 만에. “그날 아침에 혼자 기록을 봤어요. 원통 속까지 얼 시간은 아니었다고 계산했어요. 그런데 계산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8월 말에 압력계 바늘이 올라가는 걸 보고 나서야 잠을 잤어요.”

원통의 압력계는 1.4기압을 가리킨다. 그 안에서도 무언가가 조금씩 메탄을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쥘리에트가 밸브를 아주 조금 열어 그 압력을 뺀다. 쉬익. 작은 소리.

“살아 있어요.” 쥘리에트가 말한다.

라벨에 쥘리에트가 쓴다. 날짜, 출처, 이 겨울의 기록 번호. 그리고 맨 아래에 한 줄을 쓰다가 멈춘다. 펜 끝이 종이 위에 머문다.

‘1,500만 년 된 생명……’

쥘리에트가 나를 본다. 눈이 웃고 있다.

“아니다.” 쥘리에트가 말한다. 그 줄에 가로줄을 긋는다. 그리고 다시 쓰면서 소리 내어 읽는다.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내 말투를 흉내 내어. “1,500만 년 동안 갇혀 있던 혈통. 정확하게.”

나는 웃는다. 소리 내어. 쥘리에트도 웃는다. 그 웃음소리에 생활 칸의 에릭이 고개를 내민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쥘리에트가 대답한다.

“소이가 옮았어요.”


그날 밤 나는 민재의 수첩을 편다.

탄 자국이 있는 표지. 앞쪽 절반은 내 글씨다. 6G 시추 기록. 11월부터 2월 16일까지. 깊이, 온도, 케이블 장력, 시추 속도. 그리고 2월 16일 마지막 줄. ‘3,769m 인양 완료. 압력 338기압 유지.’ 그다음 장부터는 민재의 글씨다. 2월 16일 밤의 정리. 그리고 2월 17일 02시 5분의 메모.

그 뒤는 비어 있다.

나는 그 빈 장에 쓴다. 6G 기록을 마저 쓴다. 시추 기록은 시추가 끝날 때 끝나는 게 아니라 시료의 행방이 정해질 때 끝난다. 규정 14조 1항.

6G 호수 시료 (2032-02-16 인양, 2L) 분주 용기 6개: 전부 손실 (2032-02-17 화재). 1~5번 실험동 바닥, 6번 펌프동 섬프. 생존 계통: 6번 용기 내용물이 섬프를 거쳐 연료 탱크 A에 정착 (2032-03-08 추정). 회수 표본: 3개 (티타늄 원통 1, 병 2). 영상 1도 보관, 2032-10-25 반출 예정. 관련 규정: ‘보스토크 호수 기원 생물 취급 규정’ (2032-10-13, 7쪽) 시추 책임자 한소이

그리고 한 장을 넘긴다. 민재의 마지막 메모가 있는 장의 바로 다음. 거기에 따로 쓴다.

민재야. 용기 2번의 기포는 메탄이었어. 천위 씨가 재 줬어. 네가 물어보려던 거. 커피 쏟을 뻔한 건, 비밀로 할게.

수첩을 덮는다. 손이 떨리지 않는다.


10월 19일 아침, 3번 탱크의 손펌프가 공기를 빤다.

에릭이 손잡이를 몇 번 더 젖혀 본다. 헛도는 소리만 난다. 3월에 설상차가 멈춰 서면서 남긴 11,000리터. 일곱 달 동안 우리는 이 탱크에서 20리터 통으로 연료를 날랐다. 영하 55도의 등유를 꿀처럼 받아서. 이제 바닥이다.

깨끗한 연료는 이제 두 군데에만 있다. 시추동 벽 옆 눈 둔덕 밑의 투하 드럼 여덟 개. 그리고 옛 5G 시추동의 드럼 두 개.

이리나의 기록부에는 오늘 아침 영하 61도가 적혀 있다. 엿새 남았다. 비행기가 하루 늦을 때마다 깨끗한 연료가 200리터씩 더 든다. 나흘 늦으면 남은 나흘이 바닥난다. 칠판 앞에서 아무도 그 말을 하지 않는다. 다들 그 나눗셈을 할 줄 안다.

미샤가 썰매를 끌고 나온다. 아무도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지만 나도 따라나선다.

5G 시추동의 문은 7월보다 더 뻑뻑하다. 안은 여전히 바깥보다 차갑게 느껴진다. 구석의 방수포를 걷자 드럼 두 개가 그대로 서 있다. 성에가 더 두꺼워졌다. 미샤가 장갑으로 성에를 문지른다. 페인트 글씨가 나온다.

5월 새벽 이 드럼 앞에서 나는 400리터로는 설명이 안 된다는 계산부터 했다. 7월에는 이 400을 칠판 깨끗한 연료 칸에 적어 넣었다. 그 뒤로 이 드럼은 장부 안에 있었다. 그래도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다른 깨끗한 연료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미샤가 드럼을 손바닥으로 두드린다. 둔한 소리가 난다. 아직 꽉 차 있다.

“계산이 틀렸으면 이게 먼저 나갔겠지.” 미샤가 말한다.

“안 틀렸어요.”

“알아.” 미샤가 주머니에서 페인트 펜을 꺼낸다. 펜촉을 입김으로 녹인다. 그러고는 ‘1982’ 아래에 한 줄을 더 쓴다.

우리는 드럼을 하나씩 썰매에 굴려 올린다. 180킬로그램을 200미터. 열 걸음 끌고, 멈추고, 숨을 쉰다. 시추동 문 앞에서 미샤가 허리를 펴고 하늘을 본다. 해가 아직 높다.

드럼 두 개는 발전기실 구석, 미샤의 침낭 옆에 선다. 엔진 열로 천천히 녹는다. 이리나가 칠판의 깨끗한 연료 칸 맨 아래에 한 줄을 따로 적는다.

비행기가 늦으면: 1982 드럼 2개, 400리터, 이틀

투하 드럼을 다 쓰기 전에는 이 둘을 따지 않는다. 그렇게 정한다. 아무도 이유를 묻지 않는다.


10월 24일 밤.

마지막 저녁을 먹는다. 알료샤가 수프를 끓였다. 다들 맛있다고 한다. 진심이다. 사과가 나온다. 7월 투하 상자에 들어 있던 사과. 석 달 동안 바깥에서 돌처럼 얼어 있던 걸 알료샤가 오늘 오후 천천히 녹였다. 갈색으로 물렀다. 그래도 사과 맛이 난다. 여덟 명이 사과 반쪽씩을 먹는다. 그리고 남은 반쪽 넷을 들고 눈 창고 앞에 놓는다. 금세 다시 하얗게 언다.

이리나가 내일 예보를 읽는다. 기록부를 들고, 칠판 앞에서.

“10월 25일. 예상 최저 영하 56도. 오전 10시 영하 53도. 바람 초속 3미터. 맑음.”

칠판 귀퉁이의 ‘영하 55도’. 그 옆에 이리나가 ‘−53 (예상)‘이라고 적는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는다. 예보는 예보다.

나는 마지막으로 칠판의 연료 칸을 갱신한다.

깨끗한 연료: 1,050리터 탱크 속 오염 연료: 약 120리터 상당 (A 거의 바닥, B 눈 반죽 남은 것) 풍선 속 메탄: 약 60㎥ = 40리터 상당 합계: 약 1,210리터

나흘. 내가 9월 20일에 쓴 그 숫자가 거의 그대로다. 나는 그 숫자를 오래 본다. 계산이 맞았다는 게 기쁘지 않다. 그냥 고맙다. 누구에게인지는 모르겠다. 미샤의 엔진에게, 아직 따지 않은 1982년의 드럼 두 개에게, 이리나의 풍선에게, 천위의 크로마토그래프에게, 쥘리에트의 현미경에게, 알료샤의 얼음 틀에게. 그리고 A 탱크 바닥의 쉼표 사슬들에게.

밤 11시. 다들 잠자리에 든다. 나는 탱크 구역에 남는다. 당번은 없다. 이제는 감시할 게 없다. 의자 두 개만 그 자리에 남아 있다. 5월부터 여덟 명이 둘씩 번갈아 앉아 서로를 지켜보던 의자. 나는 그중 하나에 앉는다. 다른 하나는 비워 둔다.

시추탑 철골에 매달린 풍선들을 올려다본다. 서른 개 중 스물여섯 개가 쪼그라들어 있다. 마지막 밤이라 미샤가 발전기에 가스를 아끼지 않았다. 남은 넷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작아지고 있다. 발전기가 숨을 쉴 때마다 조금씩.

그 아래에서 A 탱크의 숨구멍이 아주 가끔 탁, 하고 열린다. 쉬이이. 아주 작게. 거의 다 먹었다.

나는 탱크의 은빛 단열재에 손바닥을 댄다. 차갑다. 그 안쪽은 영상 3도다. 호수보다 6도 따뜻한 어둠. 3월에 내가 정한 온도. 사람 칸은 따뜻하게, 연료 칸은 얼지 않을 만큼만. 절약하려고 정한 그 숫자가 저것들에게는 지구에서 가장 좋은 자리였다.

“고마워.” 내가 말한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 쥘리에트가 들었다면 웃었을 거다. 소이가 미생물한테 말을 거네. 미샤가 들었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거다.

마지막 풍선이 천천히 쪼그라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