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터 서른한 개. 하루 세 개.
칠판에 그렇게 쓰고 나니 그 아래에 계산을 쓸 필요가 없다. 다들 나눗셈을 할 줄 안다. 열흘.
미샤는 발전기실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제는 쫓겨나서가 아니라 할 일이 있어서다. 그는 빈 드럼 세 개를 발전기실 옆에 세워 놓고 일일 탱크로 가기 전의 연료를 먼저 거기 붓는다. 이틀 동안 가만히 둔다. 무거운 찌꺼기는 가라앉는다. 그러면 위에서부터 떠서 쓴다.
“가라앉는 놈만 가라앉아.” 미샤가 말한다. 드럼 안을 헤드램프로 비추며. “작은 놈들은 둥둥 떠 있어. 등유가 아무리 묽어도 작은 건 안 가라앉아. 너무 가벼워.”
그다음은 천이다. 미샤가 알료샤에게서 행주를 얻어 와 깔때기에 세 겹 씌운다. 천을 지나온 연료는 조금 맑아진다. 하지만 필터의 구멍은 10마이크로미터다. 머리카락 굵기의 7분의 1. 행주의 실과 실 사이는 그보다 수십 배 넓다.
그렇게 해서 하루 세 개가 두 개가 된다. 열흘이 보름이 된다.
“투하가 오면.” 미샤가 말한다. “필터가 오면.”
7월 8일, 하늘이 맑다.
그믐이라 달은 없다. 대신 별이 있다. 극야 한가운데, 구름 한 점 없는 보스토크의 하늘에는 별이 너무 많아서 별과 별 사이가 오히려 드물다. 은하수가 지평선에서 지평선까지 하얀 강처럼 흐른다. 그 빛만으로도 눈밭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헤드램프를 끄고 한참 서 있으면 발밑이 보인다.
영하 79도. 이리나가 오후 6시에 잰 숫자다.
투하 지점은 기지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옛 활주로다. 우리는 오후 내내 그곳에 표지를 놓는다. 깡통 스무 개. 깡통마다 미샤가 2월에 파 두었던 구덩이 근처의 누런 눈을 꾹꾹 눌러 담았다. 등유에 절은 눈. 그 위에 등유를 조금 더 부어 심지를 꽂는다.
“쏟아진 연료가 드디어 일을 하네.” 미샤가 말한다.
깡통을 활주로 양쪽에 두 줄로 늘어놓는다. 백 미터 간격. 그리고 기다린다. 다들 일곱 겹을 입고, 그 위에 침낭을 뒤집어쓰고, 썰매 위에 몸을 웅크린다. 다니엘이 30분마다 모두의 얼굴을 헤드램프로 비춘다. 뺨과 코에 하얀 반점이 생기는지 본다. 동상의 시작이다.
밤 9시 14분, 이리나의 무전기가 지지직거린다. 영어다.
“보스토크, 여기는 리치 1-1. 120마일 밖. 표지 점화 요청.”
미샤와 에릭이 활주로를 따라 뛰어가며 깡통에 불을 붙인다. 숨이 끊어질 걸 알면서도 뛴다. 깡통에서 불이 솟는다. 붉고 탁하고 그을음 많은 불. 고지대의 불. 2월 17일 새벽의 그 불과 같은 색이다. 스무 개의 불이 별빛 아래 눈밭 위에 두 줄로 선다.
나는 그 불을 본다. 알료샤가 내 옆에서 그 불을 본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소리가 들린다.
처음에는 아주 멀다. 지평선 너머에서 무언가 낮게 우는 소리. 다섯 달 가까이 이 기지에서 들은 소리는 발전기, 송풍구, 철골, 그리고 우리 여덟의 목소리뿐이었다. 그 소리가 점점 커진다. 땅이 울린다. 가슴이 울린다.
그것이 별빛을 가리며 나타난다. 거대한 회색 그림자. 날개 끝의 붉은 등과 초록 등. 엔진 네 개의 굉음이 하늘 전체를 채운다. 그것이 활주로 위를 낮게, 아주 낮게 한 번 지나간다. 확인 비행이다. 바람이 눈가루를 일으킨다. 깡통 불꽃이 일제히 눕는다.
알료샤가 운다. 소리 내어. 아이처럼.
나도 운다는 걸 깨닫는다. 눈물이 속눈썹에 닿자마자 얼어붙는다.
두 번째 비행에서 수송기 뒷문이 열린다. 깡통 불빛이 닿는 높이까지 내려와서야 보인다. 낙하산이 펴진다. 하얀 꽃 스무 송이. 낙하산마다 작은 화학 발광 막대가 매달려 초록빛으로 흔들린다. 세 번째 비행에서 스무 송이 더. 그리고 네 번째 비행에서 큰 상자 두 개.
낙하산이 내려오는 데 30초쯤 걸린다. 그 30초가 길다.
첫 드럼이 눈에 닿는다. 둔한 소리.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는 소리가 다르다. 날카롭게 터지는 소리. 초록 불빛 아래로 검은 물줄기가 부채꼴로 뿜어 나온다.
영하 79도의 철판은 유리처럼 깨진다. 미국 쪽에서 미리 말한 대로다.
“리치 1-1, 투하 완료. 행운을 빕니다, 보스토크.”
굉음이 멀어진다. 지평선 너머로. 다시 조용하다. 아니, 조용하지 않다. 우리 여덟의 숨소리, 그리고 깡통 불꽃이 타닥거리는 소리.
이리나가 무전기를 내린다.
“회수.” 이리나가 말한다.
회수에 이틀이 걸린다.
설상차는 3월에 죽었다. 연료가 가득 찬 드럼 하나가 180킬로그램쯤 된다. 우리는 썰매에 드럼을 굴려 올리고 넷이 줄을 메고 끈다. 해발 3,488미터에서 180킬로그램을 1킬로미터. 열 걸음 끌고, 멈추고, 허리를 접고 숨을 쉰다. 다시 열 걸음.
드럼은 넓게 흩어져 있다. 활주로에서 수백 미터 벗어난 것도 있다. 낙하산의 초록 막대와 헤드램프로 찾는다. 찾아서 다가가 보면 절반은 깨져 있다. 철판이 갈라진 틈으로 연료가 다 흘러나가 눈이 누렇게 젖어 있다. 2월처럼. 그 누런 눈 위에 빈 드럼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마흔 개 중 멀쩡한 것이 열세 개다. 2,600리터.
큰 상자 둘 중 하나는 낙하산이 덜 펴져서 산산조각 났다. 다른 하나는 멀쩡하다. 그 안에 연료 필터 스무 개, 의약품, 신선한 사과 한 상자가 들어 있다. 사과는 이미 얼어서 나무토막 같다.
회수 이틀째 저녁, 에릭이 썰매 줄을 다시 묶겠다고 장갑을 벗는다. 매듭이 얼어서 장갑 낀 손으로는 안 풀린다고. 1분도 안 되는 시간이다. 다니엘이 소리를 지르지만 늦었다. 에릭의 오른손 손가락 셋이 하얗게 변한다.
다니엘이 시추동 진료 칸에서 그 손을 미지근한 물에 담근다. 정확히 40도. 온도계를 넣고 확인하며. 에릭이 이를 악문다. 다시 피가 돌 때의 통증은 얼 때보다 훨씬 심하다고 한다. 손가락이 붉어지고, 부풀고, 물집이 잡힌다.
“잃지는 않을 거예요.” 다니엘이 말한다. “아마도요. 2주 지나 봐야 알아요.”
에릭이 웃으려고 한다. “보스, 산재 처리 돼요?”
“규정 몇 조요?” 내가 말한다.
에릭이 이번엔 진짜로 웃는다. 아파서 반쯤 울면서.
드럼을 어디에 둘지 정하는 회의는 5분 만에 끝난다.
“밖에 둬요.” 내가 말한다. “시추동 벽 옆에, 눈 둔덕으로 덮어서. 안에 들이지 말아요. 탱크에 섞지도 말고요.”
“얼어.” 미샤가 말한다. 그런데 반대하는 말투가 아니다. 확인하는 말투다. “미국 연료는 영하 58도면 굳기 시작해. 지금 영하 79도야.”
“알아요. 굳어도 상하지는 않아요. 쓸 때 하나씩 들여와서 녹이면 돼요. 안에 두면 저것들이 들어가요.” 나는 A 탱크 쪽을 턱으로 가리킨다. “공기로든, 손으로든, 펌프로든. 깨끗한 건 깨끗하게 둬요. 차갑게. 따로.”
이리나가 나를 본다.
“그거 규정에 있어요?”
“없어요.” 내가 말한다. “제가 만들었어요.”
미샤가 고개를 끄덕인다. 천천히.
“맞아.” 미샤가 말한다. “손 닿는 데 있으면 예비가 아니야. 그냥 연료지.”
미샤는 회의가 끝나자 드럼 하나에서 20리터 통 하나를 받아 안으로 들인다. 물이 섞였는지 보겠다고. 그 통은 발전기실 구석, 그의 침낭 옆에 놓인다.
7월 12일부터 춥다.
추위에 ‘부터’라는 말을 쓰는 게 이상하지만, 정말 그렇다. 이리나의 숫자가 하루 사이에 뚝 떨어진다. 영하 76도, 영하 80도, 영하 82도. 바람은 없다. 하늘이 맑으면 땅의 열이 우주로 그대로 빠져나간다. 보스토크가 지구에서 가장 추운 곳인 이유다. 높고, 맑고, 고요하다.
7월 13일 새벽, 영하 83.1도.
건물이 운다. 철골이 수축하면서 딱, 딱, 하는 소리가 밤새 이어진다. 총소리 같다. 창문 안쪽에 두께 1센티미터의 성에가 낀다. 생활 칸 온도계가 영상 6도에서 더 올라가지 않는다. 발전기를 아무리 돌려도 열이 벽을 뚫고 나간다.
“막아요.” 이리나가 말한다. “새는 데를 전부.”
우리는 하루 종일 건물을 막는다. 벽 이음매에 테이프를 붙이고, 문틈에 담요를 끼우고, 환기구 덮개를 닫는다. 미샤와 내가 바깥에 나가 북쪽 벽 아래에 눈을 쌓아 올린다. 눈은 좋은 단열재다. 영하 83도에서 삽질을 하면 10분 만에 폐가 탄다.
저녁이 되자 생활 칸이 영상 10도까지 오른다. 다들 박수를 친다.
천위가 이산화탄소 측정기를 들고 있다. 화면에 3,100ppm이라고 떠 있다.
“높아요.” 천위가 다니엘에게 말한다. “건물이 숨을 못 쉬어요.”
다니엘이 측정기를 본다. 그리고 우리 얼굴을 본다. 춥고 지친 얼굴들.
“며칠은 괜찮아요.” 다니엘이 말한다. “두통이 좀 늘 거예요. 한파가 끝나면 다시 여세요.”
7월 14일 새벽 2시 50분, 발전기가 멈춘다.
이번에는 둘 다다. 필터 두 개가 동시에 막혔다. 미샤가 한쪽을 갈자마자 다른 쪽으로 넘겼는데, 그쪽도 이미 반쯤 막혀 있었다. 죽은 세포 부스러기가 연료 라인 전체에 퍼져 있다.
비상등이 붉게 켜진다. 바깥은 영하 82도.
미샤는 필터를 갈고 연료 라인의 공기를 뺀다. 시동 버튼을 누른다. 엔진이 기침을 하다가 멈춘다. 다시. 기침. 멈춤. 필터를 새로 갈아도 그 앞의 배관에 찌꺼기가 가득하다. 시동이 걸리자마자 새 필터로 몰려든다.
10분. 20분. 생활 칸 온도계가 영상 3도로 떨어진다. 알료샤가 부엌 칸의 물통들을 담요로 싼다. 다니엘이 모두에게 침낭을 덮어 쓰라고 한다. 쥘리에트는 탱크 구역 구석의 그 상자 쪽을 한 번 본다. 나도 본다. 그 상자의 히터도 발전기 전기로 돈다.
30분. 영상 0도.
“통.” 미샤가 말한다. 혼잣말처럼. 그러고는 발전기실 구석으로 간다. 자기 침낭 옆의 20리터 통. 투하 드럼에서 받아 온 깨끗한 연료. 사흘 동안 실내에 있어서 녹았다.
미샤가 엔진 입구 호스를 빼서 그 통에 바로 꽂는다. 4월에 내가 유량계를 확인할 때 했던 그대로. 오염된 탱크도, 찌꺼기 가득한 배관도, 막힌 필터도 거치지 않고. 깨끗한 통에서 엔진으로 바로.
시동 버튼.
엔진이 한 번 기침하고, 돈다. 고르게. 조명이 켜진다. 송풍구가 덜컹거린다.
38분.
미샤가 엔진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 20리터면 두 시간이다. 두 시간 동안 그는 연료 라인을 전부 뜯어서 찌꺼기를 씻어 내고 필터 둘을 새로 끼운다. 나는 그 옆에서 손전등을 든다. 통이 바닥나기 10분 전에 미샤가 원래 라인으로 돌린다. 엔진은 계속 돈다.
새벽 5시. 미샤가 깨끗한 통을 손바닥으로 두드린다. 텅 빈 소리가 난다.
“깨끗한 건 깨끗하게 돌아.” 미샤가 말한다.
나는 그 말을 노트에 적는다. 왜 적는지는 모르겠다.
한파는 7월 16일에 끝난다. 영하 70도. 이리나가 그걸 ‘따뜻하다’고 말하자 다들 웃는다.
하지만 숫자는 웃지 않는다.
7월 10일 손실 하루 58리터. 7월 14일 67리터. 7월 17일 아침 73리터.
살균제를 넣기 전에는 100리터였다. 넣고 나서 35리터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2주 만에 다시 오르고 있다. 9일마다 두 배. 처음보다 빠르다. 점액 안쪽에서 살아남은 것들이, 바깥쪽의 죽은 동족을 먹고 다시 퍼지고 있다. 쥘리에트의 현미경 화면에 쉼표 모양의 사슬들이 다시 꿈틀거린다.
살균제는 반쯤 들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필터는 남은 것 대부분을 써 버렸다. 투하로 받은 스무 개를 더해도, 지금 남은 건 스무 개 남짓이다. 침전 드럼과 행주를 거쳐도 하루 두세 개씩 사라진다.
7월 17일 밤, 탱크 구역 당번. 새벽 3시. 짝은 천위다. 천위는 의자에 앉아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다.
나는 소리를 듣는다.
탁, 쉬이이, 탁.
나는 고개를 든다. 이 소리는 6월 10일부터 벽 너머에서 났다. 미샤와 내가 숨구멍에 호스를 이어 바깥으로 뺐으니까. 그 뒤로 이 소리는 벽 밖의 소리였다. 멀고, 작았다.
지금은 가깝다. 머리 위다.
나는 사다리를 A 탱크에 건다. 올라간다. 헤드램프로 숨구멍을 비춘다.
호스가 빠져 있다.
숨구멍 끝의 금속 뚜껑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빠진 호스는 탱크 위 단열재 위에 늘어져 있다. 뚜껑이 탁 열리고, 쉬이이, 기체가 뿜어 나와 내 얼굴에 닿는다. 차갑고, 냄새가 없다. 탁 닫힌다.
나는 호스를 집어 든다. 호스를 따라 벽까지 손으로 더듬어 간다. 벽 구멍. 그 너머는 바깥이다. 나는 사다리에서 내려와 파카를 입고 북쪽 벽 바깥으로 나간다. 영하 71도. 호스의 바깥쪽 끝을 찾는다. 눈 둔덕 속에 묻혀 있다. 한파 때 미샤와 내가 쌓아 올린 그 둔덕.
호스 끝을 파낸다. 헤드램프로 비춘다.
호스 입구가 막혀 있다. 하얀 서리로, 코르크 마개처럼 단단하게.
탱크에서 나오는 기체에는 수증기가 섞여 있다. 영상 3도의 탱크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수증기. 그게 영하 83도의 바깥 공기에 닿는 호스 끝에서 얼었다. 한 겹씩, 매일, 조금씩. 한파 동안 우리가 그 끝을 눈으로 덮었고, 서리는 갈 데 없이 쌓였다. 호스가 막히자 기체는 갈 데가 없어졌다. 탱크 안의 압력이 올라가고, 그 압력이 호스를 숨구멍에서 밀어냈다.
언제부터?
나는 날짜를 거꾸로 센다. 한파가 시작된 날. 우리가 건물을 막은 날. 환기구 덮개를 닫은 날. 7월 12일, 13일.
닷새.
닷새 동안, 탱크가 하루 100세제곱미터가 넘는 기체를 내뱉었다. 숨을 못 쉬게 막아 둔 우리 집 안에.
나는 다시 안으로 들어간다. 탱크 구역에 선다. 위를 올려다본다. 천장까지 10미터. 헤드램프 불빛이 철골 사이 어둠에 닿지 않는다. 그 어둠 속에, 닷새치의 냄새 없는 기체가 고여 있다.
천위가 노트북에서 고개를 든다. 내 얼굴을 본다.
“왜요?”
나는 숨구멍을 가리킨다. 탁, 쉬이이, 탁.
“탱크가 숨을 쉬어요.” 내가 말한다. “우리 집 안에서.”